39화. 포도밭 골목
애들에게 원소학 마법을 보여주다가 여자애와 말다툼이 붙었다고 했다.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도 몇 대 맞으면 끝이 아니냐면서. 그러다가 몸싸움까지 났다는 것이다. 사과를 시킨 다음 늑대인간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담배가 그리웠다.
“얘는 씨발, 어린애랑 싸우고 있어. 너 몇 살이야.”
“열 넷입니다.”
그리운 게 아니라 시급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대답을 듣고 있자니 어조가 거칠어졌다.
“아니, 씨발아, 니 몇 살이냐고.”
“제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내가 물어봤잖아. 몇 살이냐고.”
테네브로즈가 목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인간 나이로 치면 서른 초중반쯤이 됩니다.”
그게 실제로는 몇 해인지가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요정은 인간보다 한참이나 수명이 길었으니까. 이 새끼가 만약 백 년쯤 살았다 치면 정말로 화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래 사신 분이, 씨발, 열두 살짜리랑 싸우고 계세요.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냐? 어린애 하고 싶어? 그냥 마법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시종으로 살래?”
“죄송합니다.”
“내가 뭐 물어보는데 한 번만 더 죄송하다고 하면 진짜 죽인다.”
원래는 앞으로의 계획을 논해볼 생각이었는데 머릿속이 잔뜩 뒤엉키고 말았다. 덕분에 짜증만 실컷 내는 중이었다. 이 새끼를 갈군다고 해서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그냥저냥 끝난 일인데.
세카두에서 칭찬을 했던 게 다른 세상의 일인 듯 생경했다. 란드와르는 자문했다. 내가 이 새끼의 정신머리를 과대평가했던 걸까? 싸한 분위기 속에서 테네브로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으리, 뭐 하나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잘 생각하고 말해라. 쓸데없는 소리면 가만히 있고.”
“그 소녀 말입니다, 저와 싸우던 도중에 혈마법을 쓰더군요.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확실합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곳 출신이 아니라 친척 집에 놀러온 아이라는데··· 원래는 중부 외곽지역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쪽이 혈마법 거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의심할 만하지요.”
얼떨떨한 느낌이 사라지자마자 짜증이 확 가셨다. 경위가 어쨌건 간에, 단서가 하나라도 늘어난다면 좋은 일이었다. 란드와르는 훨씬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너 혹시, 뭐 눈치 채서 증거 잡으려고 일부러 그런 거냐?”
“아닌데요.”
귀를 의심할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닌데요?
“이럴 때 네, 하면 얼마나 좋냐. 그러면 내가 사과도 하고 칭찬도 해 줄 거 아니야.”
“아닌 걸 그렇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는 미친 요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단념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든 뭐든 간에 더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금 깨달은 게 패착이었다.
“야, 됐다. 애랑 싸운 문제는 여기서 끝내고 건설적인 이야기로 넘어가자. 일단 생각 좀 하고.”
가능성이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정신지배가 걸린 생쥐를 들여보내는 것만으로도 필요한 수준의 정보는 모을 수 있겠지만, 직접 잠입한다면 요정과의 접촉이 훨씬 쉬워진다.
만약 테네브로즈가 여자애와 친해질 수만 있다면.
흰둥이 저항군과 연이 닿는다면.
그래서 울쿠스와 독대할 수 있다면.
축복이 유지되는 기간은 네 달.
연극을 핑계로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세 달쯤.
빠듯하긴 해도 시간은 얼추 맞았다. 확실한 증거를 잡아내고, 대장군들의 협조를 얻고, 스카르파를 몰아붙이기만 하면 남은 일은 하루 안에도 끝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씨발, 두세 달 안에 그게 되나? 된다고 쳐도 이 요정이 그게 가능한 놈인가? 결국엔 흰둥이들의 피를 봐야 할 가능성이 걱정스러웠다. 그게 싫어서 우회로를 찾아보는 중인데도.
사실 무식하게 해결하려면 지금 당장 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 중부 기지로 달려가서 교단 서한을 들이민 다음 협조를 요구하는 것이다.
증거는요? 직접 가서 봅시다.
외곽지의 농장을 습격해서 농부들이 혈마법을 쓰며 저항하는 모습을 관람한다. 중부 대장군이 묻는다. 이 흰둥이들이 누군가에게 혈마법을 배웠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 배후가 스카르파 왕이라는 증거는 어디 있습니까?
아즈리온께서 신탁으로 말씀하시길 아무튼 관련이 있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는 놈들을 고문해 보지요. 아니, 그냥 스카르파를 죽이려 하면 알아서 본색을 드러낼 텐데, 직접 칼을 들이밀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란드와르는 막무가내식 각본을 실컷 써내려가다가 멈췄다. 이랬다가는 아즈리온의 사제가 미친 짓을 하고 다닌다면서 야스와다까지 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애당초 그 전에 일이 꼬이겠지. 스카르파가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
정답을 아는 것과 그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주관식과 서술형만큼의 차이가. 현실은 당연히도 기나긴 서술형이었다.
그는 태도를 바꾸어 볼로디아에게 말을 걸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극단에 들어가는 걸 진지하게 고려하고 싶습니다. 형님께서 배역을 맡으신다면 장기 체류증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군부와도 조금이나마 접점이 생길지도 모르고요.”
“교단에도 이 일을 납득시켜야 할 텐데, 그 부분에서는 문제가 없소?”
“없습니다. 이건 장담할 수 있습니다.”
란드와르는 모든 계산에서 교단 문제를 빼 놓고 있었다. 안일한 발상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정보사는 아홉 교단의 숨은 중추였던 것이다. 이런 허가쯤이야 일도 아니다.
“장기 체류증을 얻어낸 뒤에는, 이 요정을 혈마법 근거지에 잠입시켜 볼 생각입니다. 이방인이긴 하지만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 혈마법을 배웠다는 건 이미 금기를 범했다는 뜻이니까요. 방법은 조금 더 강구해 보아야겠습니다만.”
란드와르는 흰둥이 저항군의 성격을 떠올렸다. 저항군은 단일 세력이라기보다는 점조직이 느슨하게 규합한 형태. 그런 만큼 지도자 역시 한둘이 아니다.
이중에서 혈마법을 받아들인 계파는 저항군 내에서도 고립된 상태. 조력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울쿠스가 겨냥한 것도 그 부분이다. 지도자가 감옥에서 탈출하도록 도움을 준 뒤 조직에 섞여드는 것이다.
물론 완전히 일원이 된 것은 아니다. 비정기적으로 만나는 게 고작이다. 계속 같이 지냈다가는 정체를 들킬 수밖에 없으니까. 따라서 울쿠스를 먼저 불러내려면 저항군과의 관계가 돈독해져야 한다.
“거점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 주로 혈마법을 수련하는지도요.”
볼로디아는 긴 숙고 끝에 입을 열었다.
“정보의 출처가 궁금하오.”
“출처를 물으시는군요. 진위 여부를 의심하진 않으십니까?”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오. 나는 이제 당신을 믿을 준비가 됐소. 그러니 의심의 반경을 넓혀 보는 거요.”
란드와르는 의식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볼로디아의 말이 옳았다. 믿지 않을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검증할 필요가 없었지만, 무언가를 믿으려면 수십 수백 가지의 석연찮은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했다.
어쩌면 화신이라는 걸 밝히게 될지도 모른다. 타이밍은 훌륭했다. 그걸 믿어주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어려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생각하고 계시는 바를 처음부터 말씀해 보시지요.”
“당신은 교단의 일원이 아니오. 조직에 복속된 사람은 그렇게 행동할 수 없어.”
확신에 찬 단언이었다. 펠로시조차 이상한 기류를 눈치 챈 판에, 전직 군인이 그걸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신중한 문장들이 이어졌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소. 헌데 당신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나를 구출한 다음 앞으로의 계획을 일러주고 있는 거요. 그 과정에서 다른 사제들이 한 일이라고는 전사 하나가 깨어나기를 기다린 것밖에 없소. 굉장히 이상한 상황이지.”
“짐작하시는 바가 있을 줄로 압니다.”
볼로디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들은 내게 축복을 내린 게 당신이라더군.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지. 사제가 축복을 기원했고, 아즈리온은 그에 응답했다. 혹은······.”
말이 멎었다. 이어질 낱말을 채워 넣는 것은 란드와르의 몫이었다.
“미오리타.”
견습 천사의 이름을 부르자 금색 머리카락을 단발로 친 소녀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거창하진 않아도 충분히 신비로운 빛이 방을 엷게 감쌌다. 진작 준비를 시켜둔 보람이 있었다.
“아즈리온 님의 종, 미오리타! 그분의 말씀을 받들어 여기 왔습니다!”
발랄한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란드와르는 볼로디아와 눈길을 맞췄다.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단련해 왔을 게 분명한 초연함이 다른 감정을 압도하는 듯했다.
“이것으로 모든 설명을 대신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신으로 대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아즈리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계의 일원이라고만 알아주십시오.”
그는 묘한 존경심 속에서 결론부로 나아갔다. 볼로디아가 석연찮은 투로 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이렇게 답하오만, 내 말투가 너무 무례한 것이 아닐까 걱정스럽소. 당신이 아즈리온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저 천사보다는 지위가 높을 게 분명하니 말이오.”
“저는 그런 걸 따지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요정이 여기 있지도 않았겠지요.”
기다렸다는 듯 볼로디아의 시선이 테네브로즈에게로 향했다. 진심 어린 질문이 날아들었다.
“함께 다니는 이유가 의문이오. 여러 가지로.”
란드와르는 삼십 분 전의 상황을 복기했다. 테네브로즈는 늑대인간 소녀와 싸우다가 그 삼촌에게 끌려왔고, 덕분에 욕도 실컷 먹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우스웠다. 요정 놈을 그렇게 갈구고서는 곧바로 볼로디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씨발, 누가 보면 이중인격인 줄 알겠다.
“비록 제정신이 아닌데다가, 이상한 짓을 하고, 숨기는 것도 있지만··· 시킨 일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놈입니다. 그렇게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 유능합니다. 똑똑하고요.”
테네브로즈가 당당하게 말을 얹었다. 욕을 잔뜩 먹어 놓고도 저런 소리를 하다니 과연 제정신이 아닌 새끼였다. 성장과정이 궁금했다.
“넌 일단 조용히 하고,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하자.”
“지금 하셔도 되는데요.”
란드와르는 머리에 힘을 주었다. 아직은 엄격하고 근엄한 태도를 유지해야 했다. 아니, 씨발, 꼭 그래야 하나? 어차피 볼로디아도 볼 건 다 봤는데? 본론도 거의 끝났는데?
고민이 깊어지다가 뚝 멎었다. 볼로디아의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은 처음인 것 같았다.
“나는 평생 동안 요정을 미워하면서 살았소. 허나 저 요정에게는 예외를 두어도 될 것 같군. 당신 말대로 별종이긴 하지만, 악하거나 교만한 자는 아닌 것 같으니 말이오.”
자세한 사정을 밝히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이 새끼가 정말로 착했더라면 가문에서 쫓겨난 다음 허허벌판에 오두막이나 짓고 살았을 터였다. 나트람의 오른팔이 돼서 거슬리는 놈들을 암살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
란드와르는 이스빈드를, 참주의 별점술사를 떠올릴 때마다 피눈물이 났다. 테네브로즈가 그 절반만이라도 말을 잘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착한 심성은 바라지 않으니 눈치라도 있으면.
하지만 테네브로즈는 기본적으로 개새끼였다. 그것도 광견병 걸린 개새끼. 우리 개새끼라서 봐줄 뿐이지 나트람에게 버림받지 않았으면 중간 보스쯤은 되었을 게 뻔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는 점은 고맙지만, 그놈들보다 나쁘면 나빴지 좋은 축은 아닐 겁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두통이 올라오고요.”
볼로디아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요정이란 대개 잡혀 죽을 때조차도 상전인 것처럼 구는 놈들이라오. 거기에 비하면 한참이나 어린 아이들 앞에서 마법을 자랑하다가 얻어맞는 건 귀여운 수준이지. 덕분에 얻어낸 정보도 있고 말이오.”
“대장군께서 제 진가를 알아보시는군요. 기쁩니다.”
테네브로즈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란드와르는 무언가 반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녀석이 착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지만 전형적인 악인이라기에도 이상했다. 그냥 이상한 놈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기묘하게도 평안해졌다. 이상한 놈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니까.
당연한 일로 짜증을 내기엔 상황이 잘 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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