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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38화 (39/258)

38화. 포도밭 골목

“아이고, 우리 손녀가 어쩌다가 나쁜 물이 들어서··· 거, 수도원에서 지낸다고 했지? 죽을 때까지 거기 갇혀 있어야 하는 거요?”

거대한 개를 옆에 두고 술잔을 기울여야 하다니, 실로 초현실적인 순간이다. 술주정을 하는 개의 이름은 딜. 포도밭 골목의 최연장자고 펠로시에게는 증조할머니가 된다. 첫인상만큼 근엄하진 않지만 어쨌거나 그렇다.

“아니, 뭐, 저희 교단이 감옥도 아니고 설마 그러겠습니까. 갱생의 기회를 주는 거죠. 예, 갱생의 기회를. 도박중독자 풀어놔 봤자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텐데··· 잠깐만. 이거 한 병 더 없습니까?”

란드와르는 엉겨 붙는 사모예드를 밀어내고는 허공을 향해 빈 병을 흔들어 보였다.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브랜디를 물마시듯 들이키시네요! 창고 찾아볼 테니까 기다려요. 그동안 포도주로 입가심 하시고.”

딜 큰할머니를 어찌저찌 설득하자마자 근처 술집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양조장이 바로 옆인데다가 남는 포도까지 있으니 포도주는 항상 넘쳐난다고 했다. 브랜디도. 심지어 같이 마실 늑대인간 수십 명까지 있었다.

몸이 취하진 않았지만 분위기에는 취할 수 있었다.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가 훅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흰둥이고 뭐고 간에, 대책 없이 유쾌한 사람들이라서 좋았다. 마음에 들었다.

···볼로디아는 의견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형님분은 성격이 완전히 딴판이시구만. 한 잔 마시지 그래요?”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자니 미안하군. 나가 있겠소.”

곧바로 분위기가 싸해졌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볼로디아의 뒷모습이 문간 너머로 사라졌다. 란드와르는 술맛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씨발, 좀 즐기자는데 그걸 못 참아서.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이해는 하는데, 씨발, 그래, 이해는 하는데··· 란드와르는 머리에 힘을 주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볼로디아의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냥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게 불편할 뿐이다.

“잠시 따라가 보겠습니다. 저희 형님이 보기와는 다르게 낯을 많이 가리시거든요. 돌아왔을 때 탁자에 브랜디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래, 잘 찾아볼 테니 이야기 하고 오라구!”

란드와르는 늑대인간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바깥으로 나섰다. 술집 문이 닫히자마자 암막으로 등잔을 감싸 덮은 것처럼 세상이 어둡고 차분해졌다.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란드와르는 볼로디아의 뒷모습과 어둠에 잠긴 건물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운을 뗐다.

“너무 거리를 둘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거리는 내가 두는 것이 아니오. 저 치들이 유지해야 하는 것이지.”

뒤를 돌아본 볼로디아는 란드와르와 시선을 마주쳤다.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란드와르는 순간 그녀가 순혈 중의 순혈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딱히 오만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상류층 특유의 자긍은 있기 마련이다.

“타우베스 형님, 다들 고마운 사람입니다. 너그럽게 받아 주시지요.”

“착하고 해맑은 사람들이지. 우리와는 달리 유쾌하고.”

“그렇습니다.”

“조금 더 걷는 게 좋겠소. 길은 언덕에 올랐을 때 대강이나마 봐 두었으니.”

볼로디아는 익숙한 태도로 길을 헤쳐 나갔다. 광장 중앙의 큰 나무를 지나고서는 조금 더 걷자 농기구 창고가 나타났다. 안쪽은 어둡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왕위는 혈통으로 이어지지만 대장군 직위는 능력제요. 공석이 생길 때마다 자격 있는 군부 대원들이 도전장을 내지. 그들을 한데 모아 결투를 벌이는 거요··· 볼로디아도 동일한 방식으로 북부 기지의 사령관이 되었소. 각 기지의 사령관은 대장군에게만 주어지는 자리거든.”

“지나간 시절이군요.”

란드와르는 지나간, 에 강세를 두어 발음했다. 심정은 이해했지만 옛 영광을 계속 더듬어가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볼로디아는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는 듯 살짝 웃었다.

“계속 들어 보시오. 북부로 떠나기 전에, 볼로디아는 중부 기지의 장교였소. 토벌전에 참가하지 않을 때에는 반역자를 찾아 처단하는 일을 주로 맡았지.”

이건 들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다. 요정의 수법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보통은 신원을 가로챘다. 쉽게는 자리에 없는 사람의 얼굴을 빌렸고, 아예 누군가를 몰래 죽여 파묻을 때도 있었다. 인간 교단에서 보내온 사절인 척 접근하기도 했다.

“그런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오. 환술을 쓰더라도 긴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상한 점이 드러나기 마련이거든. 애당초 위장할 수 있는 신분에도 한계가 있소.”

괴수 형상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요정은 인간보다 체구가 약간 작거나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순혈 늑대인간을 흉내 내기에는 키가 턱없이 부족했다. 완력 역시도.

따라서 요정이 말루카에 숨어들려면 흰둥이 남자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괴수 형상을 취할 수 있는 건 늑대인간 중에서도 여자뿐이었으니까.

“아마도 이 도시가 천 년간 존속한 데에는 그것도 한 몫을 했을 거요. 흰둥이들조차 항상 경계를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떤 저항군 지도자는 아예 요정과 손을 잡았소.”

“별 탈 없이 진압했으니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겠지요. 어쩌다가 들켰습니까?”

볼로디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항군에도 계파가 여럿이오. 다른 쪽에서 밀고를 했지. 지도자는 감옥에서 죽었소. 내가 죽인 거요.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진 않았지만. 한 달쯤 뒤에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애가 칼을 들고 덤비더군.”

“그 지도자의 자식이었습니까?”

“그렇지. 나더러,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라지 뭐요. 아이의 뺨을 후려갈기고는 이렇게 속삭여 주었소··· 그래서? 그 여자는 이 도시를 요정에게 팔아넘기려 했는데?”

“지당한 대답이군요. 어머니를 잃은 꼬마에게는 폭언일 테고요.”

란드와르의 촌평에 볼로디아는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 애를 타일러서 돌려보낼 수도 있었소.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의심과 기억. 말루카를 상징하는 두 단어였다. 가장 가까운 친지조차 의심해야 했고 그와 나눈 대화는 모두 기억에 남겨야 했다. 만약 그게 위장한 요정이라는 게 드러났을 때, 어떤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을 밝혀내도록.

누군가가 고문 끝에 죽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충분히 불행했다. 볼로디아는 그들을 동정했다. 동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이 땅은 불행으로 이루어져 있소. 그 불행이 도시를 지탱하오. 나는 그 불행을 수호하던 사람이오.”

***

볼로디아와 대화를 마치고서는 술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계속 마셨다. 브랜디는 물론이고 창고에 있던 포도주 통들이 거덜 나도록 마셨다. 칼에 찔리면 피가 아니라 포도주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마시고도 멀쩡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축복이라도 받은 건가요, 아니면 원래 술이 세신 건가요?”

이렇게 묻는 여자는 펠로시의 언니, 마조람. 술자리도 파하는 분위기가 되자 숙소를 알려주겠다며 란드와르와 볼로디아를 끌고 나왔다. 술주정을 받아주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저주입니다.”

“저주라고요?”

“마셔도 취하질 않으면 술을 왜 마십니까. 시냇물이나 떠 마시면 그만이지.”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최소한, 이 상황에 한해서는 저주가 맞았다. 얼굴이라도 붉어졌으면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 나올 수 있었겠지만 결국엔 다른 사람들이 먼저 뻗었다.

“오늘 낮에 대강 청소를 하긴 했는데, 평소에 잘 안 쓰는 곳이라 구석에는 먼지가 있을지도 몰라요. 짐은 미리 옮겨 뒀구요.”

임시 숙소는 마을회관 2층의 손님방이었다. 화려하거나 아늑한 곳은 아니었지만 침구는 갖추고 있었다. 무슨 호사를 누리러 온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나저나 일정이 어떻게 되셔요? 일단 내일은 캐러웨이 부인을 만나러 간다고 하셨고··· 그 다음에는요?”

“딱히 정해진 게 없습니다.”

물론 완전히 미정은 아니었다. 마조람에게 말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흰둥이 저항군의 주요 거점과 구성원은 이미 알고 있는 상태.

대뜸 흰둥이들에게 말을 걸 수는 없겠지만, 테네브로즈가 생쥐를 잘 붙여 보내면 해결될 문제였다.

“앗, 그러면 혹시 캐러웨이 부인이랑 이야기를 해 보시는 건 어때요? 바쁜 와중에 이런 말씀 드리려니 미안하지만, 배우를 구하고 계시거든요. 형님분이 딱 어울려서요. 혹시나 시간이 되면······.”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이 땅이 이방인에게 그토록 관대한 곳인지 몰랐소.”

볼로디아가 딱 잘라 말했다. 란드와르는 거기에 검문소 직원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다행히도 마조람은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않은 듯했다.

“원래는 인간 배우를 안 써요! 그런데 이게 경우가 좀 달라서요.”

극단이 준비하는 연극은 천 년 전의 대전쟁을 다루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늑대인간들의 해방을. 고전인데다가 스케일까지 커서, 군부 축연에서는 단골로 등장하는 내용이라고 했다.

당연하게도 대전쟁 이야기라면 아즈리온이 빠질 수 없었다. 아무한테나 맡길 수 없는 배역이기도 했다. 까딱했다가는 신성모독이 될 테니까. 그래서 교단이랑 협약을 맺고 무대에 설 사제들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오기로 되어 있던 사제가 긴급 파견을 나갔다가 다리를 다쳤다더라구요. 한 달은 더 누워 있어야 한대요. 대신 온 사제들은 아즈리온 역할을 맡기엔 너무 키가 작고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으려나 하고······.”

“아.”

볼로디아가 알겠다는 듯한 신음을 흘렸고 란드와르는 나비효과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야스와다에서 옛 신을 깨웠고, 덕분에 별의 운행이 뒤틀렸고, 그래서 괴수들이 흉포해졌고,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들은 긴급 파견을 나갔다. 그리고 여차저차.

검투사 노릇도 했는데 배우쯤이야 못할 것도 없었다. 관건은 그럼으로서 얻을 이득이다.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스카르파가 연극을 좋아한다지만 그건 개인의 취향에 불과했다.

지금은 저항군 중요 거점을 모두 알고 있는 상황. 극단이 혈마법과 관련 있을 가능성에 도박수를 던질 필요가 없었다.

“어쨌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소.”

볼로디아도 제안이 달갑잖은 투였다. 옛 부하들을 그런 식으로 대면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정말 완벽한데 아쉽네요! 하긴 무리한 부탁이긴 했어요. 적어도 두세 달은 계셔야 할 텐데, 갑자기 그렇게 시간을 내기는 어렵죠. 교단 허락도 따로 받아야 하고요.”

···하지만 두세 달이라는 말을 들으니 판단이 곧바로 뒤집어졌다. 볼로디아를 극단에 넣어두기만 하면 장기 체류증이 생기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은 테네브로즈와 함께 말루카를 돌아다닐 수 있을 터.

이해타산을 따져볼 때였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란드와르 일행은 교단 사절도, 민간인 자격도 아닌 애매한 신분이 된다. 이 중간적인 위치가 어떤 영향을 줄지는 분명치 못했지만 단견으로는 나쁠 게 없어 보였다.

결론에 이르는 동시에, 기묘한 깨달음이 란드와르를 덮쳤다.

그랬다.

자신이 바로 아즈리온이었다.

이 늑대인간은 진짜 화신을 내버려두고 애꿎은 사람을 캐스팅하고 있는 것이다. 직접 무대에 나설 생각이 전혀 없을지라도, 이유가 궁금했다.

“잠깐만요, 그런데 왜 저한테는 안 물어보시는 겁니까? 저도 교단 사제인데요.”

“형님분이 좀 더 근엄하고 키가 크시잖아요. 우리 전사님도 멋지긴 하지만 아무래도 무대에 서려면······.”

마조람은 당연하다는 양 말끝을 흐렸다. 적당한 반박이 떠오르지 않았다. 란드와르도 당연히 성인 남성 평균보다는 훨씬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볼로디아는 거기에서 한 뼘이 더 컸던 것이다. 미묘한 박탈감이 느껴졌다.

씨발, 내가 아즈리온인데.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반박할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가 극단에 들어가야 한다면 그건 볼로디아여야 했다. 말루카 시나리오를 완주하는 데에는 테네브로즈의 몫이 컸고, 놈을 통제할 사람은 란드와르가 유일했다.

···잠깐만, 이걸 왜 까먹고 있었지?

란드와르는 미간을 좁혔다. 녀석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물론 찾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놈도 아니었지만, 풀어뒀다가는 무슨 사고를 칠지 몰랐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저희랑 같이 온 남자애 보셨습니까? 고동색 머리요. 이거 낭독회 끝내자마자 술판에 끌려가서 못 챙겼는데, 혼자 두면 안 되는 놈입니다.”

“시종 말씀이시죠? 애들이랑 놀고 있던데요!”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의 겉모습을 상기했다. 키는 160 초중반. 겉모습은 환술을 써서 인간 소년처럼 바꿨고, 남이 물어보면 열네 살이라 말하라고 시켰다. 애들이랑 놀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속에 들어 있는 게 요정족 부제사장이라는 것만 빼면.

“애들이랑요? 놀아요?”

“싸우나 싶더니 잘 몰려다니던데요! 또래 인간은 처음 보니까 신기했을 거예요.”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당장 찾으러 갑시다. 애들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줘요.”

“누가 알아서 끌고 오지 않을까요? 어차피 사제님들 여기서 주무시는 건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요, 이 시간이면 애들도 자기 엄마한테 질질 끌려가고 있을 거라서요. 애들은 조금이라도 늦게 자려 하고, 부모는 그거 잡으러 다니고. 완전 전쟁이죠!”

순간 그림자가 문짝을 밀고 들어왔다. 험상궂은 중년 남자였다. 그 뒤에 있는 건 테네브로즈. 그리고 요정 놈보다 키가 약간 큰 늑대인간 소녀. 둘 다 옷에 흙이 잔뜩 묻었다.

“말 잘 했수다. 이 자식 간수 좀 하시오. 조카 녀석은 내가 알아서 가르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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