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포도밭 골목
란드와르는 포도밭 골목 초입에 내리자마자 성북구 일대의 난개발 현장을 연상했다. 저층 벽돌집과 사무실로 쓰일 법한 건물들이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고, 낡아빠진 마을회관은 세련된 군부 건물과 등을 맞댄 채다.
“도시설계를 개같이 했네. 이거 군부 사무실 들어가서 길 물어봐도 되냐?”
“나으리, 사람들이 듣고 도망갑니다. 엮이기 싫은 표정인데요.”
“신경 쓰지 마. 가만히 있어도 도망갈 놈들인데.”
다시 볼로디아가 나섰다. 포도밭 골목에 와본 적은 없지만 구획을 나누고 집의 순서를 구분하는 방식은 알고 있다고 했다.
“일단 이 곳을 한눈에 내려다볼 장소가 필요하오. 저쪽 경사로로 올라가면 될 것 같군.”
볼로디아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아 가장 높은 곳에 오르더니 동남쪽의 블럭을 짚어냈다. 반신반의하며 내려가 보자 정말로 근처에 <네 번째 집> 이라 쓰인 문패가 있었다. 역시 현지인 가이드는 중요했다.
란드와르는 문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외쳤다.
“소식 좀 전하러 왔습니다.”
문을 열고 나온 여자는 란드와르와 볼로디아의 머리색을 보자마자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매끈한 손등을 확인하자마자 목 깊은 곳으로부터 그르렁 소리가 올라왔다. 마치 늑대를 경계하는 양치기 개 같다.
“뭐야, 인간이잖아. 꺼져!”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체류증도 정식으로 받았고요.”
칼자루에 달린 교단 징표를 보여주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여자는 거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인간 사제가 포도밭에 볼 일이 뭐가 있어? 여기가 군부 기지로 보여? 길이라도 잃은 거야?”
“그···참, 그냥 이걸 보시는 게 서로 편할 것 같군요.”
란드와르는 옆구리에 낀 종이뭉치에서 소개장을 꺼냈다. 처음에 쓴 것으로. 정혼자라는 거짓말을 여기에서까지 이어간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만약 나중에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지적을 받더라도, 솔직히 털어놓을 자신이 없었다고 해명하면 그만이었다.
“펠로시!”
서명을 확인한 여자는 그렇게 외치더니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곧이어 열린 문틈 사이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펠로시가 소개장을 보냈어? 펠로시가? 냄새를 맡아 봐. 아니, 발바닥 모양을 봐야 돼. 마조람, 네 발이 제일 닮았잖아!
짧은 시간이 흘렀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꼬리를 흔드는 사모예드와 중년 부인이 함께 나왔다. 둘 다 얼굴엔 해맑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개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미안해요. 요새 군부 사람들한테 하도 시달렸더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여기까지 오는 인간도 별로 없다보니 의심부터 하고 봤네요!”
부인의 말이 그 뒤를 따랐다.
“다른 두 분도 일행이시죠?”
“예, 형님분과 시종입니다. 말루카에 따로 볼 일이 있어 들렀습니다. 둘 다 교단 소속이고요.”
란드와르는 부인이 다른 둘을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 주었다. 볼로디아가 말없이 묵례했다.
“형제분끼리 키가 크시네.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안 그래도 점심 준비하고 있었는데, 들어와서 같이 먹어요.”
란드와르는 문득 검문소 직원의 불평을 상기했다. 흰둥이들이 다른 늑대인간보다 더 서글서글하고 경계심이 부족한 편이라는 건 자명해 보였다. 볼로디아는 그렇게도 의심을 하지 않았던가. 상황의 특수성이라는 게 있을지라도······.
일단은 만족하기로 했다. 군부에게는 나쁜 일이었지만 이방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
점심은 평범하게 맛있는 빵과 고기 스튜였다. 늑대인간들은 식사 내내 펠로시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잘 살고 있는지.
기대감 어린 눈빛 앞에서, 란드와르는 잠시 갈등했다. 진실을 밝힌답시고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다. 볼로디아와 테네브로즈도 비슷한 생각인지 저마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가 머리는 좋아도 이상하게 멍청한 구석이 있어서 걱정했거든요. 어릴 때에는 자기 언니한테 맨날 속아먹고 울면서 들어오던 애였다니까요.”
“그렇군요.”
“게다가 소식도 전혀 없어서 어디 사기당한 건 아닌가 했지요! 이렇게 말씀을 듣게 돼서 맘이 놓이네요. 성격은 아직도 그대로인가요? 어때요?”
“미치··· 아닙니다. 밝고 활기찬 사람입니다.”
란드와르는 미친것이라는 단어가 입을 빠져나가기 전에 황급히 멈췄다. 수다스러운 늑대인간들에게 둘러싸인 탓인지 정신이 계속 혼미해졌다.
아니, 이야기의 내용 때문일지도 몰랐다.
늑대인간들은 펠로시를 영리하고 착한 아이로 기억했다. 덜렁대는 면이 있긴 하지만 일머리가 좋은 소녀로. 말루카의 포도밭에서 썩기엔 아까운 인재로.
펠로시의 대출원금이 1만하고도 3,000탈로나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채신머리없는 도박중독자가 빌리기에는 좀 많은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카스바 각인소의 여섯 달치 월급이 4,000탈로나였으니까. 한국으로 치면 거의 1억에 가까운 돈을 들고 유학을 나온 셈이었다.
그랬다. 열일곱 살의 펠로시는 모두의 기대를 짊어진 총아였던 것이다. 변방의 농부들이 어떻게든 거금을 모아서 인간 세상 유학을 보내줄 정도로. 란드와르는 도박의 폐해를 절감했다.
“그나저나 펠로시랑은 어쩌다가 알게 되신 건가요? 소개장에 보니 은인분이라고 쓰여 있던데요, 아무래도 각인사가 아즈리온 교단에 신세를 질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아서······.”
다시 고민이 깊어졌다. 씨발, 그냥 솔직히 말해?
하지만 펠로시는 가족이 아닌 친지에게도 돈을 실컷 빌린 상황. 그 사람들을 모아놓고 낭독회를 하려면 마을 회관쯤은 써야 했다. 진실을 밝히는 시점은 저녁으로 미뤄둬도 괜찮겠다는 계산이 섰다.
아직은 꿈을 꾸도록 내버려두자.
“임무를 수행하다가 만났습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펠로시가 이 동네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더군요. 사람들을 모아서 대신 읽어주기로 했습니다.”
“와, 기대가 되네요! 펠로시한테 돈을 빌려준 집안이, 마을회관에 다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일단은 다들 모아 볼게요.”
“채권자 목록은 저도 봤지만··· 정말로 그렇게 많습니까?”
“아유, 그럼요. 이 동네에서 펠로시 하면 유명인이죠. 만나봐서 아시겠지만 포도 농장에서 일하다가 늙어 죽기에는 아까운 애에요. 똑똑하고, 말도 잘 듣고, 착하고, 마법 실력까지 좋고.”
란드와르는 체할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 입에 빵을 밀어 넣었다.
***
세카두에서 가져온 궤짝에는 마력 결정이 가득 담긴 채였다. 일정한 크기로 잘린 결정 막대들이 명주실로 묶여 있었고, 각각의 실 끄트머리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기준일 시세가 명시된 품질 확인서도 함께였다.
“최상급 마력 결정입니다. 로야페타 서부 거래소에서 기준무게당 198.7탈로나에 거래되고 있다는군요.”
펠로시의 친척과 지인들이 마을회관에 모여든 건 저녁 무렵이었다. 대강 세어 보아도 쉰 명은 훨씬 넘는 것 같았다.
란드와르는 낭독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연단에 마력 결정이 담긴 궤짝을 올려놓고서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펼쳤다.
앞줄에 앉은 늑대인간들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뒷줄의 사람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가 외치듯 물었다.
“그, 그, 그래서 이게 다 얼마죠?”
“빌려간 돈이 도합 1만 3,000이니까, 이자까지 해서 그 두 배를 갚겠다는군요. 물론 절반쯤은 캐러웨이 부인의 몫이지만요. 나머지 채권자 목록과 금액은 세카두에서 다 정리해서 왔습니다. 편지와 함께 마력 결정을 전해드릴 테니 제가 부르는 사람은 연단으로 올라오십시오.”
원래는 캐러웨이 부인에게 편지와 궤짝을 함께 맡기기로 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채권자 대부분은 포도밭 골목에 살고 있었다. 조금 귀찮을지라도 할 수 있는 일처리는 여기서 마칠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이름이 불린 것은 중년 남성이었다.
“크게 될 애라고 생각했수다. 정말이오.”
“아, 예, 그렇죠······.”
남자는 마력 결정과 편지를 넘겨받은 뒤 악수를 청했다. 손을 맞잡은 란드와르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할 말이 없었다. 곧바로 또 다른 남자가 올라오더니 비슷한 말을 뱉었다. 여전히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이제 남은 건 반성문을 읽는 것뿐. 란드와르는 모여 앉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딱 하나 있는 안락의자에는 딜 큰할머니라 불리는 노부인이 앉았고, 펠로시의 가족들이 앞줄을 차지했다. 볼로디아는 가장 뒤에 서서 심란한 표정으로 흰둥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테네브로즈는··· 어디 갔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순간이었다. 비록 테네브로즈가 도덕관념이 없고 꽤 자주 정신이 나가는 놈이긴 하지만 여기서 사고를 칠 만큼 분별이 없진 않았다. 최소한 란드와르는 그렇게 믿었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반성문을 펼쳤다.
“잘 지내시나요? 저는 지금 세카두에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10년간 한 번도 고향에 가질 못했네요.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언제나 현실이 제 발목을 잡습니다. 사실은 열여덟 살 이후로 현실이 좋았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첫 문단에 마침표가 찍히자마자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란드와르는 목을 가다듬은 뒤 다시 낭독을 시작했다.
“···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기점은 선배와 함께 홀짝 노름판에 놀러간 그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캐러웨이 부인께서 주신 보석을 돈으로 바꿔서 노름을 시작했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한 달 동안 두 배가 넘는 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열여덟 살이었고 수중에는 3만 탈로나가 있었습니다. 세상이 모두 제 것 같았습니다.”
다섯 번째 문단에 이르자 분위기가 훨씬 미묘해졌다. 누군가가 일어나서 삿대질을 하려다가 할 말이 없었는지 곧바로 앉는 게 보였다. 씨발. 어차피 부끄러운 건 펠로시라고 생각했는데, 읽는 입장에서도 존엄이 깎이는 일이었다.
“홀짝 노름에는 줄이라는 게 있습니다. 홀만 나올 때에는 홀만이 주구장창 나오고 짝이 나올 때에는 짝만 주구장창 나옵니다. 반반의 확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줄을 잘 타야만 돈을 불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확률에 속고 말았습니다. 이번엔 짝이 나오겠지, 이번엔 홀이겠지 하고 중얼거리다가 닷새 만에 그 돈을 모두 잃고 만 것입니다. 원금만 건지고 일어서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을회관은 초상집이 되어 있었다. 란드와르는 심호흡하고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카스바의 지하 투기장에서 전사님을 다시 만난 후로 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전사님께서는 자신한테 모든 돈을 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밥값을 불려나가 7,000탈로나를 만들었습니다. 전사님의 마지막 경기는 배당률이 4.78이었습니다. 저는 전사님을 믿었습니다. 수수료를 제하자 3만 2,000탈로나 만큼의 마력 결정이 제 품에 들어왔습니다······.”
란드와르는 몸을 젖혀 어디선가 날아온 지팡이를 피했다. 지팡이가 귓전을 휙 스치더니 연단 뒤편의 창문을 깨고 나아갔다. 등줄기에 소름이 훅 올라왔다. 이런 곳에서 지팡이에 머리통이 깨져서 죽을 마음은 없었다.
큰할머니가 안락의자에서 일어서 있었다.
“펠로시가 쓴 글이 맞는지, 내가 직접 봐야겠수다. 그 애한테 글자를 가르친 게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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