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포도밭 골목
대부분의 차원문은 사설이고 성능도 좋지 않다. 한 번 가동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계속 켜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너 명이 이용한 다음에는 며칠 동안 쓸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대신 거점도시에는 좌표가 알려진 공영 차원문이 설치되어 있다. 밤낮으로 가동되고,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오갈 수 있으며, 그만큼 비싼 차원문이. 비용만 부담한다면 반나절 만에 도시 각각을 한 번씩 들렀다가 세카두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말루카는 경우가 다르다. 공식적으로 이방인에게 개방된 차원문은 북쪽의 하나. 차원문을 건너오면 군부의 병사들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용건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곧바로 쫓겨나고 만다.
늑대인간들의 검문은 악명이 높지만 이색 관광에 나섰다가 돈만 날리고 돌아오는 여행가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자신만큼은 끔찍한 결말을 피해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게 인간의 본성이니까.
그리고 란드와르는 자신이 그 함정에 빠졌던 게 아닐지 의심하고 있었다.
“이틀짜리 체류증을 끊어 드리겠습니다.”
“너무 짧은 것 같은데요.”
“편지를 전하고 빚을 대신 갚아주는 데에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가요?”
군부 제복을 입은 검문소 직원은 뒤를 흘끔 보았다. 세카두에서 가져온 짐들을 한쪽에 밀어둔 상태였다. 마력 결정이 담긴 상자와 종이 꾸러미. 그리고 배낭.
펠로시의 소개장을 확인한 직원은 편지도 열어보고 상자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는 좋았다. 체류증의 기간에 이틀이 적히기 전까지는. 펠로시를 닦달해서 여러 변명을 준비해 오기야 했지만 먹힐지는 미지수였다.
“종이쪽지에 따로 써 두었지 않습니까. 포도농장 일을 돕기로 되어 있습니다. 일손이 부족할 거라더군요.”
“음, 그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포도밭 골목 쪽 일은 스무날 전에 거의 끝났어요. 지금 가 봤자 잡일만 조금 도운 뒤 빈둥거리다가 올 겁니다. 올해는 수확 철이 조금 일렀거든요. 양조장이라면 모를까.”
란드와르는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동네 농사 스케줄까지 체크하고 다녀야 해?
“일단은 이틀로 생각하시고, 그때 다시 뵙죠. 어차피 여기로 돌아오셔야 할 테니 말입니다. 체류기간을 연장할 일이 생기든, 차원문을 이용해야 하든 간에······.”
물론 교단에서 소개장을 따로 받긴 했다. 말루카 군부는 아즈리온 교단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이다. 역사도 역사거니와, 무예와 살육이라는 신격이 늑대인간의 호전성과 궤를 같이하는 덕이었다. 교단의 공식 서한을 보여준다면 대장군들과도 대면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떠돌이 전사 행세를 하는 것과 아즈리온 교단의 공식 사절이 되는 것은 운신의 폭이 달랐다. 자유라는 면에서는 후자가 훨씬 제한적이다.
게다가 증거를 제대로 모으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신상부터 알려졌다가는 일이 어그러질 위험이 있었다.
란드와르의 머릿속에서 주판이 바쁘게 굴러갔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교단 서한과 성흔을 보여주고 장기 체류증을 받기. 일단은 펠로시의 소개장으로만 버텨 보기.
사실 후자를 고른다고 해서 교단 서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차하면 이틀 뒤에 다시 꺼낼 수 있는 카드니까.
그래도 이틀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열흘로 합시다.”
“명확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이 상황에서 다른 두 분을 들여보내는 것도 편의를 많이 봐 드리고 있는 겁니다.”
“형님 역시, 교단의 사제입니다. 징표도 보여드렸지요. 신원 증명은 충분한 게 아닙니까.”
“개인 자격으로 오셨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특별대우를 원하신다면 교단의 공식 서류를 제출하셔야 합니다.”
볼로디아는 란드와르의 형으로, 테네브로즈는 종자 소년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직원은 란드와르만 들어가면 됐지 다른 둘이 함께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막아섰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수확 철마저 지났다면, 더더욱.
또 다른 소개장을 꺼낼 때였다. 교단에서 받은 게 아니라, 펠로시가 두 번째로 써준 소개장. 아침에 급히 받아낸 것이었지만 효과는 충분할 터였다.
“보시면 상세한 사정을 알게 될 겁니다. 별로 말씀드리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글줄을 읽어 내려가던 직원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혀를 쭉 빼문 시베리안 허스키 같다.
“이게 모두 사실입니까?”
“그쪽 분들께서 듣기에 좋은 소식은 아닐 듯해 숨기고 있었습니다.”
검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충분히 감안하고 있었다. 펠로시의 소개장이 있다면 체류증이야 받겠지만 기간을 보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상용 소개장을 하나 더 쓰라고 시켰다. 볼로디아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소개장의 내용은 절절한 연애담. 늑대인간 펠로시는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 타우베스와 사랑에 빠졌다. 타우베스는 정식 혼인 허락을 얻어내기 위해 말루카로 걸음을 옮긴다. 동생인 란드와르와 함께. 종자도 덤으로 얹어서. 그리고 펠로시는 세카두에서 갓난아기를 기르는 중이다.
“허, 형님분과 따로 이야기를 해야 할 사안인 것 같군요. 형님분의 성함이, 타우베스요. 예. 타우베스 씨를 부를 테니 그쪽 분은 일단 대기실로 가 계십시오.”
누구도 원치 않았던 각본이었지만 란드와르는 자신의 잔머리에 만족했다. 비웃음은 조금 살지 몰라도 의심은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당사자들에게는 세상 무엇보다도 심각하고 남에게는 실로 하찮은 문제가 아닌가.
“하여간 흰둥이들이란··· 보안도 규칙도 질서도 모르는 것들··· 모두가 이런 식으로 이방인이랑 결혼하겠다고 해 봐, 그 이방인이 가족들도 데려오고··· 그랬다가는 진작 요정들한테 능묘가 털렸을 텐데··· 아무리 교단 사제라지만······.”
그는 열린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뻔한 도발에 넘어갈 필요가 없었다.
***
절차를 마치고 검문소를 빠져나오자 군부 기지의 앞마당이었다.
제복을 차려입은 여자 둘이 낯선 인간을 보고는 제자리에 멈췄다. 란드와르는 보란 듯이 허리춤의 검을 고쳐 잡았다. 칼자루에는 술을 달아 교단 징표를 매단 상태였다. 그제야 늑대인간들이 의심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군. 꿈속에 있는 기분이라오.”
잠자코 걷던 볼로디아는 주위에 군부 대원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혼잣말처럼 느껴질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란드와르도 어조를 낮추어 반문했다.
“어떤 게 꿈 같습니까?”
“다시 생각해보니 꿈보다는 연극이 적당한 비유일 것 같군. 카스바의 검투사로 분투하다가 이제는 흰둥이 여인의 정혼자가 되었잖소. 갓난아이도 하나 생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짓말을 늘어놓다 보면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 든다오.”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좋은 겁니다. 과정을 따지는 건 결과가 나빴을 때만으로도 충분하지요.”
란드와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류들을 차례대로 확인했다. 체류증 세 장에는 각각의 이름과 열흘이라는 기간이 적혀 있었다. 안내장도 따로 받았다. 지구별 약도와 유의사항이 정리된 물건이었다.
말루카는 산맥의 왼편에 형성된 도시국가.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 너비가 좁은 대신 기다란 막대기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공용 차원문이 위치한 장소는 도시의 북쪽 끝. 바로 옆에는 군부 기지와 농작지가 있고 시내와는 한참이나 멀다.
“남부로 내려가려면 종단 마력철도를 이용하고, 목적지가 이 인근이라면 마공학 수레를 탈 수 있다는군요. 봅시다, 포도밭 골목이··· 다행히도 북부에 있군요. 걸어갈 거리는 아니지만 아주 멀지도 않습니다.”
“여기부터는 내가 길을 안내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이쪽에 꽤나 오래 있었거든.”
볼로디아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철조망 너머를 넘겨다보았다. 아직 날이 이른 탓에 하늘 위편으로는 산안개가 자욱했다. 해가 덜 떠서 그러는지, 아니면 칙칙한 색 때문인지 키가 낮은 벽돌 건물들은 어둠에 짓눌린 것처럼 보였다.
“볼로디아는 대장군이자 북부 기지의 사령관이었소. 방금 전에 마주친 청년들도 볼로디아의 부하였다오. 어떤 이유로건 사령관을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군부 대원은 없소.”
“우리는 아즈리온의 시종입니다, 타우베스 형님.”
란드와르는 일부러 그녀의 가명을 덧붙였다. 영락한 대장군으로서의 비애는 이해했지만 감상주의가 일처리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저 낯설 뿐이오. 열 해에 가까운 세월을 여기에서 보냈는데, 딱히 바뀐 것도 없어 보이는데 완전히 다른 곳이 된 것 같아. 정말 이상한 일이지 않소. 사실은 환술을 풀고 일이 어떻게 흘러갈까 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오. 흉터가 생기긴 했지만 알아볼 이는 알아보겠지······.”
“현명한 분이라 믿고 있습니다.”
란드와르는 볼로디아가 살필 수 있도록 체류증을 다시 펼쳤다. 가장 아래에는 결정권자의 서명이 미리 적혀 있었다. 북부 기지 사령관, 차이브. 문득 그는 대기실 벽을 뚫고 들어오던 목소리를 상기했다.
전임 사령관의 행적을 묻는 볼로디아.
저의를 의심하는 검문소 직원.
- 지금 오신 용건과는 관련이 없는 일일 텐데요.
- 알고 있소. 다만 예전에, 교단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에 신세를 진 적이 있다오. 북부 기지에 계신다고 해서 얼굴이라도 뵐 수 있을까 했던 건데······.
- 정말로 모르셔서 하는 이야깁니까?
란드와르가 알 수 있는 것은 오가는 말뿐이었다. 표정을, 분위기를 짐작하려 애썼지만 잘 되진 않았다. 볼로디아의 심경은 더더욱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도 몇 가지는 있었다.
허투루 위로를 얹을 사안이 아니라는 점.
도움이 될 방법은 진실을 밝혀내는 것뿐이라는 점.
연민이나 향수는 사치에 불과하다는 점.
“예전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겠소.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말할 일이 없을 거요.”
볼로디아도 그것을 아는 듯했다.
***
몇 차례 거절당한 후 포도밭 골목까지 태워주겠다는 수레 운전사를 만났다. 도시의 침침한 분위기와는 별개로 길은 넓게 트였고 도로 구획 역시 잘 정리되어 있었다. 정오 무렵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고 했다.
포도밭 골목은 이름대로 포도 농원의 흰둥이 경작인들이 모여 사는 곳. 물론 그네들이 땅의 소유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포도를 양조장에 넘겨 돈을 쥘 수도 없다. 원론적으로 말루카의 모든 땅과 생산물은 군부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흰둥이 농부들이 불만을 표하지 않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비록 군부가 생산을 총괄하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수탈이 일어나진 않아서. 배급 체계 역시 잘 작동해서. 모두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와서.
그리고, 도망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라서.
말루카와 다른 거점도시 사이에는 변변한 수송로조차 뚫려 있지 않다. 도시를 떠날 방법은 둘뿐이다. 북부 기지의 차원문을 타거나, 도보로 산맥을 넘거나. 차원문 이용료는 턱없이 비싸며 산맥은 괴수로 들끓는다. 피웅덩이의 기운에 이끌려서, 훨씬 흉폭하고 강해진 괴수들이.
왕이 군부를 대표하는 이유도, 군부가 말루카를 다스리게 된 이유도, 흰둥이들이 하층민으로 간주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정기적으로 토벌전을 벌이지 않으면 괴수들이 도시로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강현은 현대인의 잣대로 늑대인간을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게 요정의 잠입을 막고 피웅덩이를 지킬 최선의 방편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군부의 권위를 존중하는 만큼 흰둥이 개개인도 존중하고 싶었다. 가망 없는 평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이해했다.
란드와르는 외줄 위에 선 자신을 발견했다.
현대인으로서의 감각에 매몰될 수는 없었다.
균형을 잘 잡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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