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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35화 (36/258)

35화. 설득

“그래. 카스바에서 온 이들 중에 내 동족이 하나 더 있다고 들었소만, 한 번 만나보고 싶소.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오. 그러면 마음도 정리될 것 같군.”

“털이 하얀 종자인데 괜찮겠습니까? 말루카를 오랫동안 떠나 있던 사람입니다.”

란드와르로서도 펠로시를 써먹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늑대인간은 이방인에겐 사납더라도 동족에게는 금세 마음을 여는 족속이었으니까. 계급 차이가 역효과를 낼 가능성을 감안했을 뿐이다.

게다가 펠로시는 10년째 고향에 들르지 않은 상황. 최근의 일은 모를 공산이 컸다.

“그런 건 딱히··· 신경 쓰지 않으려 하오. 내가 혈통을 내세울 처지는 아니잖소. 그저 동족을 보고 싶을 뿐이오.”

둘 다 괜찮다면야 나쁠 건 없다. 란드와르는 선뜻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십시오. 곧 데려오겠습니다.”

펠로시는 아직 수도원에 있었다. 벨레다에게, 오늘은 통성명만 하고 내일 데려가라고 말해 두었던 것이다. 반성문을 아직 덜 쓴 탓이었다.

란드와르는 마주치는 사제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아내면서 복도를 지나왔다. 끄트머리의 작은 방이 펠로시가 묵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탁자에 종이뭉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늑대인간이 보였다.

“반성문이 왜 이렇게 길어?”

“이왕 쓰는 김에 편지도 같이 보내려구요. 반성문이야 낭독회···를 하신 댔지만··· 편지는 열어 보시면 안 돼요.”

“너는 내가 우편배달부로 보이냐.”

볼로디아와 펠로시가 같은 늑대인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두침침한 먹구름 밑을 지나오다가 갑자기 뙤약볕을 마주친 기분이다. 눈치도 없이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

“직접 가져다 줄 필요는 없어요. 그거 그냥 캐러웨이 부인한테 맡기면 부인이 알아서 나눠주실 거거든요. 소개장에 쓴 사람 있죠. 착한 분이시니까, 인간이라고 눈앞에서 문 닫히진 않을 거예요!”

란드와르는 혀를 쯧 차고서는 종이더미를 품에 안아들었다. 도박장과 용병 사무소에서 구른 주제에 이렇게까지 철이 없는 건 불가사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그냥 싹 모아서 부인이란 사람한테 가져다주면 돼?”

“아뇨, 포도밭 골목이란 데가 있거든요. 친척들은 다 거기 살아요. 그쪽 마을회관에 들러서 낭독회···를 하신 다음, 캐러웨이 부인한테 가서 며칠 재워 달라고 하면 돼요.”

“알았다. 배달해 줄 테니까 따라와. 대장군이 너 보고 싶다더라.”

“교단 사제분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 늑대인간.”

펠로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루카에 계시는 분요? 그분들이 왜 여기 있어요?”

설명은 길지 않았다. 펠로시는 지하 투기장의 광인이 사실 볼로디아였다는 대목에 이르자 짧은 캥 소리를 뱉었다.

“나 놀리는 거 아니죠?”

“속여서 뭐 하냐. 가서 헛소리 하지 말고, 뭐 물어보면 대답이나 잘 해라. 궁금한 게 있으시댄다.”

“저번에 말씀드렸지만 집 안 간 지 10년째인데요. 요즘 소식이야 대장군님보다도 더 모르죠. 인간 세상에서도 동족들은 일부러 피해 다녔고요. 애초에 바깥 나오는 늑대인간부터가 얼마 없으니까······.”

펠로시가 갑자기 쭈그러들었다. 이런 걸 근엄한 대장군 앞에 데려다놓아도 될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본인이 보고 싶다는데. 란드와르는 펠로시를 일으켜 세운 뒤 다시 복도를 거슬러 올라갔다.

다행히도 요정과 늑대인간을 같은 방에 붙여놓은 것치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볼로디아는 인간 형태로 돌아온 테네브로즈를 말없이 노려보았고, 테네브로즈는 모른 척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이 사람입니다. 대화 나눠 보시죠.”

펠로시의 손등을 확인하자 볼로디아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펠로시는 쭈그러든 상태로 겨우겨우 인사했다.

“어어,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물론 대장군님은 제가 누군지도 모르시겠지만, 무투회를 바로 앞에서 구경한 적이 있거든요······.”

“너무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 일단은 앉게나.”

그제야 테네브로즈의 얼굴에 한숨 돌렸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란드와르는 녀석과 함께 뒤로 물러나 동족상봉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딱히 영양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하나는 6년간의 기억이 망가졌고 다른 하나는 인간 세상에서 근 10년을 머물렀다. 둘이서 서로, 최근 소식을 물어 보았자 소용이 없는 건 당연지사.

“카스바에서 각인사로 일했단 말이지. 그러다가 저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정확히는 세카두에서부터 알긴 했는데, 카스바에서 우리 전사님을 다시 만난 거죠! 대장군님이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거 아녜요. 정 의심스러우시면 용병 사무소에 들러 보셔도 괜찮구요. 거기 사람들도 다 봤거든요. 거기에 알톤이라고 성격 나쁜 거로 유명한 애가 있는데, 걔가요, 글쎄······.”

그래도 설득에는 도움이 되고 있었다. 펠로시는 통성명을 마치자마자 평소의 태도로 돌아왔고, 온갖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늘어놓았다. 란드와르는 쏟아지는 문장들을 한 귀로 흘리며 품에 안은 종이더미를 내려다보았다.

“나으리, 그건 뭡니까?”

테네브로즈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말루카 가면 잘 데가 있어야지. 인간 재워주는 여관도 별로 없고. 그래서 펠로시한테 소개장 써 오라고 했다. 겸사겸사 편지도 배달해 줄 거야.”

“짐덩어리를 왜 데려왔나 했더니, 그래도 쓸모를 잘 찾아내셨습니다.”

상황이 꽤나 공교롭긴 했다. 펠로시는 각인술 능력도 평범한데다가 혈통도 좋지 않은 도박중독자일 뿐. 그 중독자가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인간은 다 써먹을 데가 있어요.”

긴 숙고 끝에, 강현은 오래된 지론을 꺼내들었다. 모든 인간에게는 개 같은 면과 좋은 면이 동시에 있다. 그게 어떤 상황과 맞물려서 어떤 방향으로 터지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씨발, 말이 쉽지.

강현은 여전히 펠로시가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고향 사람들 돈을 다 날리고서도 월급까지 가불했으면 변명할 것도 없는 폐기물이었다. 쓰레기를 사회에 풀어놓을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함구도 시켜야 하니까 데려와서 수도원에 갖다 박았을 뿐이다.

그 쓰레기가 이제는 볼로디아에게 믿음을 주고 있었다.

펠로시는 도박중독자인 동시에 발랄하고 무던한 사람이었다. 전자의 모습에서 후자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걸 기대하고 도와준 것도 아니다. 운이 좋았다. 자신이 판단을 잘 한 게 아니라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들끓는 것을 느꼈다. 오래된 울분과 추억이 뒤섞여 올라왔다. 사업을 하던 시절의 기억들이. 프로젝트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커지자 잠수를 탄 후배가 있었고 술에 취해 바이어에게 욕설을 퍼부은 동업자가 있었다.

둘 다 나쁜 놈도, 무능한 놈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폐급이었더라면 애당초 함께 일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죄과가 있다면 막지 못한 자신에게도 충분히 있었다.

인간이라는 게 어려웠다.

***

볼로디아는 펠로시를 돌려보낸 뒤에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긴 침묵 끝에 돌아온 것은 처음에 비해서는 훨씬 누그러진 어조였다.

“불필요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한 점은 사과하겠소··· 판단은 말루카에 도착한 뒤의 일로 미루도록 하지. 허나 완전히 의심을 거두진 못하는 점은 양해해 주었으면 하오.”

“이해합니다. 다만 이것으로 마음이 정해지셨으면 좋겠군요. 괜찮으시다면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더 시간을 지체한다면 대장군께서도 사정이 곤란하실 겁니다.”

이성을 되찾긴 했지만 아직은 임시방편. 축복의 효과가 유지되는 기간은 고작 네 달이었다. 그 안에 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히 미쳐 버리고 만다. 선조의 능묘 지하층으로 내려가서, 피웅덩이와 심장에 담긴 힘을 볼로디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축복 이야기로군. 어차피 믿건 아니건 간에, 나 역시 말루카로 돌아가야 하오.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말을 마친 볼로디아는 테네브로즈를 힐끔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짐작해보는 투였다. 란드와르가 입을 열었다.

“예, 생각하시는 대로 환술을 쓰려 합니다. 흉터가 새로 생겼을지라도 군부의 일원이라면 대장군님을 알아볼 테니까요. 인간 행세를 하셔야 할 겁니다. 정확히는, 인간 남자겠지요. 목소리야 낮은 편이시니 얼굴만 조금 고치면 되겠습니다.”

“이해하오. 인간 여자는 우리들만큼 덩치가 크지 않으니까.”

테네브로즈가 환술을 시전하는 동안 란드와르는 탁자에 올려둔 종이 더미를 살폈다. 반으로 접힌 소개장과 반성문, 그리고 채권자 명단이 편지봉투 맨 밑에 놓여 있었다. 다른 두 개는 일단 제쳐두고서는 소개장을 펼쳤다.

<캐러웨이 부인과 다른 분들께, 이 소개장을 가져온 붉은머리 인간과 그 일행의 신원을 보증합니다. 저의 은인이니 부족함 없이 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딜 큰할머니의 손녀이자 포도밭 골목 네 번째 벽돌집 막내딸, 펠로시.>

서명과 함께 개 발바닥이 인장처럼 찍혀 있었다. 꽤나 격식을 갖춘 셈이었다. 란드와르는 마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운을 뗐다.

“그 늑대인간이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일단 포도밭에 들러서 친척들을 만난 다음, 캐러웨이 부인을 찾으라더군요.”

“흠.”

굵은 눈썹이 간격을 좁혔다. 이목구비가 조금 달라진 것만으로도 볼로디아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처럼 보였다. 머리색도 란드와르와 같은 적발로 바꾼 상태였다. 늑대인간들 앞에서라면 친족인 것처럼 행세하는 게 좋으니까.

“캐러웨이 부인이라. 극단을 운영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사람이오?”

“아마 그럴 겁니다. 한번 찾아보죠.”

반성문 초고를 검토하면서 캐러웨이 부인이 나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었다. 가게를 차리라며 보석 주머니를 안겨 주었다고, 어린 펠로시의 학비를 대 준 것도 캐러웨이 부인이라고 했다.

란드와르는 반성문을 찾아 펼쳤다.

“아, 예. 앞부분에 있군요.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마 포도밭 골목에 계시진 않겠지만, 캐러웨이 부인께도 인사를 드립니다. 극단은 잘 되어가시나요? 힘들 때마다 부인께서 저를 격려해 주시던 순간을 생각합니다. 기대하신 것만큼 잘 자라지는 못했지만요. 저도 제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구구절절한 인생사가 이어졌다. 일단 각인소에 취직해서 실무를 배워 보려고 했는데, 선배가 데려간 홀짝판에서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는 것. 그렇게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날린 다음에는··· 란드와르는 더 이상 읽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렇다는군요. 극단에 소속된 캐러웨이 부인이 둘이나 있는 게 아니라면, 동일인일 겁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토벌전을 끝내고 축연을 벌일 때마다, 캐러웨이 극단에서 공연을 왔었다오. 덕분에 그쪽 사람들과는 개인적으로도 몇 차례 본 적이 있소. 스카르파는 연극을 아주 좋아했었지. 시들어가는 꽃 같던 아이가 관객석에 앉을 때만은······.”

목소리가 뚝 멎더니 볼로디아의 얼굴에 후회가 스쳤다. 깊은 고통처럼 보이기도 했다. 란드와르는 침묵의 의미를 곱씹었다. 동생을 충분히 돌보지 못한 것을 자책하려는 걸까?

붉은머리 스카르파. 마요르가 왕이 미워한 딸. 어머니와 자매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야심가. 동족을 배신하고 요정과 손을 잡은 혈마법사.

거기에 볼로디아의 책임이 얼마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출발이 내일 아침이라고 했지. 그때 다시 보겠소.”

볼로디아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란드와르는 가볍게 묵례한 뒤 테네브로즈를 이끌고 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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