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설득
“···모른다고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티아를 불러낸 참이었다. 게임을, 시뮬레이터를 설계한 작자들이라면 뒷사정 역시도 알 테니까. 헤이딘의 존재를 뻔히 알면서도 삭제한 것처럼.
“예, 모릅니다. 운명부의 협조를 얻어 알아낼 수는 있지만 한 달쯤은 필요할 겁니다. 오래된 일일수록 거슬러 오르기가 힘들거든요.”
하지만 티아의 대답은 또다시 기대를 벗어났다. 수십 번쯤 곱씹은 푸념이 혀끝에 닿았다. 이 천사란 것들은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저희로서도 모든 사연을 아는 건 아니에요. 기획 단계에서부터, 전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들만 모았죠. 상세히 조사하고 그걸 시뮬레이터에 반영하려면··· 시간이 걸리니까요.”
“시간, 예산, 모두 이해합니다. 그런데 진행에 방해가 안 될 정도로는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헤이딘 같은 문제가 또 생기면 곤란해요.”
“저희도 건의를 해 봤는데······.”
티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더니 문장들이 머릿속에 직통으로 내리꽂혔다.
<···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쪽으로 방향 잡으라고 지시가 내려와서요, 대화나 협의가 필요한 부분은 상당수가 생략이 됐어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앗, 천사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윗대가리의 문제였다.
“이거 신이 아니라 그냥 조폭새끼네.”
반사적으로 내뱉은 강현은 곧바로 자신의 신성모독을 반성했다. 죄송합니다, 아즈리온님, 하긴 신격이 살육과 무예신데 그런 지시쯤은 내릴 수도 있지요. 머리 아픈 건 제가 도맡아 할 테니 싸울 때 조종이나 잘 해 주시길 바랍니다······.
천벌이 내려오지 않은 걸 보면 기도가 하늘에 닿은 모양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안심하고 생각을 멈췄다.
***
“부적은 완성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시제품 몇 개는 만들어 두었어요. 이게 그나마 성능이 좋네요.”
벨레다는 주머니에서 은반지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자세한 명세가 이어졌다.
“스승님의 것과는 달리, 혼을 영구히 보존할 수는 없어요. 스무날 안에 쓰지 못한다면 흩어질 거예요. 그리고 보존 처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반년 뒤에는 평범한 반지로 변합니다. 그 점 감안해요.”
“이 정도면 충분하죠. 어차피 그때쯤이면 부적도 완성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테네브로즈는 약지에 반지를 끼고서는 매료된 듯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벨레다는 묵례하는 테네브로즈에게 마주 인사한 뒤 란드와르를 돌아보았다. 부탁할 게 있는 눈치였다.
“그 늑대인간은 어디 갔나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저택에 있었던 것 같은데.”
“수도원에 집어넣으라고 했다. 볼 거 다 본 상태로 돌아다니면 곤란해.”
란드와르는 수도원에 가둔 사람들의 목록을 마음속에 만들었다. 테빈의 부하. 그리고 펠로시.
지금은 둘뿐이지만 여정이 끝날 때쯤이면 수도원이 아니라 강제 수용소로 변해 있을 듯했다. 죽이긴 미안하지만 풀어놓을 수도 없는 녀석들을 짬처리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다시 데려와야겠는데요. 각인사 조수가 필요하거든요. 할 게 많아요. 장인들이랑 싸우다 보니 일이 늦어졌는데, 일단 이 저택에 공간을 연결할 생각이에요. 카스바에 있는 거처 말예요.”
헤이딘은 슈문의 영토에서만 원래의 몸을 갖출 수 있었다. 반지 상태로도 소통이 된다지만 말만으로는 전달이 어렵기 마련. 일처리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세카두의 저택에도 영토를 연결해야 했다.
아즈리온 교단의 저택에 요정 신의 땅을 들여놓는다니, 역설적인 상황이긴 해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진짜 걱정은 다른 곳에서 왔다.
“그건 알겠는데, 조수로 쓰려면 처음부터 가르쳐야 하는 거 아니야? 평범한 각인이랑은 아예 다르다면서.”
마법을 배울 생각은 여전히 없었지만 와그다스 각인술의 원리는 헤이딘에게서 실컷 들었다. 무언가 물어보려 치면 버튼이라도 누른 듯 설명이 쏟아졌던 것이다. 대부분은 정신을 놓고 한 귀로 흘렸지만 몇몇은 머릿속에 남았다.
기존의 각인술이 명령의 묶음이라면 와그다스의 각인은 사실과 규칙의 총체. 해석에 대해 적절한 논리식을 세우고 질문을 제시하는 것으로 주문이 시행된다. S가 무한영역을 가진 해석에서 참인 일항 주문이라면 S는 또한 유한영역을 가진 다른 모든 해석에 있어 참이다.
씨발, 뭐라는 거야.
그는 스물세 살 먹은 논리학자를 새삼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겉모습이나 성격은 그렇다 쳐도, 똑똑하긴 똑똑한 모양이었다. 펠로시가 벨레다의 절반이라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애가 좀 멍청한데 괜찮겠냐.”
“원리부터 차이가 나죠. 하지만 기본적인 것들은 가르치면 금방 할 거예요. 설계와 검수가 어려울 뿐이지 완성된 구조를 그대로 옮겨 적는 건 아주 기초적인 일이거든요.”
“진짜? 그게 가르친다고 되는 거야?”
란드와르는 합당한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도박에 전 재산을 탕진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수학적으로도 말이 안 됐고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 됐으며 수리논리학적으로는 더더욱 말이 안 됐다.
“어쨌거나 주문을 다루는 일이니까요. 기초적인 개념들은 공유하고 있어요. 뭐, 정 안 되면 저 혼자 하면 그만이구요.”
그는 긴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펠로시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는 믿음이 가질 않았지만, 수도원에 밥벌레를 들여놓기보다는 잡무라도 시키는 게 나을 터였다.
***
“어어··· 각인술도 배우셨을 줄은 몰랐네요!”
“카스바에서는 잠시 놀았을 뿐이에요. 본업은 각인사랍니다.”
벨레다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원래 대부분의 사람에게 친절했지만, 이번의 웃음은 반쯤 사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 조수는 없어도 괜찮았다. 누군가가 허드렛일을 해 주면 도움이 되겠지만 작업속도에는 큰 영향을 끼치진 않았던 것이다.
“물론 내가 쓰는 각인은 펠로시 씨가 지금껏 배운 것과는 많이 달라요. 그래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한 달쯤은 기초를 가르치려 해요. 기본적인 개념은 공유하고 있으니까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헤이딘의 잔소리가 머릿속에 윙윙 울렸다.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네 맘대로 하거라.>
벨레다의 소원은 별 게 아니었다. 제자를 만드는 것. 그래서 스승님이라고 불려 보는 것. 물론 노예 여왕 행세를 하면서 존댓말이야 실컷 들었지만, 거기엔 진심 어린 경의가 없었다. 겁먹은 놈들과 협잡질을 꾸미는 놈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제자를 들일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나이는 스물셋. 어엿한 어른인 데다가 타일라프람의 마법사들보다도 똑똑하다. 비록 화장을 하지 않으면 그렇게 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잘 됐네요! 여기 들어오니까 글쎄, 낮에는 체력 훈련을 하고 밤에는 교리서를 읽으라지 뭐예요. 말도 안 되죠. 내가 뭐, 전사 수련 받고 싶어서 수도원 들어온 것도 아닌데요. 게다가 반성문도 써야 하구요.”
“반성문요?”
“우리 전사님이 쓰라지 뭐예요. 써서 냈더니 여길 고쳐라, 저길 고쳐라 하시는데, 어쩌겠어요. 내가 다 잘못한 건데. 반성문은 다 썼고 지금은 편지 쓰느라 바빠요. 고향 사람들한테 할 말이 많거든요.”
펠로시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처음 봤을 때에는 노예 기술자래서 엄청 무서운 분인 줄 알았는데, 덕분에 살겠어요. 수도원에 있는 사제들은 죄다 눈으로 칼을 갈고 다닌다니까요!”
펠로시는 막힘없이 떠들어댔다. 지하 투기장 특별실에서 처음 봤을 때와도, 세카두에 끌고 왔을 때와도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아마 이게 본모습이겠지. 벨레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나쁘단 소리는 아니다. 낯설 뿐이지.
“그러면 오늘은 인사만 하고, 내일부터 저택에 머무르기로 해요. 가끔 나가서 공방에 들를 일도 있겠지만 보통은 같이 지내게 될 거예요.”
“와아, 좋아요! 여기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죠. 며칠 지내보니까 마당도 넓고 침대도 푹신하던데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어어··· 힘든 건 아니죠?”
겁먹은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비쳤다. 풉 웃은 벨레다는 최대한 침착한 투로 말했다. 제자 앞에서 쾌재를 부르면 안 된다. 근엄하게 행동하자. 어른처럼, 진지하게, 이런 일이 익숙한 것처럼.
“이제부터는 나를 스승님이라 부르고 그에 걸맞은 태도를 갖춰야 할 거예요. 누구에게나 가르치는 각인이 아니니까요.”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네, 스승님!”
펠로시는 선뜻 외쳤고,
“잘 지내 봐요.”
벨레다의 심장은 조금 빠르게 뛰었으며,
<바보천치가 세상에 둘이로구나.>
헤이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일단은 따라가겠소. 고향이 어떻게 되었는지 직접 보려 하오.”
볼로디아의 대답은 예상하고 있었다. 6년 만에 기억을 되찾은 데다 선왕을 죽인 기억마저 남아 있는 상황. 없던 일이다 치고 인간 수도원에 머무를 수는 없다. 홀로 말루카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첫 고비는 넘었다 치고, 그 다음에는 테네브로즈가 요정이라는 걸 납득시켜야 했다. 볼로디아를 말루카에 들여보내려면 환술을 써야 하니까. 어차피 그곳에서도 야스와다 마법을 쓸 일이 조금은 있을 테니까.
언젠가 들킬 정체라면 최대한 빨리 밝히는 게 나았다.
“좋습니다. 다만, 그 전에 양해해 주셔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란드와르는 옆에 선 시종에게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인간 소년의 얼굴이 흩어지더니 요정 특유의 이목구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걸 본 볼로디아의 눈빛에 강렬한 혐오가 스쳤다.
테네브로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일전에도 몇 번 뵈었습니다만, 정식으로 제 소개를 드리고자 합니다. 한때는 어둠달의 테네브로즈라 불렸고 지금은 아즈리온을 섬기는, 요정입니다. 두 종족 사이의 원한이 앞으로의 동행에 걸림돌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는 설명을 마치는 동시에 성흔을 띄워 올렸다. 볼로디아는 은발의 요정을 경멸하듯 내려다보다가 란드와르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당신을 믿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군.”
“의심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 요정은 신의 간택을 받았습니다. 여기 있는 사제들 모두가 증인입니다.”
란드와르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머릿속으로는 미오리타를 불러야 할 가능성을 재는 중이었다.
미오리타는 티아가 붙여준 견습 천사. 갑자기 나타나서 빛을 뿌리고 분위기를 잡는 일쯤은 그럭저럭 해낼 수 있다. 상의도 미리 해 두었다. 이번이 두 번째니까 조금은 능숙해졌겠지.
하지만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로안이야 원래부터 광신도였던 반면 볼로디아는 강제 개종을 당한 이교도.
아즈리온은 성향상 늑대인간들에게도 호감을 사긴 하지만, 이 상황에서라면 천사가 나타나거나 신탁을 받더라도 믿을 확률은 적다. 환각일 가능성을 의심하면 모를까.
정말로, 쉽지 않았다. 여기가 대광장이고 설득해야 할 사람이 일만 명이라면 오히려 일이 편했다. 그 경우에는 천사를 불러내 빛줄기를 쏘는 것만으로도 증명이 끝날 터였다. 일만 명이 서로의 증인이 되어줄 테니까.
하지만 상대가 하나뿐이라면······.
란드와르는 마음이 간사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에 피를 묻히려 치면 대화가 그리웠고, 대화로만 풀 수 있는 문제 앞에서는 칼이 아쉬웠다. 씨발, 싸워서 이기는 것만으로도 만사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덧없는 갈등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이에 볼로디아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이게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데에 걸고 싶소. 당신네들이 진짜 사제일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 말하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드는군. 피웅덩이를 원하는, 한 무리의 요정들이 외딴 곳에 수도원을 지은 거요. 그리고 대장군을 납치해서······.”
볼로디아는 그 지점에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이런 상상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랬더라면 닷새 만에 정체를 밝히진 않았을 테니 말이오. 당신들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었더라면 천천히 신뢰를 쌓았을 거요.”
“생각이 많으시군요.”
대장군의 벌어진 입으로부터 음산한 으르렁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의심을 좋아하지 않소. 안 좋은 습관이지. 도움이 될 때도 많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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