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설득
“···내게도 그 기억이 조금은 남아 있소. 어머니의 심장에 칼을 쑤셔 넣던 순간만은 생생하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소. 왕위가 필요한 건 아니었을 거요. 그건 언젠가 물려받게 될 자리인데다가 엄청난 권위조차 아니오. 그저 산맥 너머의 도시국가 하나를 다스릴 정도의 위세밖에는 없단 말이오······.”
괴수의 영혼은 모계로 유전되었으며 그것은 늑대인간의 힘을 결정했다.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태생적 조건을 극복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자식의 삶은 대개 그 어머니의 평생을 따라갔다. 늑대인간 사회의 폐쇄적인 기류는 여기에서 왔다. 태어난 순간부터 앞으로의 길이 정해지기 때문에, 굳이 사다리를 붙잡으려 애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떤 노력도 무용하므로.
볼로디아 같은 순혈에게도 비슷한 설명을 붙일 수 있었다. 대장군 자리는 맡아 두었으니 제위 역시 손쉽게 물려받았을 터.
“저도 이해합니다.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으셨지요.”
“내가 죄인이라는 걸 부정하진 않겠소. 하지만 어째서······?”
볼로디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란드와르는 진상을 그대로 읊기에 앞서 몇 가지 사실을 복기했다.
그녀의 동생은 스카르파. 보통은 이명인 붉은머리 스카르파로 불린다. 혈마법 때문은 아니다. 태어나길 돌연변이로 태어났을 뿐.
늑대인간의 털은 영혼의 격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척도. 대개는 검은 색일수록 괴수의 힘이 강하고 흴수록 인간에 가깝다. 순혈은 군부에서 출셋길을 밟지만 하얀 늑대인간들은 흰둥이라 불리며 사회의 아래쪽을 담당한다.
그러나 붉은 빛은 그 분류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 괴수 형상으로 변할 수도 없는데다가 인간보다도 연약한 개체.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도 천시를 받을 판에, 왕의 핏줄을 물려받았다면 그 대우가 어땠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선왕께서 대장군님의 동생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는 기억하실 겁니다.”
“어머니는 현명한 분이셨지만, 성에 차지 않는 이들에게는 가혹하셨지. 정말로 심했다오. 내가 따로 돌보긴 했지만 충분했던 것 같진 않소.”
순간 볼로디아의 눈빛이 무언가를 직감한 듯 예리해졌다.
“스카르파가 요정과 손을 잡았습니다. 선왕과 대장군님을 옛 신의 피에 취하게 만든 다음, 그 모습을 다른 대장군들에게 보여준 겁니다. 당신이 마요르가 왕을 죽이는 순간을요.”
문장 몇 개로 요약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믿기 어렵소. 인간들이 아는 일이라면 다른 대장군들 역시 알아야 하오. 비록 왕실의 일은 왕족들끼리 처분하는 것이 법도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배반자가 제위에 오르도록 순순히 내버려둘 이들이 아니오.”
“아직은 아무도 모릅니다. 정보사의 사제들조차 내막을 알지 못해요. 제가 이 말을 한 상대는 볼로디아, 당신뿐입니다. 상세한 연유를 말하기 어려운 점은 양해해 주십시오.”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혼자만이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대개 둘 중 하나지. 사기꾼이거나, 바보거나. 아즈리온의 사제가 그런 망종이라 생각하고 싶진 않소.”
볼로디아의 시선은 란드와르에게 붙박여 있었지만 그 눈은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천 년간, 우리 늑대인간들은 피웅덩이를 충실히 지켜 왔소. 그게 얼마나 무서운 힘인지도 알지. 스카르파는 사사로운 복수심 때문에 일족을 위험에 빠트릴 아이가 아니오. 만약 그랬더라면 요정은 이미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놓았을 거요.”
“아즈리온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사실입니다.”
“당신이 나를 지하 투기장에서 구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인간들이 모시는 신 역시도 존중하오. 허나 왕가를, 내 동생을 그런 식으로 모욕한다면 용납하지 않을 거요.”
곧바로 수긍하리란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동생은 얌전하고 심약한 소녀에 불과했으니까. 게다가 아직은 증거도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신뢰를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함께 말루카로 갑시다. 흰둥이들이 혈마법을 쓰는 것을, 스카르파의 실체를 봅시다. 그리고 대장군님께 남은 피를 씻어냅시다. 판단은 그 뒤에 내리셔도 괜찮습니다.”
***
끈적끈적하고 무거운 단 맛. 건포도와 말린 무화과의 향. 그 뒤를 잇는 화사한 꽃향기. 좋았다. 좋았는데 역시 효과는 없었다. 란드와르는 술잔을 손안에서 돌려 보았다. 투명한 갈색 액체가 휙 기울어지며 유리잔에 사선을 그렸다.
“나으리, 또 무슨 이유로 낮부터 술이십니까? 볼로디아와 이야기가 잘 안 됐습니까?”
“물이야.”
“술인데요.”
“내가 물이라고 하면 물인 거다.”
란드와르는 신의 권능으로 물의 정의를 고친 뒤 거실에 앉은 둘을 바라보았다. 테네브로즈야 미리 저택에 올라가 있었고 벨레다도 왔으므로 필요한 사람은 모두 모였다.
“아무튼, 말루카 가는 문제로 오라고 했다. 최대한 빨리 출발할 거야.”
“저도 가나요? 인간 쪽 장인들과 상의할 게 많아요. 성능을 제대로 내려면 우리쪽 설계를 뜯어고쳐야 할지도 모른다구요. 저나 스승님이나 용 비늘에는 보존 각인을 새겨본 적이 없어서, 일단은 장인들 말을 듣긴 들어야 하는데······.”
벨레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질문이었다.
“너는 여기에 남아서 부적 만들어야지. 어차피 여럿 몰려갈 필요 없어.”
말루카의 피 웅덩이는 핵심 시나리오긴 했지만 많은 동료가 필요하진 않았다. 볼로디아가 보너스 점수를 제대로 먹고 들어갔던 것이다.
최종 전투가 벌어지는 무대는 역대 왕들이 모셔진 <선조의 능묘>. 그곳에서 볼로디아는 역대 늑대인간 왕들의 힘을 이어받아 스카르파에게 맞선다. 게다가 지금은 마력 폭주 디버프도 없는 상황. 전투력 자체는 충분하다.
여럿이 다녀 보았자 눈에 띌 뿐이다.
이방인 신분으로는 최대한 조용히 지내는 편이 낫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제가 나랑 같이 간다. 볼로디아한테는 오늘 중으로 마음 정리하라고 해 뒀고.”
“타향에서 동포를 또 만나겠습니다.”
“어. 그거 중요해.”
게임에서, 시나리오는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플레이어는 혈마법을 수련하는 흰둥이 농부들을 발견하고, 군부에 그 사실을 밀고한다. 증거품을 수집한 군부는 확증을 위해 농부 숙소를 급습한다. 농부들은 대부분 죽고, 살아남은 이들은 끌려가서 고문을······.
이강현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청 인권센터로, 그리고 민주인권 기념관으로 간판을 갈아 끼운 시대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인권이나 자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진 않았을지라도, 분위기라는 게 있다.
직접 고문을 해야 한다니, 씨발,
담수어가 바다에 던져진 기분이다.
이건 테빈에게 정신 지배를 거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 새끼들이야 사람 죽일 작당을 두 번씩이나 한 양아치지만 농부들은 일종의 저항군이다. 너무 가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정의나 도덕 때문은 아니다. 견고한 윤리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심경의 문제일 뿐이다. 변변한 원칙 없이 살아온 사람조차도 마음속 어딘가에는 선이 그어져 있다.
군부에게 증거를 가져다주기 전에, 테네브로즈를 써서 요정 쪽에게 먼저 접근해 보자.
스카르파의 뒤에 있는 요정은 한 명뿐. 추적대는 물론이고 야스와다 교계와도 연관이 없다. 그게 놈에게는 오히려 도움이 됐다. 단신이다 보니 꼬리가 잡힐 일 자체가 적었던 것이다.
“울쿠스라고 알지. 피송곳니의 울쿠스.”
“딤 나겔의 손자 말씀이시군요. 거기 있습니까?”
“스카르파 뒤에 있는 요정이 걔야. 흰둥이들한테 혈마법을 퍼뜨리는 중이고. 일단 얘기를 해 봐야 돼.”
테네브로즈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놈이 흐뭇하게 웃는 건 뭔가가 안 좋아질 신호였다.
“엮인 일 있으면 지금 여기서 싹 다 말해라. 저번처럼 대충 얼버무렸다가 욕먹지 말고.”
헤이딘이랑 만났을 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했다. 뭐, 몇 번 봤다고? 취조를 하면서 몇 번 봤어? 테네브로즈는 믿었지만 녀석이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함정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저보다 한참은 어린 탓에, 말을 섞을 기회는 딱히 없었습니다. 꼬마였을 때 아장거리는 걸 보긴 했지요. 그 나이치고는 영특하긴 했습니다만.”
“나이 차이가 있다 쳐도 아예 모르고 지내진 않았을 텐데.”
“추적대에 들어오려다 실패하고 10년쯤 전에 가출한 녀석이랍니다. 모든 추적자가 실패한 일을 혼자서 해내다니, 아쉬운 인재를 잃었군요.”
란드와르는 보스전 패턴을 상기했다. 울쿠스는 혈기 피조물을 잇달아 소환해내는 네임드. 바단의 귀족인 탓에 야스와다 마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왜 실패했냐. 마법 실력이 없는 건 아니었을 텐데.”
“나트람 영감 때문이랍니다. 딤 나겔이 그 늙은이를 아주 싫어하거든요. 무서워하죠. 손자가 추적대에 들어가려 하니까 막았답니다. 쓸데없이 위험한 임무를 받고 황무지에서 죽을 게 뻔하다면서요.”
울쿠스는 권력에 다가서고 싶어 안달 난 젊은이지만 막상 꿈을 이루진 못했다. 할아버지의 은원 때문에 앞길이 가로막힌 셈이다. 가문의 그늘 밑에서는 출로가 없음을 깨달은 울쿠스는 결국 밖으로 나섰다.
피 웅덩이만 얻는다면 누구도 자신을 무시할 수 없으리라는 야망과 함께.
“그런데 이상한데요. 볼로디아가 제 어머니를 죽이고 사라진 게 몇 해 전이니까, 그때 이미 스카르파를 수중에 넣었단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랬더라면 말루카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스카르파가 정신이 간당간당하긴 해도 그 정도는 계산이 됐겠지. 어차피 아쉬운 건 울쿠스야. 스카르파 입장에서는, 온갖 변명으로 혈마법만 빼먹고 피웅덩이는 안 보여줄 수가 있다고.”
피웅덩이는 선조의 능묘 지하층에 위치해 있었고, 거기까지 들어가려면 왕가의 혈통이 필요했다. 무덤 자체를 박살내지 않는 이상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스카르파와 볼로디아가 유이하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울쿠스도 스카르파 옆에 악착같이 남아 있는 거고. 지금 관둬 봤자 단물만 빼 먹힌 셈인데 끝까진 버텨 봐야지.”
울쿠스에게 남은 선택지는 셋이었다. 야스와다로 돌아가서 초라한 삶에 만족하기. 대장군들 앞에서 진실을 밝히고 스카르파와 함께 자폭하기. 희망이 조금은 남아 있다고 믿기.
울쿠스는 마지막을 골랐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데요. 울쿠스가 여기에서 그토록 오래 지냈다면, 어떻게든 신분을 얻었단 말이 됩니다. 젊은 요정이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늑대인간이 어떤 족속인지는 나으리도 아시지 않습니까.”
말루카를 지탱하는 것은 철저한 혈통제. 어느 집안의 둘째 아들이나 셋째 딸이라는 설명이 아니라면 늑대인간의 신원은 결코 보장되지 못했다. 요정들이 환술을 쓰고 사회에 섞여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가문이 없는 늑대인간은 이방인일 뿐.
인간들처럼 정체불명의 떠돌이 행세를 할 수는 없었다.
“나도 그게 궁금하긴 해. 뭔가 뒷이야기가 있을 거야.”
게임에서는 이 부분이 설명되지 않았다. 플레이 당시에는 작가편의주의나 설정 구멍쯤으로 생각했지만 무언가 뒷사정이 있을 터. 일단은 공백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볼로디아는 피에 취해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 스카르파는 왕좌에 올랐다. 울쿠스는 흰둥이들에게 따로 혈마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6년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웅덩이와 심장은 아직 선조의 능묘에 잠들어 있다······.”
란드와르는 술잔을 빙글 돌리며 알게 된 사실들을 나열했다. 스카르파의 권력욕과 복수심으로 이 모든 문장을 덮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게으른 태도였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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