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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32화 (33/258)

32화. 휴식

너른 잔디밭을 낀 전원주택. 햇살은 샴페인처럼 쏟아지고, 구름은 파도 한 자락인 듯 끄트머리를 접는다. 밧줄 장난감을 물고 오는 사모예드······.

“이거 하려고 부른 거예요? 하실 말씀 있다면서요.”

개가 말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란드와르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조감했다. 정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걸터앉아서 강아지 장난감을 던지는 청년.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불러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그렇지. 그 상태로 들어라.”

잠깐 깨어났을 때로부터 하루가 더 지났다. 저택에 있는 건 정보사 사제 몇과 펠로시뿐이었다.

일단은 늑대인간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몸은 모두 낫긴 했어도 따져볼 게 많았다. 줄곧 저택에만 있었다지만 보고 들은 게 있을 터.

뭔가를 눈치 챘다면 수도원에 가둬야 할 수도 있었다.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냐.”

“우리 전사님이시죠. 칼솜씨도 좋고, 아량도 넓으시고요. 입은 좀 험하시지만.”

“내가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파랭이 사제 하나 칼 맞았다고 수도원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오는 게 일반적인 일 같냐고. 숙소도 기깔난 곳으로 쓰고 있고.”

개가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 사람말로 짖는 개를 상대로 대질신문을 하게 되다니, 실로 초현실적인 장면이다.

“좀 높으신 분··· 같긴 한데요······.”

“얼마나.”

“많이···요?”

란드와르는 상세한 대답을 요구했다. 세카두로 돌아온 뒤 겪은 일들과 거기에서 느낀 점을.

“차원문에서 나오니까 꼬마가 할아버지한테 인사하더라고요. 그리고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일단 나부터 다른 곳에 보내 놓으라고 해서··· 네, 그대로 끌려간 다음 여기 계속 있었죠.”

“그리고.”

“하루 지나니까 사제들이 우리 전사님 데려다 놓고, 그 후로도 사제들 왔다 갔다 하고, 근데 다들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요.”

“다른 둘한테 물어본 건 없어? 같이 온 둘.”

“우리 전사님 일어나시면 직접 말하라던데요. 그래서 뭔가 있구나 했죠!”

비밀 엄수 자체는 잘 된 모양이었다. 비밀의 존재 유무를 알게 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서 그렇지. 아직까지는 떠돌이 용병 신분을 유지해야 했다.

“자, 너는 너무 많은 걸 봤어. 그래서 지금 선택지가 없다.”

“보통 그런 말씀 하실 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하셔야 하는 거 아녜요?”

“아니야. 선택지가 없어. 너 이제 수도원 들어가야 돼.”

물론 선택지가 하나 더 필요하다면 만들어줄 수도 있었다. 란드와르는 오래된 드라마의 대사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수도원 들어갈래, 죽을래?

아니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런 농담은 실현 가능성이 전무할 때에나 농담인 법이다.

“애꿎은 사람 가두는 건 미안한데, 좋게 생각하자. 내가 당분간은 그냥 용병으로 살아야 되거든. 그 동안만 수도원에 들어가 있어. 밥은 먹여 줄 거니까 한적한 곳에서 휴가 보낸다 치고. 길어봤자 3년 안에 끝난다.”

게임 기준으로 그때까지 일이 길어지면 둘 중 하나다. 2차 대전쟁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플레이어가 부활한 옛 신을 패 죽이거나. 어차피 한 명의 평생에서도 엄청나게 긴 시간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은 했으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괜스레 초조해졌다. 란드와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나 아니었으면 너 가불한 월급도 못 갚았잖아. 계속 그러고 살았으면 돈 빌리다가 노예 시장 끌려갔다고. 야, 잠깐만. 갚긴 했냐? 못 믿고 상대편에 건 거 아니지? 제대로 정산하고 왔어? 그 동네에 빚진 거 더 없고?”

“···빚!”

펠로시가 캥 소리와 함께 인간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란드와르는 갑작스러운 반응에 눈을 깜박였다.

“수도원에 있어도 되긴 하는데요, 그건 괜찮은데요, 나 고향에 보낼 거 있거든요. 진짜 중요해요. 그거만 대신 보내 주면 평생 가둬도 돼요.”

“뭐. 뭐 보낼 건데.”

“처음 인간 세상 나올 때 고향 사람들한테 자본금 빌렸거든요. 각인소 세울 돈요. 10년 뒤에 갚기로 했는데··· 어, 우리 전사님한테 걸어서 딴 게 딱 그만큼이라서요, 약간 남을 텐데 그건 전사님 쓰시구요.”

돈 보내주는 거야 어려울 것도 없었다. 어차피 말루카로 가야 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깨달음 하나가 뇌리를 쳤다. 고향 사람들한테 돈을 빌렸다고?

그런 새끼가 카스바에서 월급을 여섯 달씩이나 가불해?

“씨팔, 나 없었으면 그거 다 떼먹었을 거란 소리잖아.”

“본의는 아니지만 그게 그렇게 되네요······.”

“너 진짜 남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평생 수도원에서 살아라.”

“저도 그럴려구요······.”

펠로시가 갑자기 쭈그러들었다. 욕을 퍼부을 뻔 했는데 막상 이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씨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치기로 했다. 정신 못 차리고 재도전을 외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아무튼, 조만간 그쪽 들를 일 있긴 하거든. 가서 전해줄 테니까 채권자 목록이랑 반성문 써 와.”

“반성문···요?”

“그동안 어떻게 살았고, 빌린 돈은 어디에 썼고, 그 이후로 뭐 하다가 이렇게 됐는지 쭉 적어. 제대로 써라. 니한테 돈 빌려준 사람들 싹 모아서 낭독회 할 거니까.”

펠로시가 창백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모예드로 변했다. 애교라도 부리는 것처럼 꼬리가 살랑거렸다. 말 그대로 개수작이었다.

***

개수작을 진압한 뒤 오늘 중으로 반성문 초안을 써 오도록 시켰다. 수지맞는 장사는 아니었지만 덕을 볼 일도 생겼다. 겸사겸사 소개장을 하나 부탁했던 것이다.

늑대인간들의 도시인 말루카는 지극히 폐쇄적인 곳. 동족과 동행하는 게 아니라면 인간들에게는 식당조차도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볼로디아의 정체를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없으니만큼, 소개장이 있다면 초반 진행에는 꽤나 도움이 될 터였다.

···펠로시와 대화를 마치고서는 곧바로 저택 지하에 설치된 차원문을 가동했다. 파르타와 만나야 했다.

“오랜만입니다, 나으리. 건강해 보이셔서 좋은데요.”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요정 놈이 보였다.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마법서를 읽는 중이었다.

“이 새끼는 대장님이 칼 맞고 쓰러졌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

“수도원에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셔도 괜찮습니까?”

“여기엔 너 말고 없지 않냐. 정보사 애들 앞이면 못 이러지.”

파르타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의전은 모두 생략하라고 일러두었다. 특별대우 없이, 그냥 사제 대하듯 하라고.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수발을 들 필요는 없다고. 수도원 오갈 일이 한두 개도 아닌데 번번이 격식을 차리면 귀찮기는 피차일반이다.

“벨레다는 어디서 뭐 하길래 보이지도 않냐.”

“용 비늘 부적 때문에 바쁩니다. 세공사랑 마감 문제로 싸우고 있던데요. 뭐라던가, 보존 각인을 그렇게 새기면 와그다스 회로와 충돌이 일어난다더군요. 저쪽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짜증을 내고 있답니다.”

카스바에 있을 때, 잠깐 세카두에 들러서 부적 제작을 주문했는데 그것도 슬슬 공정이 끝나가는 모양이었다. 벨레다가 그 문제로 바쁘다니 좋았다. 기한 내에 퀄리티만 잘 뽑아낸다면 적절한 곤조는 필요악이다.

“잘 하고 있네. 근데 너는 왜 여기서 이러냐. 책은 집에서 봐도 되잖아.”

“사제들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는 중입니다. 보고서를 쓰는 동안에는 추적대 시절도 떠오르고 즐거웠습니다만, 낯선 얼굴을 볼 때마다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해야 하니 지겹더군요. 옆에서 뭘 했냐며 시비를 거는 녀석들도 있고요.”

그러고 보면 앞장서서 일처리를 한 게 테네브로즈였다. 파르타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필요한 것을 읊은 다음 보고서까지 써냈다고. 그러는 동안 벨레다와 펠로시까지도 완벽하게 챙겼다고. 저택의 사제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귀를 의심했던 기억이 났다.

이 새끼가 그게 되는 놈이었다고?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에 대한 판단을 수정했다. 사회성이 필요할 때에만 생겨났다 사라지는 놈이었다. 그게 엄청난 결점인지 참고 넘길 수준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뒤통수가 얼얼하긴 해도 짜증은 없는 걸 보면 후자인 듯했다.

“사제들한테 말해 둘 테니까 저택 가 있어.”

“예?”

“고생했으니까 올라가서 쉬라고. 정보사 애들한테는 말 걸지 말라고 해둘 테니까.”

“나으리께서 그렇게 공치사를 해 주시니 낯섭니다.”

란드와르는 잠시 자문했다. 내가 이놈을 너무 막 대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가끔 갈구긴 했지만 본디 사람이 개짓을 하면 욕을 먹어야 하는 법이었다. 공으로 과를 덮을 수는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대우 받고 싶으면 앞으로도 잘 해라. 할 수 있잖아.”

***

파르타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볼로디아가 있는 별실로 자리를 옮겼다. 축복이 유지되는 기간은 네 달. 그 중에서 벌써 나흘을 썼으니 하루라도 빨리 출발해야 했다.

드러누워 있는 동안 정보사 사제들이 대강이나마 설득을 마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통성명을 마치고 파르타를 내보내자마자 볼로디아는 기사가 서약하듯이 무릎을 꿇었다.

중후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란드와르의 허리께에서 울렸다.

“그간의 사정은 모두 전해 들었소. 미안하오.”

예상외의 태도였다. 아직까지, 볼로디아는 란드와르를 정보사 요원으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늑대인간을 일으켜 세우고는 시선을 마주쳤다.

짧게 자른 흑발. 늑대를 연상시키는 이목구비. 깊고 검은 눈동자는 얼굴의 반절을 덮은 흉터와 인상적인 대조를 이룬다.

위압적인 체구에도 불구하고 난폭하다는 느낌은 없다. 지하 투기장의 광인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큰 부상은 아니었습니다. 앉아서 이야기하지요.”

말루카의 피 웅덩이는 핵심 시나리오 중 하나. 전개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는 여러 방면으로 고려해 보았다.

게임에서는 진상을 밝혀내는 데에 플레이타임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지만 지금의 란드와르는 결말까지도 모두 아는 상태. 몇몇 구간은 분명 건너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방법이었다. 처음 만난 이방인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순순히 믿어줄 늑대인간은 없다. 증거도 없다. 건너뛸 수 있는 부분과 아닌 부분을 분간하려면, 결국엔 직접 가서 부딪혀 봐야 했다.

“몇 가지를 다시 묻겠습니다. 성함은 볼로디아시지요. 마요르가 왕의 첫째 따님이시고, 말루카의 세 대장군 중 하나입니다. 맞습니까?”

“내 기억이 허락하는 한은, 그렇다오.”

“고향을 떠난 경위는 기억에 없으시고요.”

“검투사가 된 이유를, 그리고 투기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되새기려 하면 모든 게 뒤엉키는 것만 같소. 부분부분 떠오르는 것은 있지만······.”

볼로디아는 정신 오염 때문에 기억이 온전하지 못했다. 시나리오를 꼬이게 만드는 원인이다. 다른 대장군들을 설득할 때에도 이 대목이 문제가 된다. 잃어버린 기억의 내용이.

“무리하실 필요는 없으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사제들에게서 고향 소식을 들으셨을 텐데요.”

순간 볼로디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통스러울 만큼 신중한 태도로 운을 뗐다.

“내가 피에 취해 마요르가 왕을 죽이고 도망쳤다더군. 내 어머니를 말이오. 그리고 동생이 왕위에 올랐다고. 그게 벌써 여섯 해 전의 일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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