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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31화 (32/258)

31화. 휴식

각인소에는 손님이 없었다. 모두가 특별전을 보러 간 탓이었다. 펠로시만이 혼자 매대에 남아 배당 용지를 꾸깃꾸깃 접고 있었다.

란드와르가 정말로 승리를 거둘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그가 지하 투기장에 나타나자마자 온갖 소문을 몰고 다니긴 했지만 상대는 광인이었다. 4년간 왕좌를 지켜 온 전투기계 말이다.

배당률이 관중의 의견을 대언했다. 란드와르에게 걸었을 때 먹는 돈은 원금의 4.78배. 정배당도 아닌데다가 역배당 중에서도 배율이 높은 편이다.

그리고 펠로시는 거기에 전 재산을 걸었다. 7,000탈로나. 하루에 지하 투기장을 휩쓸다가 사라지는 숫자들에 비교하면 초라하지만 그녀에게는 목숨줄이었다.

물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안전한 길을 갈 수도 있었다. 란드와르에게는 그쪽에 걸겠다고 말해 두고, 티켓 판매소에서 마음을 바꿔도 괜찮았다.

하지만 펠로시는 전사를 믿기로 했다.

그건 실력에 대한 믿음만은 아니었다. 란드와르가 아니었더라면 그 돈 역시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빚이 더 늘어났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만약 그가 지더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함성 소리가 보다 거세졌다. 승기가 슬슬 굳어져가는 모양이었다. 누가 이기고 있을지는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신 펠로시는 배당 용지를 꼭 쥐고 선조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

어릴 때에는 약한 혼을 물려줬답시고 원망을 하기도 했는데 살다 보니 기도할 곳이 그밖에는 없게 되었다.

딜 큰할머니, 전사님이 이겨야 돼요. 이기면 수수료 5% 떼고 제가 먹는 돈이 3만 2,000이거든요. 4,000으로는 가불한 월급 갚고, 나머지로는 고향 사람들한테서 빌린 돈 갚고······.

펠로시는 눈물이 주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고향에 못 간지 10년째였다. 나이가 스물일곱이니까 성년 이후로 한 번도 가지 않은 것이다.

볼 낯이 없어서 그랬다. 각인소 차리라면서 빌려준 돈을 모두 도박장에서 탕진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10년 뒤에 돌아와서 두 배로 갚아 주겠다며 큰소리를 떵떵 쳤는데, 결국 남은 건 초라한 도박중독자였다.

“할머니, 저는 안 되는 애 같아요. 홀짝이 뭐라고 전 재산을 다 날렸는데 여기서 또 이러고 있네요. 이거 지면 저 그냥 노예 할래요. 노예시장에서는 저처럼 하얀 늑대인간들도 비싸게 팔린다더라구요.”

순간 고함 소리가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모두가 목청껏 란드와르의 예명을 부르고 있었다. 펠로시는 잠시 굳어 있다가, 벌떡 일어나 거기에 동참했다.

울음이 한순간에 멎더니 그게 모두 기쁨의 눈물로 변했다. 이긴 것이다. 이겼다! 이겼다!

이겼다!

란드와르에 걸어놓은 배당 용지가, 아니, 3만 2,000탈로나가 품에 있었다. 펠로시는 가게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환전소로 내달렸다. 소액 환전 창구들에는 이미 줄이 조금 있었지만 가장 오른쪽 창구에는 한 명도 없었다. 받을 돈이 2만 탈로나 이상일 때에나 쓰는 곳.

직원은 배당 용지의 위조 각인을 확인한 뒤 익숙한 태도로 마력 결정 덩어리를 꺼냈다. 고순도의 마력 결정은 유용성만큼이나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고액거래에도 곧잘 쓰였다.

“지금 연계중인 로야페타 서부 거래소 기준으로 현물 기준 무게당 198.7탈로나고, 근월물 204.9입니다. 여기서 현물로 잘라 가시겠어요, 아니면 선물 4계약으로 전환하시겠어요? 후자의 경우에는 차액 계산해서 돈으로 드립니다.”

숫자들이 펠로시의 눈앞에서 빙빙 돌았다. 로야페타 거래소의 선물시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그녀도 알았다. 최상급 마력 결정 1계약의 증거금은 7,000탈로나. 11배의 지렛대 효과를 일으키는 7,000탈로나.

7,000탈로나어치의 1계약은 7.7만 탈로나의 마력 덩어리를 움직였고, 진짜 가격 변동은 후자에서 왔다. 매수든 매도든 방향만 잘 맞추면 두 배는 쉬웠다. 어쩌면 세 배, 네 배까지도.

펠로시는 심장 깊은 곳에서 치솟는 피를 느꼈다.

펠로시는 타오르는 전두엽을 느꼈다.

펠로시는 지난 여덟 해를 복기했다.

아주 조금 행복하고,

대부분은 비참했고,

때때로 끔찍했던 여덟 해를.

그리고.

“현물로 잘라 주세요. 한 덩어리는 7,000탈로나짜리로, 나머지는 표준 막대 모양으로요.”

그녀는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남기지 않은 채 할 일을 했다. 투기장 경비원과 함께 각인소 사무실에 들러 가불한 월급을 모두 갚았고, 사표까지 낸 다음에는······.

“무슨 일이래요?”

복도 한쪽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펠로시는 모여든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사람 두 명이 들것에 실려 나오고 있었다. 둘 다 아는 얼굴이었다.

광인은 그나마 멀쩡해 보였지만, 란드와르는 곧 죽을 것처럼 창백했다. 피가 들것을 적시며 밑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온갖 외침이 뒤섞여 들려왔다. 치유사가 오고 있다는 것. 물러나라는 것. 시체를 치워야 한다는 것.

멍하니 서 있던 펠로시는 뒤따라오던 벨레다와 시선이 마주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벨레다가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

심상이 파르타의 뇌리에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장소는 어딘가의 사무실. 건장한 여자가 허리에 꽂힌 검을 빼내며 탁자 위로 뛰어오르고, 란드와르가 그것을 막아선다. 주문을 시전하려는 요정 시종. 란드와르의 외침.

“저주 걸지 마라. 아무 마법도 쓰지 마. 내가 처리한다.”

란드와르는 여자의 이마에 성호를 긋는다.

단검이 그의 옆구리를 쑤시고 들어간다.

곧이어 알아야 할 사실들이 머릿속에 주입되었다. 다른 일행이 란드와르를 데리고 세카두로 돌아오리라는 것. 응급처치는 해 놓았지만 완전히 회복하진 못했다는 것. 여자는 옛 신의 피에 오염된 상태라는 것.

“치유 능력이 있는 사제들을 깨워라. 바로 이곳으로 오고 계신다.”

파르타 차테르지. 나이는 예순넷. 열다섯 해 전에 세카두 변경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세카두 변경 수도원은 아즈리온 교단 산하의 수도원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곳.

변경 수도원에 소속된 사제는 아즈리온을 섬기는 이들뿐만이 아니다. 각각의 교단에서 보내온 성직자들이 교단별로 열 명 남짓. 모두가 자신의 신 앞에서 비밀 유지 선서를 마친 사람들이다.

맹약을 거치고서야 받을 수 있는 임무는 정보활동과 공작. 그리고 화신의 보위(保衛).

세카두 변경 수도원의 실체는 정보사.

아즈리온 교단을 주축으로 한, 아홉 교단의 통합 정보기관.

정보사 수장직은 대주교 이상의 영예였으며 아홉 신에게 검증받은 사람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역대 수장 중에서도 정말로 화신을 모신 이들은 손에 꼽았고, 그래서 파르타는 자신이 신화의 한 장 위에 서 있음을 알았다.

당연하게도, 영예에는 그만큼의 책무가 뒤따랐다. 그것은 맹신에 가까운 복종을 포함했다. 천계의 지시를 의심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란드와르가 이전의 화신들과는 어딘가 다를지라도.

***

사업상의 문제는 하인들에게 맡긴 뒤 곧바로 투기장을 떠났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운영측에서도 사건이 더 커지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경기장의 사설 차원문을 타고 세카두 외곽 수도원으로 빠져나왔다. 좌표는 테네브로즈가 알았고 때마침 펠로시에게도 충분한 양의 마력 결정이 있었다.

“의외로 멀쩡할 때는 멀쩡하군요.”

“저 일 잘 합니다. 똑똑하고요.”

“흐음.”

벨레다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테네브로즈를 쳐다보았다. 걱정과는 달리 이 요정은 세카두에서의 일들을 말끔히 처리했다.

파르타에게는 상세한 사정을 설명한 뒤 벨레다의 존재를 납득시켰다. 볼로디아는 수도원에서 보호하게끔 했다. 펠로시도 저택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기타 등등.

지금은 레오나의 사제들이 치유술을 마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예전에, 지금보다도 훨씬 전에, 막 도망 나올 때 스승님한테 당신 이야기를 몇 번 들었어요. 나트람의 오른팔이라고 하셨죠. 제정신이 아니라고도. 야스와다에서는 당신 곁에 아무도 없었다더군요.”

“존경하는 작은어르신께서 노망이 나긴 했어도 기억력 하나는 확실하군요.”

“스승님도 다 듣고 계신다는 걸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하나요?”

“지금까지는 열세 번입니다만, 원하신다면 계속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런 태도는 이제 익숙해진 탓에 짜증조차 나지 않았다. 첫인상에 비하면 사소할 정도였다.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엄청난 악인일 거라고 예상했다. 요정들에게서 모두 미움을 받는다면, 나트람조차 꺼리는 상대라면 심각한 결함이 있으리라고.

“첫 만남에서 신경질을 부린 건 미안해요. 당신도 재수 없는 요정 중 하나인 줄 알았거든요. 비열하고, 오만하고, 그런 것들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왜요, 작은어르신께서 틀린 말을 하진 않았는데요. 나트람에게조차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고 가문에서는 오래전에 쫓겨났지요. 누님들의 얼굴마저도 가물거린답니다···그렇게나 친했는데.”

“당신 같은 요정이 나트람을 따라다닌 이유가 궁금하군요.”

벨레다는 어쨌거나 그가 미치광이라는 데에 한 표를 던졌다.

그건 헤이딘의 귀띔 때문만은 아니고 그녀 자신의 판단이기도 했다. 명예와 권력을 쫓다가 누군가의 번견으로 전락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요정이 그런 걸 원했을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게다가 아즈리온의 종복이 된 지금은······.

“예전에는 가문 어르신들이 모두 저를 아꼈답니다. 제가 출셋길을 밟아서 제사장도 되고 가주 자리까지도 너끈히 물려받을 거라고 믿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믿음이 사라지고 나니 어찌할 방법을 모르겠더군요. 좋거나 싫거나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요.”

“그래서 나트람의 곁에 있었던 건가요? 별불꽃의 일원이라도 되고 싶어서?”

“아뇨···할 일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제가 누구여야 한다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뭐든 상관없었습니다. 어둠달의 차기 가주건, 별불꽃의 충견이든 간에.”

대답을 이룬 것은 덤덤한 문장뿐이었지만, 벨레다는 이야기의 핵심을 움켜쥔 느낌을 받았다.

테네브로즈가 란드와르를 모시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별다른 잡음이 없는 이유가. 아무리 목숨이 아쉬울지라도, 그래서 배신을 택했을지라도 사고방식을 한순간에 바꾸진 못하니까.

정답은 단순했다.

이 요정은 애당초 야심 넘치는 귀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벨레다의 머릿속에서 지난 한 달 반이 재조립되며 새로운 형태를 갖췄다.

란드와르의 정체를 발설할 생각이 없을지라도,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렇게 복잡하고 위험한 사건에 얽혀드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 같지는 않았다. 동료 요정의 존재도 석연찮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렴 괜찮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란드와르는 동료가 될 늑대인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테네브로즈는 오만한 명문가 요정이 아니었다.

둘 다, 마음에 들었다.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스승님이 당신더러 정신이 나갔단 이야기를 종종 하긴 했지만 아주 싫어하진 않더군요. 그 이유가 항상 궁금했는데 조금은 알 것 같네요.”

“우리 작은어르신이 뭐라고 하덥니까?”

“별말씀을 하진 않으셨어요. 고발장이 날아왔을 때 당신이 수사를 맡았다고만 하셨죠. 그러다가 나트람의 설득에 넘어가서 일을 덮었을 거라고.”

테네브로즈는 물끄러미 벨레다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볼품없는 나무 반지가 하얀 손가락에 걸려 있었다. 헤이딘이 거처로 택한 반지가.

그는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낄낄 웃었다.

“잡아 가둘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취조실에 불렀을 뿐입니다. 천 년 전에 벌어진 전쟁 때문에 동족의 마법을 금지하다니, 정말로 우스운 일이지요··· 그럴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잊힌 주문들과 함께라면, 죽은 이마저도 곁에 남길 수 있는데, 도대체 어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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