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휴식
주마등은 예전에 이미 한 번 보았는지도 모른다.
채무증대 및 지급불능 경위서의 첫 문장은 대개 이렇다. 신청인 이강현은 모년 모월 모일 경기도 수원에서 부 이철상과 모 김미연의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인생을, 빚더미에 오른 인생을 A4용지 두 쪽에 모두 담아야 한다.
모니터 속 텅 빈 문서창을 앞에 두고, 소리조차 내지 않고 눈물도 없이 꺽꺽 운다. 그러다가는 퓨즈가 나가듯 모든 감정이 멎고 정신이 명료해진다. 머릿속에 잔류하는 것은 남은 일을 해내야겠다는 의지뿐. 방향도 동력도 있지만 공허한 의지가.
A저축은행에서 마지막으로 빌린 돈의 이율은 은행최고금리에서 2%P가 모자란 21.90%. 사업을 끌고 나가 봐야 나빠질 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그 돈으로 지인들에게서 생긴 빚을 돌려막았다.
빚잔치를 벌일지라도 사람은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축은행에게 삼천은 사소한 돈이지만 한 사람의 평생은 그보다 더 적은 돈으로도 나락을 향할 수 있었다.
이자는 없던 셈 치겠다던 고마운 사람들. 갚을 돈이 조금 남았는데도 말조차 꺼내지 않고 밥을 사주던 친구들. 미안했다. 볼 낯이 없었다. 일이 대강 마무리된 뒤에도, 누가 먼저 부르더라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서른세 살의 이강현은 성격이 개차반이고 인간을 싫어한다네.
그래서 아무도 안 만나고 지낸다네.
서른네 살의 이강현은 빌딩 관리인이 되었다네.
관리실에서 게임만 한다네.
씨발, 이게 내 잘못이야?
잘못이었다.
***
눈을 뜬 이강현은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자신을 발견했다. 무언가 개 같은 과거를 떠올린 것 같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눈을 몇 차례 깜박였다. 초점을 되찾는 동시에 맹렬한 충동이 엄습했다. 니코틴이 시급했다.
그는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여기는 어둠 한복판의 빈 공간. 탁자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깡마른 남자애. 울긋불긋하게 물들인 머리와 짓궂어 보이는 미소. 게임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마공학자와 연금술사와 각인사들의 신, 파울리스였다.
지금은 강현의 상사 중 하나라는 말이 된다.
“담배 좀 피웁시다.”
강현은 사원 복지를 요구했다. 소년이 검지와 엄지를 맞부딪혀 딱 소리를 냈다. 바로 다음 순간, 강현은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두툼한 시가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씨발, 여기도 시가밖에 없나?
“나 아쿠아 3미리 피우는데. 아니, 어쨌건.”
연기를 입에 머금자 필터조차 거치지 않은 니코틴이 둔중하게 뒷목을 쳤다. 기침을 한참이나 내뱉다가 겨우 익숙해졌다. 화신의 몸일 때에는 몰랐는데, 속담배로 피웠더니 내장이 뒤집어졌다.
“신이 불도 붙여주고, 출세했군요. 술은 있습니까?”
“깨어나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라니, 중독이야.”
“술은 좋은 겁니다. 멍청해지거든요. 생각이 필요할 때에는 안 마셔요.”
이름 모를 위스키를 홀짝이는 동안 시답잖은 이야기 몇 줄이 오갔다. 갑자기 불러냈는데 놀라지 않았냐는 것. 일은 편하냐는 것. 그리고 기타 등등.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똑같았다. 그렇다면 그랬고 아니라면 아니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하는 겁니다. 그냥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으니까··· 포기할 만큼 힘들지도 않고, 하는 법도 모두 아니까··· 아예 무급 노동도 아니고, 끝내면 받을 것도 있으니까······.”
“그런 것만으로 버텨내기엔 너무 막중한 임무라고 생각하지 않아? 생각해 보라구, 모든 계약서가 이행되는 건 아니야. 네가 검을 집어던지고 산에 틀어박히면 우리는 다른 적임자를 찾아낼 수밖에 없는걸.”
강현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파울리스의 표정을 살폈다. 빙글거리며 웃는 얼굴에는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길 바랍니까? 권고사직이라도 시키러 왔어요?”
“전혀. 그냥 만나보고 싶었어. 잘 보고 있거든.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보는 것밖엔 없으니까. 알잖아, 사실은 우리가 제일 무능한 거.”
“알죠. 잘 압니다.”
인간의 신들은 일종의 서비스 업자였다. 신도에게 힘과 축복을 공급하고 그 대금으로 신앙심을, 그리고 교단의 용역을 받는다. 세계에 간섭할 방법은 신탁을 내리는 것뿐. 천사 역시 후광을 내리고 먼지를 치우는 걸 제외하면 물리적인 능력은 일절 없다.
유일한 예외는 아즈리온이다.
아즈리온만이 화신을 보낼 수 있으니까.
“다들 그걸 아쉬워해. 네가 쓰러졌을 때, 티아가 널 도울 방법을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면 놀랄걸.”
“의외군요. 자기 할 말만 머리에 쑤셔 넣고 가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란드와르는 담배연기를 우물거리며 마지막 기억을 되짚었다. 내장이 출렁거리는 느낌을 몸으로 익혔고 도파민의 효과도 느꼈다. 뒤처리는 테네브로즈와 벨레다가 알아서 잘 했으리라 믿기로 했다.
“그래서 묻는 건데, 거기에서 옆구리를 내준 이유가 뭐야?”
“생각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직접 듣고 싶어서 그래.”
악취미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멋대로 머릿속을 읽고서는 멋대로 답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는 요점만을 차례대로 나열했다.
“축복이 유지되는 동안 피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네 달이죠. 볼로디아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제압하면 한 달은 회복에 써야 할 겁니다. 그럴 바에는 그냥 내가 칼을 맞고 빨리 끝내는 게 낫겠다는 계산이 섰어요. 마이너스로 떨어진 신앙심은 어지간하면 나흘 내로 충전되니까. 쓰러져 있는 동안에는 다른 둘을 믿기로 했죠.”
숫자는 게임에 구현된 수치들을 인용한 것이지만 큰 차이는 없을 터였다. 게임은 HP시스템이 아니라 신체부위별 부상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었으니까. 치유술과 회복 물약의 효과 역시 부상의 종류와 정도에 따라 상이하다.
그러나 파울리스는 대답이 영 마뜩찮은 듯했다.
“그건 나도 알아. 네 이유가 궁금한 거야. 네가 그런 이유.”
“내 이유요.”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도, 미친 늑대인간에게 칼을 맞고 싶어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이 세계에서 서른네 해를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지. 그런데 너는, 네가 항상 하는 생각대로, 현대인이잖아. 살인은 흉악 범죄고, 내장은 물고기 내장이 아니라면 본 적도 없는, 현대인.”
분명히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별 차이는 없다고 생각했다. 강현은 술병의 모가지를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호박색 액체가 찰랑거리며 작은 파도를 그렸다. 입속에 마저 털어 넣은 다음, 빈 병의 바닥을 바라보다가, 술기운에 의지해 옛 기억을 토해냈다.
“고통이 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인간의 몸이 꽤 튼튼하다는 것도요.”
“별 게 아니라고. 꽤 튼튼하다고.”
파울리스는 흥미롭다는 듯 강현의 대답을 되풀이했다. 강현은 심호흡하고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죽을 뻔한 적이 있어요. 제정신이 아니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피도 잔뜩 났겠죠. 사람들은 그게 엄청난 고통일 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입장에서는 별로 특별한 게 없어요. 감기약을 열흘치 먹고 뻐근한 기분 속에 누워있는 느낌이, 그 느낌만이 든단 말입니다······.”
***
기나긴 꿈을 꾸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은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서로를 의식의 수면 아래로 끌어내렸다.
몽롱한 어둠 속에서 뒤척이던 란드와르는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방에는 햇볕이 넘쳐흘렀다. 창문이 빛을 쏟아내는 방향으로 판단하건대 정오였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것은 세카두 저택의 정원.
고개를 돌리자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익숙한 거실이 보였다. 어찌저찌 해결됐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는 베개에 머리를 얹은 채 따뜻하고 복슬복슬한 털 덩어리를 만지작거렸다.
잠깐만. 이게 뭐지.
이불을 걷어내자 개가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게 보였다. 시선이 마주친 개는 침대 밑으로 휙 뛰어내리더니 거기에서 란드와르를 올려다보았다. 털이 하얗고 북슬북슬한 사모예드. 새까만 눈이 똘망똘망해 보였다.
개가 명령이라도 재촉하는 것처럼 꼬리를 바닥에 탁탁 쳤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건 대체 뭐지. 몸이 무겁고 속이 울렁거리긴 해도 아예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윗몸을 일으켜 침대 등받이에 기댔다.
“손!”
개가 뒷다리로 일어서더니 란드와르의 손에 앞발을 턱 얹었다.
“엎드려!”
개가 넙죽 엎드렸다.
말을 잘 듣는 개였다. 몇 가지 명령을 더 시켜본 그는 사모예드와 베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거실을 향해 베개를 휙 던졌다. 몸이 크게 움직이자 뱃속이 출렁거리며 구역질이 올라왔다. 아픔도 함께.
씨발, 놀아주기도 힘들구나.
베개를 물어온 개는 그걸 침대 위에 올려놓은 뒤 앞발을 모아 앉았다. 이어질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더 시킬 게 뭐가 있을지 고민하다가 툭 질문을 던졌다.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넌 근데 왜 내 방에서 이러고 있냐. 파르타한테 개 달란 말은 안 했는데.”
“여기서 간호나 하고 있으라고 해서요.”
사모예드가 입을 벌리더니 예상치 못한 소리를 뱉었다. 란드와르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잠이 덜 깼나? 꿈인가? 뇌가 계산을 마치기도 전에 혀가 먼저 움직였다.
“씨발, 뭐야. 개가 왜 사람 말을 해.”
“저, 그, 펠로시거든요··· 각인사요······.”
개의 몸이 허물어지더니 인간 여자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랬다. 펠로시도 늑대인간이었다. 다행히도 옷은 입고 있었다. 란드와르는 강아지상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른 애들도 집에 있냐.”
그는 일단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예의를 차려주기에는 정신이 부족했다.
“다들 수도원에 갔고, 여긴 가끔 왔다가 갔다가 해요. 어엄청 바쁜 거 같던데요! 사제들도 드나들고, 레오나 교단 사람들도 오고, 무슨 일인지는 안 물어봐서 모르겠지만. 말을 걸려고 해도 다들 바쁘다면서 무시하고 가더라구요.”
“며칠 지났는데.”
“세카두 온 지 사흘쯤 됐어요. 우리 전사님이랑 아드벡이랑, 그렇게 되고 나서 바로 왔고요, 그 남자애랑, 벨레다랑, 키 큰 검투사랑 해서··· 검투사는 여기 온 후로 한 번도 못 봤는데 아마 수도원에 있을 걸요.”
“카스바에서 개판 난 건 잘 처리했고.”
펠로시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대전쟁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더라구요. 직원에 경비에 구경하려는 사람들까지 얽혀서 완전히 엉망이었어요. 대신 돈은 별로 안 썼대요. 어차피 죄다 봤으니까 입막음할 것도 없고 무조건 아드벡이 잘못한 거라서, 그냥 그렇게 끝났다던데요··· 아드벡이랑 걔 경호원은 거기서 죽었고··· 아, 벨레다가 이 얘기는 했네요.”
“무슨 얘기.”
“이럴 줄 알았으면 경호원한테 돈도 안 줬을 거라던데요. 아드벡을 죽이라고 돈을 실컷 찔러줬더니 돈은 돈대로 먹고 개판을 쳤다고. 아무튼, 내가 아는 건 이게 끝이에요! 슬슬 남자애 올 때도 됐으니까 나머지는 걔한테 물어보셔요.”
어쨌거나 잘 된 모양이었다. 아드벡은 죽었고 볼로디아한테도 축복을 내렸다. 그리고 다함께 세카두로 돌아왔다. 화신 상태를 복구하려면 한나절은 더 누워 있어야겠지만 엄청난 손실은 아니다.
짜증이 한순간에 사라지더니 헛웃음이 나왔다.
노예 검투사한테 칼을 맞고 드러누운 화신이라니,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소문이 좀 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아니, 어쩌면 연막을 치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사무실에 피범벅으로 드러누운 건 화신 란드와르가 아니라 인간 란드와르였으니까. 다들 그걸 봤으니까. 만약 누군가가 카스바의 노예 검투사를 세카두의 파랭이 사제와 연결 짓더라도······.
그쯤에서 생각을 매듭지었다. 남은 질문은 이제 하나였다.
“근데 내 침대에선 뭐 하고 있었냐?”
“내 거보다 푹신하길래 좀 잤죠. 같이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늑대인간은 인간이랑 상식이 다른가?
따지기에는 귀찮았다. 걱정이 사라지자 졸음과 피곤이 동시에 몰려왔다. 란드와르는 베개를 머리맡에 되돌려놓은 뒤 그대로 드러누웠다. 매트리스가 늪지대처럼 몸을 빨아들였다.
“침대에서는 개 모습으로만 있어라. 사람 모습 하면 가만 안 둔다.”
눈을 감은 란드와르는 북슬북슬한 털 덩어리가 이불 속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잠깐 저승 구경을 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이 태산일 테지만, 심지어 컨디션은 아직 바닥이지만··· 한낮에 느긋하게 늘어져 있자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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