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9화 (30/258)

29화. 지하 투기장

“십 분이 지났습니다. 광인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오래 버틴 검투사는 없었지요! 심지어 호각을 유지하고 있군요. 이쯤에서 각각의 배당을 살펴보시겠습니다.”

정중앙의 전광판에 검투사의 예명과 배당률이 떠올랐다. 정배당은 물론 볼로디아 쪽이었지만 관중의 환호는 거셌다. 새로운 챔피언의 등장을 볼 수만 있다면 약간의 손실쯤은 감수하겠다는 투였다.

란드와르는 상대가 다시 덤벼들기 전에 재빨리 봉을 고쳐 쥐었다. 각인은 뇌전을 골랐는데 지금은 냉기가 더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때는 둘 중 어떤 것이 무기를 놓치게 만드는 데에 적합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화신의 기운에 반응해 공격적으로 변하긴 했지만 상태이상은 여전하다. 무기만 놓치게 만들면 그 다음부터는 얌전해질 터. 그 외에는 피해 없이 제압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숨을 고르고는 돌진하는 광인. 갑자기 도약하면서 위를 치는군요! 전사, 예상했다는 것처럼 막아낸 뒤 발로 정강이를 걷어찹니다. 광인이 몇 발짝 물러나지만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진 않습니다.”

유효타를 몇 번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알톤의 어깻죽지를 부러트릴 때보다도 더 강하게 쳤는데도 그랬다. 란드와르는 앞날이 보다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시합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의 볼로디아는 옛 신의 체험판 같은 존재. 위격으로 따지면 아즈리온의 화신보다 다소 모자란 수준이다. 평범한 인간들이야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을지라도 결국에 싸워야 하는 상대는 이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차후의 전개는 차후의 전개. 일단은 볼로디아를 쓰러트리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란드와르는 기계적인 공격을 이어가며 전투를 끝낼 방안을 생각해 보았다.

상대의 힘과 체력은 화신보다는 못하더라도 그에 준한다. 투기장에서 지급하는 무기로는 유효타를 넣기도 어렵다··· 순간 묘안이 떠올랐다. 굳이 아즈리온의 힘에만 기댈 필요가 없었다.

“전사가 큰 동작으로 봉을 휘두르고, 광인은 아래를 파고듭니다! 아예 육탄전을 시도하려는 모양인데요, 전사, 마지막 순간에 무기를 거두고 옆으로 살짝 비킵니다. 그리고 봉이 방향을 꺾으면서··· 아, 기교와 속도가 야성을 제압하는 순간입니다!”

볼로디아는 막대에 가로막힌 황소처럼 쓰러졌다. 거센 함성이 경기장을 울렸다. 관객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섰고 특별실의 손님들마저도 테라스로 나왔다.

무기를 놓치진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끝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자가 땅바닥에 구르는 모습은 모두에게 낯선 것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새로운 챔피언의 등장을 직감했다. 이제 승리의 빛줄기는 란드와르를 비추고 있었다.

볼로디아는 일어서려 했지만 란드와르가 약간 빨랐다. 그는 한쪽 발로 등줄기를 강하게 밟아 누른 다음 봉을 뻗어 손목을 찍었다. 증오에 찬 눈빛이 그를 꿰뚫었다. 발밑으로 심장의 격동이 느껴졌다.

란드와르는 나사를 조이듯 손목을 찍은 봉을 비틀었다. 볼로디아의 팔이 경련하더니 힘이 풀렸다. 손을 벗어난 무기는 조금 굴러가다가 멈췄다. 동시에 저항도 멎었다.

됐다. 눈은 살의로 번들거리지만, 싸우려 하진 않는다.

“좋습니다. 10을 셀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면 광인의 소유권은 벨레다에게로 넘어갑니다. 자, 숫자를 세겠습니다.”

모두가 미칠 듯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란드와르는 고개를 들어 관객석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긴장이 턱 풀리며 잊고 있었던 감각들이 밀려들어왔다. 그는 열기와, 피의 냄새와, 밝은 빛 속에서 그대로 멈춰 있었다.

***

벨레다는 소유권 이전 절차를 처리하기 위해 사무실에 먼저 가 있었다. 선수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자 투기장 직원들이 왔다. 특별전을 마무리 지을 때에는 그 주인과 노예가 서로 동행하는 게 관례라고 했다. 이긴 쪽일지라도.

볼로디아의 존재가 껄끄럽긴 했지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드벡이 돌발행동을 한다면 자신이 막아야 했으니까. 어차피 테네브로즈도 사무실에 있었다.

대기실을 빠져나오자마자 환호성과 함께 갖가지 물건이 란드와르에게로 쏟아졌다. 금화도 있었고 꽃도 있었고 명함도 있었고 토마토도 있었다. 마지막 놈은 아마도 상대에게 걸었다가 대차게 잃은 모양이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했다.

슈퍼스타가 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던 게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변했다. 란드와르가 가장 먼저 맞닥뜨린 것은 아드벡이 시뻘게진 얼굴로 볼로디아의 뺨을 후려갈기는 장면이었다. 투기장 직원들이 문간에서 굳었다.

“어머,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되죠. 이제 그건 내 거예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했어. 가만히만 있던 년이 일어서서 저놈한테 걸어가다니······.”

“질 일은 없겠다면서 낄낄댔던 기억이 나는데, 갑자기 태도가 바뀌는군요.”

벨레다는 거기에서 말을 끊고서는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직원들이 다시 움직였다. 그들은 란드와르를 그녀의 뒤편에 데려다 놓고서는 사무실을 떠났다.

“자, 서류도 준비됐고 노예들까지 모두 왔네요. 악수해요.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지만 절차는 절차니까. 악수한 다음 밖으로 나가면 당신 할 일은 끝난 거예요.”

“할 일이 끝났다고!”

“우리는 계약서를 썼어요. 당신은 되사들이기 조항을 없애자는 데에 동의했죠. 그리고 내 노예가 이겼어요. 끝난 겁니다. 여기서 더 따졌다가는 지하 투기장에 영원히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걸요.”

아드벡은 실의와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란드와르는 남은 사람들을 힐끔 보았다. 테네브로즈는 자신 옆에 정자세로 서 있고, 그 옆에는 또 벨레다의 하인이 하나 있다. 아드벡 쪽의 사람은 경호원 하나와 볼로디아가 끝이다. 마지막으로는 서류를 처리하러 나온 사무원이 둘.

인원만 보면 별다른 일이 없을 듯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는 허리춤에 매어둔 한손검을 움켜쥐었다. 경기장 바깥에서,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젠장, 이미 끝났어. 다시는 못 돌아올 거야. 내 인생이 끝났다고.”

“돈은 충분히 벌어 놓지 않았나요?”

“네년은 몰라. 내가 어떤 기분인지 절대 모를 거야. 내가 정말로 가진 건 저 노예뿐이었는데.”

“모르는 대로 살죠, 뭐. 내가 모든 걸 알 의무는 없으니까요.”

아드벡은 말없이 앓는 소리를 내다가 결심한 듯 목을 꼿꼿이 세웠다.

“좋아, 저걸 데려가. 그 전에 경고를 하나 해 주지. 저년을 데리고 다니려면 알아야 할 게 하나 있거든. 정말로 조심해야 돼.”

“의외로 배려심이 넘치는걸요. 이야기해 봐요.”

“길게 말할 것도 없지. 직접 보라구!”

놈의 경호원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고는 망설임 없이 볼로디아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동시에 일어선 아드벡이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벨레다의 시선이 경호원에게로 향하더니 짜증 섞인 외침이 튀어나왔다.

“···못 나가게 막아!”

세상이 잠깐 멈췄다가 2배속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테네브로즈의 공포가 아드벡에게 직격했다. 벨레다의 하인은 직원들을 복도로 내던진 뒤 문을 걸어 잠갔다. 반지에서 뻗어 나온 보랏빛 마력 줄기가 경호원의 목을 움켜쥐었다.

“기회 봐서 바로 죽이라고 했잖아! 돈은 다 먹어놓고 뒤통수를 쳐? 왜? 아드벡이 돈을 더 줘서 그래? 아니면 그래도 괜찮을 거 같았어? 내가 어린애처럼 보여서?”

새된 목소리가 귓전을 쳤지만 한눈을 팔 여유는 없었다. 볼로디아는 옆구리에서 빼낸 단검을 무기 삼아 란드와르에게로 돌진했다. 그 역시 호신용 한손검을 빼내들었다. 씨발, 그냥 개판이었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리더라니.

매서운 공세가 날아들었다. 몸을 비틀어 피한 란드와르는 공포에 이어 또 다른 주문을 시전하려는 테네브로즈를 발견했다. 아드벡을 제물로 바치려는 게 틀림없었다. 대상은 볼로디아. 혼란이나 공포를 먹여 봐야 역효과일 테고, 공격 계열 주문을 쓴다고 치면······.

“저주 걸지 마라. 아무 마법도 쓰지 마. 내가 처리한다.”

아드벡 따위야 죽든 말든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곧 동료가 될 상대한테, 같이 말루카로 가야 할 사람한테 저주를 걸 수는 없다. 큰 부상을 입혀서도 안 된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최대한 피하고 싶었는데.

“티아!”

란드와르는 이어지는 공격을 쳐내면서 울부짖었다. 기다렸다는 듯 여자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강제 개종을 진행하시면 현재 신앙심이 음수로 떨어집니다. 괜찮으시겠어요?>

하려던 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생각을 사찰당하는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괜히 넣어둔 조항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개 같은 새끼들. 개같이 똑똑한 새끼들. 이성과 분노가 뒤섞여 두개골 속을 굴러다녔다.

약관을 읽는 목소리가 그 사이로 틈입했다.

<위험 사항을 고지합니다. 신앙심이 음수로 내려가면 재충전되기 전까지 다음과 같은 부가 효과들이 제한됩니다. 첫째, 회복력과 신체 유지. 둘째, 고통 완화. 셋째, 전투력 증강······.>

신앙심이 음수가 되면 란드와르는 평범한 인간으로 변했다. 근력도 속도도 체력도 회복력도 평균치인, 그냥 인간.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미쳐 날뛰는 볼로디아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으려면 일단 축복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이교도에게 축복을 내리기 위해서는······.

<강제 개종을 진행합니다. 대상의 이마에 검지를 대고 성호를 그으십시오.>

씨발, 진짜요? 꼭 내가 이마에 손을 대야 하는 겁니까? 원격으로는 안 돼요?

<죄송합니다. 절차입니다.>

그 말과 함께 란드와르의 뇌리에 성호의 형태가 심상으로 떠올랐다. 검지를 내려 긋고, 왼쪽으로 대각선을 그어 올린 뒤, 다시 오른쪽 옆으로. 이런 것까지 알려주다니 눈물 나게 고마웠다. 죽이고 싶을 만큼 고마웠다.

마음의 준비를 할 때였다. 때마침 볼로디아의 검이 아래에서부터, 가슴팍을 노리고 들어왔다. 상대의 손이 밑으로 향하도록 칼날을 쳐 내린 뒤 상체를 바짝 붙였다. 심장이 쑤셔지면 곤란하니까.

일단 칼을 던졌다. 왼팔을 볼로디아의 어깨 너머로 뻗어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성호를 긋는 동안 목이 움직이지 않도록. 오른손을 이마로 옮기는 순간 칼날이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들어와서 내장을 뒤섞기 시작했다.

볼로디아가 그르렁거리는 소리. 가쁜 숨. 열기. 죽을 듯한 열기. 온몸을 짓누르는 피 냄새.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다. 이를 악문 채 성호를 그었다. 그 간단한 도형을 그리는 순간이 천만 년 같았다.

“티아, 빨리 개종시켜요! 빨리!”

그렇게 외치고서는 다시 천만 년이 흘렀다. 이윽고 볼로디아의 눈에서 살기가 가시더니 눈꺼풀이 닫혔다. 그녀의 몸이 스르륵 무너지면서 란드와르를 쓰러트렸다.

<강제 개종과 축복, 완료되었습니다. 신앙심은 3일 16시간 뒤에 재충전되며, 그 즉시 화신 상태가 복구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란드와르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옆구리에 박힌 단검을 빼낼 힘도, 볼로디아를 밀쳐낼 힘도 없었다. 입속이 짜고 따뜻했다. 등허리도 따뜻했다. 모두 피였다. 이쯤 되면 주마등이라도 보일 법한데 그런 건 없이 그냥 아프기만 했다. 아프고 좆같았다.

하지만 강현은 도파민의 힘을 믿었다. 천계에 계신 분들이 자신을 이대로 죽이진 않을 거란 사실도. 이제 뇌에서는 마약성 진통물질이 분비될 것이며, 씨발, 기절했다가 일어나면 몸도 고쳐져 있을 것이다. 어차피 재생의 반지도 끼고 있으니까.

“나으리, 치유사를 불렀습니다. 곧 올 겁니다.”

테네브로즈의 목소리가 생각을 자르고 들어왔다. 머릿골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윙윙거렸다. 강현은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로 녀석을, 그리고 벨레다를 바라보다가 겨우겨우 두 문장을 내뱉었다.

“···뒷처리는 알아서들 해라. 나는 좀 자련다.”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툭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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