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지하 투기장
개 같은 날들이 지나갔다. 싸우고 싸우고 싸웠다. 테네브로즈의 원소학 실력은 여전히 처참했지만 상대의 발을 묶을 정도로는 나아졌다. <어디서 뭐 하다가 왔는지 모를 것들>은 정배당 팀이 되었고 펠로시도 선수금을 거의 갚았다.
좋은 날도 있었다. 시합이 안 잡힌 날에는 특별실에서 뒹굴면서 경기를 관람했다. 숙식은 벨레다의 거처에서 해결했다. 밥은 맛있었으며 침대가 푹신한데다 온수도 잘 나왔다. 강현은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노예 검투사로 살다가 죽으면 안 되나?
“나으리는 참 편해 보이십니다.”
“편하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게 얼마나 편하냐. 밥도 나오고, 잠도 재워주고, 어?”
하지만 만족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시계는 계속 움직였으며 그에게는 갖가지 사명이 있었다. 볼로디아를 구하고, 말루카로 가서 요정의 음모를 파악하고, 중략, 여차저차 세상을 구한다. 계약직이 맡기에는 참으로 거창한 임무였다.
“교단 사제들이 이 말을 들으면 개종을 진지하게 고려하겠는데요. 아즈리온의 화신씩이나 되시는 분이 그러면 안 됩니다.”
“다른 사제 걱정할 시간에 너나 잘 해라.”
“제가 어디 개종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저야 언제나 충성스럽지요.”
능청스레 맞받아친 테네브로즈는 다시 마법서에 코를 박았다. 읽으면서도 계속 뭔가를 시험하는 탓에 방이 완전히 냉골이었다. 란드와르는 벨레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드벡과 만날 자리를 만든답시고 잠시 특별실을 떠난 상태였다.
빨리 이곳을 뜨고 싶었다. 따뜻한 공기가 그리웠다.
“아, 맞다. 아드벡이랑 만난다는 거, 저도 가야 합니까?”
“니가 거길 왜 가냐.”
“저도 선수지 않습니까.”
“넌 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런 소리를 하냐?”
“제가 죄송합니다.”
주인들은 첫 대진이 끝나자마자 벨레다에게 몰려와 노예 거래를 권했다. 모두가 꼬마의 존재 이유를 궁금해 했다. 제대로 된 동료를 붙인다면 승리가 좀 더 손쉬울 거라고도.
그러던 게 경기를 몇 차례 거치자 모두가 제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 투기장 팀은 새로 만든 노예를 영업하려는 수작이란 것이다. 꼬마는 전사의 실력을 돋보이게 만들 용도라고.
그 소문은 곧바로 정설이 되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사를 향한 거래 요청이, 또는 특별전 제안이 쇄도했다. 벨레다는 <광인> 정도가 아니라면 교환할 생각이 없다고 못박아두었다.
광인.
아드벡이 데리고 있는 노예의 예명이었다.
때마침 아드벡도 관심을 보였다.
···손이 완전히 얼어붙은 뒤에야 벨레다의 하인들이 왔다. 이야기가 잘 되어간다고 했다. 아드벡이 선수를 직접 보고 싶어 하니 데려오라는 거였다. 이 짓도 조만간 끝나리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왔군요. 지성과 자아를 온전히 유지하면서도 명령에 복종해요. 거기에서 기쁨을 얻죠. 내가 만든 다른 노예들처럼요. 도망칠 궁리만 하는 녀석들이나, 약을 퍼부어서 멍청하게 만든 것들과는 완전히 달라요. 원한다면 직접 말을 걸어 봐도 좋아요.”
벨레다는 란드와르를 뒤편에 세워놓고서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란드와르는 맞은편의 인간들을 빠르게 훑었다.
아드벡과 노예가 앉은 소파 뒤편으로 경호원이 도열해 서 있었다. 투기장 관리인 역시, 불상사를 방지하고 계약서 작성을 돕기 위해 둘이 나온 상태였다. 아드벡은 살집이 있는 중년인이었는데 란드와르가 신경 쓸 상대는 아니었다.
란드와르는 그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볼로디아는 앉은 채로도 아드벡보다 두 뼘이 더 컸다. 넓은 어깨는 덤이었다. 특별실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던 상대를 눈앞에 두니 느낌이 달랐다. 헝겊 가면의 눈구멍 너머로 검정색 눈이 얼핏 보였다.
평소에는 멍하니 앉아만 있다는 설명대로 초점이 풀려 있었다.
“특별전 계약서에는 보통 되사들이기 조항이 들어가죠. 만약 승부에서 지더라도, 웃돈을 주고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 말예요. 그걸 아예 빼고 싶어요.”
“되사들이기 조항이라! 넣으시는 게 좋을 텐데. 다들 그렇게 말했다가 결국엔 돈을 두 배로 쓰더군. 나는 내 손에 들어온 건 쉽게 되돌려주지 않아.”
“글쎄요, 호객꾼이 몸을 사리면 관객을 끌어 모을 수도 없죠. 내 자신감이라고 생각해 줘요. 어차피 이 물건이 마지막은 아닐 테니까.”
순간 희미한 피 냄새가 콧등을 스치더니 점차 짙어졌다. 이시 첼의 피였다. 란드와르는 미간을 좁혔다. 볼로디아가 전투태세가 되는 것은 무기를 든 상태로 적과 맞설 때뿐.
게임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정상적인 전개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마력 부종이 터지고 축성까지 마친 뒤의 볼로디아니까.
하지만 인간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듣던 대로 야심찬 아가씨군. 하지만 노예를 만드는 것과 싸움 실력을 가늠하는 건 다른 이야기지. 전문분야가 아닌 곳에서는 자중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애지중지하는 선수를 잃을 가능성이 두려운 모양이지요.”
“그 반대지. 어린아이에게서 인형을 빼앗으면 쓰나.”
“어머,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애 취급이라는 걸 모르나요? 키가 작을 뿐이지 인생 경험은 충분히 했어요. 노예 검투사를 거느리는 게 인형놀이와는 다르다는 것도 알죠.”
아드벡이 껄껄 웃었다.
“그래, 꼬마 아가씨 말대로 하지. 대신 엉엉 울진 말라고.”
“가능하다면 내가 그쪽을 상대하고 싶네요.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면 당신이야말로 엉엉 울게 될걸요.”
“상대? 침대에서 말인가? 그러면 내가 실컷 울려 줄 텐데······.”
“됐어요, 입 다물고 서명이나 해요!”
그는 잠시 갈등했다. 벨레다에게 나가자고 할까? 느낌이 좋지 않다고?
하지만 막연한 느낌만으로 잘 되어가는 판을 깰 수는 없었다. 란드와르는 착잡한 심정으로 투기장 직원이 계약서를 고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드벡이 먼저 서명한 뒤 인장을 찍었고 벨레다는 그 다음이었다. 직원이 공증 절차를 마치고 서류를 회수하려는 순간, 그림자가 종이를 침범했다. 란드와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볼로디아가 일어서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드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경호원 역시 제지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는 꼿꼿이 선 채로 란드와르를 노려보다가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은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나는··· 싸워야 해······.”
볼로디아는 란드와르의 앞에 멈췄고, 으르렁거렸다. 동굴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깊고, 거칠고, 음산한 목소리였다.
***
“얘들아, 네 후배가 생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주인님의 뜻이라면 뭐든 좋다고 생각합니다! 충성!”
하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벨레다는 그들 각각의 사연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던 암살자가 둘. 죽이기 전에 뭘 하려던 놈이 하나. 죽이진 않고 뭔가 하려던 놈이 하나.
하지만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흉악범들은 충성스러운 노예로 변해 있었다. 꾸준한 환각 마법과 물약 투여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지금껏 만난 악당이 넷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는 모두 마법에 썼을 뿐이다. 환각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그리고 본업에 충실하려면 언제나 제물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지원자가 부족해서 일에 차질이 생긴 적은 없다. 너무 많아서 문제일 뿐이지.
“아니야. 그냥 죽여야겠어. 기분 나빠.”
“예! 명령만 내려 주시면 바로 칼탕을 쳐 버리겠습니다!”
가장 왼쪽에 선 남자가 외쳤다. 벨레다의 미간이 좁아졌다.
“1호야, 단어 고급스럽게 쓰라고 했지?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제일 오래 있었으면서 계속 그럴래? 너희들이 자꾸 그러니까 저런 것 따위가 날 애 취급하는 거잖아. 꼴에 미친 소리까지 하고. 어른은 고상해야 한다구. 내가 남들 앞에서 얼마나 신경 쓰는데.”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란드와르는 벨레다가 괜히 하인들 탓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어차피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쯤이야 스스로도 알 터였다. 짜증낼 문제인 게 맞기도 하고. 대신 질문을 하나 던졌다.
“죽일 시간이 되냐? 아까 말했잖아. 볼로디아 데려온 다음 바로 세카두 갈 거야. 하루 이틀쯤은 더 써도 되긴 하는데 그 이상은 안 돼.”
벨레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슬며시 웃었다.
“안 그래도 경호원들한테 돈을 좀 꽂아 줬어요. 특별전에서 지면 기회 봐서 바로 쓱싹해 버리라고. 어차피 아드벡은 그 노예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다들 아는 사실인데요, 뭐.”
내용에 비해서는 너무 경쾌한 어조였지만 란드와르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직접 죽이는 것도 아니고 눈앞에서 죽는 것도 아닌데, 삼류 악당 따위야 죽어도 괜찮았다.
양아치의 인권을 챙기기엔 머릿속 공간이 부족했다.
“이거 공증까지 받았으니까 뭐가 어쨌든 서류엔 효력이 있다. 그러면 확실히 넘겨받을 수 있는 거 맞지? 아드벡이 안 주고 버틸 가능성은 없어?”
“특별전이 끝나자마자 직원들의 감독에 따라 소유권을 넘기게 돼요. 암살자든 어깨든 보내서 다시 빼앗아올 수는 있겠지만 지하 투기장 안에서는 지하 투기장의 법을 지켜야 하죠. 말이 무법도시지, 어디에도 규칙이 없으면 사람이 어떻게 살겠어요?”
볼로디아가 돌발행동을 하긴 했지만 특별전 자체는 성립이 됐다. 서명까지 마친 계약서를 기분이 나쁘답시고 물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아드벡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란드와르를 돌려보내자마자 볼로디아도 멀쩡해졌으니까. 질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다며 낄낄댔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그런 식으로 얕봐 준다면야 고마운 일이었다.
“정리해 보자. 일단 볼로디아가 갑자기 그런 건 아즈리온의 화신한테 반응한 거고, 독 문제는 없다.”
“네, 뭐. 여기 있는 노예들이야 주인한테서 해독제 못 받으면 한 달 안에 죽겠지만··· 늑대인간이니까요. 이야기가 다르죠.”
늑대인간의 몸은 괴수 형상과 인간 형상을 오갈 때마다 재구성을 거쳤다. 마력만 충분하다면, 독이나 외상은 자가 치유가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물론 지금은 혈마법 때문에 괴수 형상에 제약이 걸려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볼로디아 받으면 너까지 해서 바로 세카두로 간다. 거기서 축복을 내릴 거야.”
“여기서가 아니라요? 축복은 직접 하셔도 괜찮잖아요.”
“늑대인간들은 인간 신이 아니라 자기네 선조를 모시지 않냐. 이교도한테 축복 내리려면 신전이랑 제단이 있어야 돼. 강제 개종은 신앙심이 좀 드니까 되도록이면 안 하려고.”
수레를 부른답시고 신앙심을 바닥까지 쓴 상황이었다. 수치가 마이너스로 떨어진다고 해서 게임오버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귀찮을 일이 많다. 신앙심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꼭 데라듄처럼 말씀하시네요. 신이 아니라 상인 같아요.”
“대충 알아들으면 돼. 요정 봐라. 내가 뭔 말을 하든 그러려니 하잖아.”
어쨌거나 교단에서 정식으로 축복을 받으면 제정신이 되돌아왔다. 옛 신의 기운과 아즈리온의 축복이 서로 상쇄가 되는 셈이다. 물론 임시방편일 뿐이고, 네 달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축복도 소용이 없다. 정신을 차리는 즉시 말루카로 가야 한다.
시간. 또 시간이다.
시간은 충분히 벌어 두었다. 게임 기준으로는 한 달여 만에 노예시장 시나리오를 끝마치게 되었으니까. 지금까지는 일이 잘 풀렸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벌어둔 시간과는 별개로, 시나리오 각각에도 내부 타이머가 따로 있었다.
네 달.
축복이 유지되는 기간.
늑대인간 시나리오의 내부 타이머.
지금까지 처리한 것은 모두 보조 시나리오였다. 엮인 인물도 적은데다가 사건도 단순했다. 대부분은 전투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핵심 시나리오는 이야기가 달랐다.
통념과 달리 폭력은 능사가 아니다. 삼합회건 마피아건 정계에 뒷돈을 대는 게, 나라들이 미사일을 쏘는 대신 국제기구에서 회의를 나누는 게 그런 이유다. 누군가를 후려패고 죽이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모든 갈등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니까.
그리고 말루카는 사람 문제의 총체였다. 털의 색으로 지위가 갈리는 계급사회. 왕과 군부 조직. 사납고 고집 세고 힘까지 좋은 늑대인간들. 이방인을 믿지 않는 늑대인간들.
그렇다고 해서 정체를 드러낼 수도 없다. 화신이라는 걸 밝히면 늑대인간이야 마음을 열겠지만, 언제나 야스와다 요정들이 문제다.
추적대한테 제대로 걸리면 게임 진행이 좆같아졌다. 정말로.
“잘 될지 모르겠다.”
“뭐가요?”
“그냥. 지금 짜고 있는 계획이. 모든 게.”
벨레다는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다가 풉 웃었다.
“신도 걱정을 하네요. 그런 건 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는데.”
“테네브로즈한테 이야기 못 들었냐? 신이 아니라니까.”
“그래도 천계에서 오신 건 사실이잖아요.”
란드와르는 잠시 생각했다. 씨발, 난 그냥 인간인데. 심지어 전사 란드와르도 아니고 서른네 살 이강현인데. 나도 똑같이 아즈리온한테 기도하는데.
그는 기도를 올릴 요량으로 두 손을 모아 쥐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즈리온이 책임지는 것은 무운이었지 대인관계와 사교술이 아니었다. 믿을 건 자신의 혀와 비즈니스 마인드뿐. 시나리오 전개를 떠올릴 기억력까지.
···머리에 한껏 힘을 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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