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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7화 (28/258)

27화. 지하 투기장

권력은 좋은 것이다. 말 한 마디로 교대 근무표를 바꿀 수 있으니까.

란드와르는 벨레다에게 각인사를 특별실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지하 투기장의 각인소는 긴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저기요, 사장님이 착오를 하신 것 같아요. 제가 선수금을 좀 많이 당기긴 했는데요, 빚은 안 냈거든요······.”

펠로시는 벨레다 앞에 서자마자 횡설수설하며 항변을 늘어놓았다. 비록 월급 다섯 달 어치를 가불받긴 했지만, 일은 제대로 하고 있으며, 각인사는 노예가 되기에는 고급인력이라는 이야기였다.

란드와르는 그간의 사정을 짐작해 보았다. 펠로시가 먼 곳에 취직했다면서 용병 사무소에서 사라진 게 스무 날 전쯤. 그 말할 수 없는 일자리가 바로 카스바의 지하 투기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여기로 와서, 월급을 잔뜩 가불받은 다음······.

씨발, 그거로 도박이나 하다가 다 꼴았겠지. 뻔히 보였다.

“각인이 귀한 재능인 건 사실이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요, 늑대인간은 특히 비싸거든요. 게다가 손님들은 당신처럼 머리가 하얀 개체를 더 좋아한답니다. 괴수의 피가 옅을수록 온순하니까요. 사람 말을 알아듣는 개가 어디 흔한가요?”

“히, 힉··· 사장님이 맘 편하게 있으라고 하셨···는데요······.”

벨레다의 말에 펠로시는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풉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악취미인데, 어쩐지 말리고 싶지가 않았다. 자업자득이었다.

“농담이에요. 이 분이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셔서요. 서로 이야기 나눠 봐요.”

“소속 검투사···님이요?”

기다리는 동안, 테네브로즈를 깨워 환술을 풀어 두었다. 란드와르는 펠로시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헝겊 가면을 벗어던졌다. 얼굴을 알아본 늑대인간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목소리도.

“우와, 우리 전사님이시네! 이거 지금 임무 받아서 오신 거죠?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네. 참, 사무소 사람들은 잘 지내요? 알톤은 그럭저럭 나았구요? 걔가 성격은 좀 꼬였어도 아예 나쁜 놈은 아니거든요.”

“용병들 걱정할 시간에 자기 처지나 되돌아보는 게 좋겠는데요. 뭐 하고 있던 겁니까?”

펠로시는 우물쭈물하더니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게요, 월급을 가불했더니 맨날 점심 밥값만 주는 거예요. 아는 사람도 없고, 말 걸기도 무섭고, 교대하고 나서 길거리에 좌판 깔았더니 사람들이 와서 자릿세를 내라고 그러고, 저번엔 납치당할 뻔도 했고요······.”

“그래서 업무 중에 울었어요?”

“너무 배고파서, 따서 저녁까지 먹으려고 전사님 쪽에 걸었는데, 혼자서 오지 뭐예요. 그 꼬마는 안 보이구요. 졌구나! 라는 생각을 했더니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고요. 근데 세상에, 우리 전사님이셨네요.”

“그쪽 전사님이었던 적 없으니까 친한 척은 자제하시고.”

란드와르는 애완 늑대로 팔려나간 펠로시의 모습을 상상했다. 도박중독자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잘 생각해보니 주인의 금고를 털어서 도박장에 갖다 부을 위험이 있었다. 손을 자르면 발로 화투패를 섞는단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다섯 달 동안 가불 따로 안 하고 버틸 자신 있어요?”

“음, 지금까지 잘 참았으니까요?”

“개소리 할 거면 늑대 모습으로 합시다. 사람이 그러면 이상하잖아.”

“죄송합니다······.”

펠로시가 고개를 뚝 떨어트렸다. 앗, 씨발, 이게 아닌데. 누가 울든 말든 그냥 모른 척 하고 지나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남의 선택이고 남의 인생이었다···하지만 실시간으로 인생 망치는 꼬락서니를 내버려두기에는 입맛이 썼다.

“봐요, 난 여기서 검투사로 두어 달쯤을 보낼 겁니다. 계약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다른 선수들은 아예 보지도 말고, 돈 걸 거면 싹 다 나한테 걸어요. 지금 만난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말고요.”

벨레다가 따로 손을 썼을 뿐이지, 지하 투기장의 등록 절차는 원래 쉽지 않았다. 자유민이 신분을 위장한 게 들켰다가는 그 주인까지도 접근 금지령을 먹었다. 그게 허용된다면 지상과 지하의 구분이 무색해지니까.

신입 검투사의 정체를 떠들어대면서 굴러온 돈복을 제 손으로 내칠 일은 없을 터였다. 어차피 친해진 사람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당연하죠! 우리 전사님이 날 두 번이나 구하시네요.”

포메라니안을 닮은 얼굴이 웃음으로 환해졌다. 도박만 안 했으면 귀엽겠는데, 씨발,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일이 마무리되는 즉시 저 미친것을 교단 수도원에 가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공리주의였다.

“가불한 거 갚으면 여기서 뭐 더 할 생각 하지 말고, 바로 세카두로 가요. 도박 한 번만 더 하면 찾아가서 손가락 다 부러뜨릴 거니까 그렇게 알고.”

“저어엉말 고마워요! 그런데 할 이야기가 있는데······.”

“뭐요.”

“카드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경기에는 손이 없어도 걸 수 있거든요······.”

“그냥 여기서 자를래요?”

란드와르는 호신용 한손검을 움켜쥐었다. 펠로시가 놀란 듯한 캥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됐고, 가서 일이나 해요. 밖에서 아는 척 하면 진짜 노예 만들어서 팔아버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펠로시를 내보냈다. 문이 닫히자마자 테네브로즈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더니 몇 문장을 더했다.

“이야, 정말 아량이 넓으십니다. 아즈리온의 신격이 자비로 바뀌었다고 해도 믿겠는데요.”

란드와르는 입속으로 그 단어를 되풀이했다. 자비? 그런 설명을 자신에게 붙일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벌써 넷이 죽었고 그중 둘은 인신공양 제물로 바쳤다. 이 정도면 공포영화 하나쯤은 뽑을 악역이다.

“불쌍해서 그런 거야. 나 성격 안 좋아.”

“아닙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나으리는 자비롭습니다.”

란드와르는 네가 장담하면 뭐가 되냐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상식적인 현대인인 것만으로 자비롭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좋았다. 그는 아직 서른네 살의 이강현이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

아드벡의 노예는 모든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도전자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주인들은 대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 마련한 선수의 기량을 보여주기 위해서 친선전을 신청했다. 여자에게서 십 분 이상 버티는 이들은 지하 투기장의 사랑을 받았다.

세 도전자가 여기에 선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때 지상 콜로세움의 검투사였으나 방종한 삶의 결과로 여기에 떨어지게 되었다. 첫 대전의 성패에 따라 앞으로의 취급 또한 달라질 것이었다.

사실 그들은 여자를 쓰러트리고 새로운 왕으로 군림할 꿈마저 꾸고 있었다. 자유민 검투사는 대개 지하 투기장을 멸시했다. 만약 노예에게 충분한 능력이 있었더라면 진작 신분을 되찾고 지상으로 올라왔을 테니까.

게다가 그들은 셋이었고 여자는 하나였다.

“경기, 시작!”

검과 방패를 건네받자마자 여자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녀는 대로를 행진하는 개선장군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투기장의 정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두 명이 양옆에서,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녀는 작은 방패로 옆구리를 향한 공격을 막아낸 뒤 몸을 민첩하게 돌렸다. 회전하는 힘이 봉에 속도를 실어주었다.

목을 얻어맞은 상대는 캑캑거리며 쓰러졌다. 여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땅을 박차며 그 너머의, 세 번째 남자에게로 돌진했다. 동작은 거칠고 기교가 없었으나 그 순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사제야.”

란드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테네브로즈를 불렀다. 이 시합이 바로 관람용 특별실을 빌린 목적이었다. 때마침 늑대인간도 경기 일정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예?”

“잘 맡아 봐라. 피 냄새가 나지.”

테네브로즈는 깊게 심호흡했다. 고개가 잠시 갸웃거리더니 미간이 좁아졌다.

“예, 그렇군요. 납니다. 뭔가 불길한데요.”

게임에서는 설명으로만 접했던 순간을 이렇게 겪으니 기분이 묘했다. 여자가 내뿜는 피 냄새는 옛 신의 피가 끓어오를 때 발생하는 이상 현상이었고, 성흔을 받은 사제가 아니라면 느끼지 못했다.

“바단의 신이 누구냐.”

“이시 첼이지요. 모든 괴수의 어머니고, 혈마법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테네브로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 정도면 상황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한 설명이었다.

“너도 대강 알겠지. 그렇게 된 거다.”

이시 첼이 대전쟁 중반에 죽자 바단의 혈마법은 반쪽이 되고 말았다. 괴수의 영혼을 다스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괴수 군단은 흩어졌고 늑대인간에게 걸린 속박 역시 힘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심장과 피웅덩이에는 여전히, 신으로서의 권능이 깃들어 있었다. 늑대인간 무리는 그 웅덩이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혈마법을 배운 요정이 이시 첼의 심장을 되찾는 순간 자유 역시 물거품이 될 것이므로.

늑대인간 도시가 이방인을 적대하는 이유였다. 정체를 감춘 요정과 피에 이끌린 괴수들이 언제나 그들 곁을 맴돌았다.

“···야스와다의 신관 대부분이, 바단의 혈마법을 주력으로 삼는 것은 사실입니다. 명문가의 수는 요정 전체에 비하면 아주 적으니까요. 하지만 교단이 저지른 일은 아닙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이시 첼을 되살리는 것보다는 우리네 신을 깨우는 게 더 쉬운 목표였단 말입니다.”

사실이었다. 피웅덩이를 점령한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었다. 피가 담긴 병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걸 매개로 주문을 시전해야만 전성기 시절의 성능이 나왔으니까.

당연하게도 피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거니와 분배 때문에 잡음이 생길 게 뻔했다.

여기에 더해 심장의 소유권까지 계산에 넣으면 일이 복잡해진다. 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문제였다.

야스와다 전체가 매달리기에는 효율이 떨어지는 과업이란 뜻이었다.

“그거 네가 저번에도 한 이야기잖아. 뭔가를 숨겼거나 거짓말을 했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네 말대로, 요정이란 종족이 단결을 잘 하는 편은 아니지 않냐.”

“예, 바단에서 온 귀족놈들은 항상 피웅덩이를, 웅덩이 안의 심장을 탐냈죠. 교단이랑은 별개로 말입니다. 막상 그 가문들끼리 소유권을 두고 다투느라 항상 일이 틀어졌습니다만, 행동력 있는 집안이 하나 나온 모양입니다.”

“행동력도 있고, 유능하지. 대장군을 저렇게 만들었으니까.”

여자의 이름은 볼로디아. 한때는 늑대인간의 대장군이었지만 이시 첼의 잔재 때문에 미쳐 버렸다. 이성을 잃은 채 산맥의 괴수들을 도륙하면서 살았고, 어느 날 용병단에게 발견되었다. 그리고 카스바 시장으로 팔려나가서 노예 검투사가 되었다.

볼로디아가 정신을 되찾으면 공격대에는 든든한 방어 겸 공격 전담이 하나 생겼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말루카로 가야 했다.

말루카는 늑대인간의 도시이자 핵심 시나리오의 무대 중 하나. 그곳에서 플레이어는 피웅덩이에 얽힌 음모를 추적하게 된다.

“여기 정리하면 바로 말루카로 간다. 전직 대장군 명함이 일처리에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저 늑대인간 자체도······.”

말끝을 흐린 란드와르는 경기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 명은 초장부터 나자빠졌지만 덕분에 다른 둘은 최대한의 기량으로 승부에 임하게 되었다. 그들은 지상에서 꽤나 구른 선수들이었고, 어떤 식으로 협공을 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끝없는 이지선다가 볼로디아를 방해했다.

우상박에서 날아드는 검을 막아내는 순간 둔기가 오른다리를 강타했다. 그러나 볼로디아의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라면 몸으로 받아내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둔기를 든 상대를 걷어찬 후 크게 회전하며 봉으로 검사의 가슴팍을 찍어 올렸다. 그녀는 검사가 균형을 잃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옆구리에 일격을 가했다. 도전자들은 사납고 용맹했지만 볼로디아는 기계와 같았다.

두려움도, 고통도, 망설임도 없는 기계.

“허.”

란드와르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정신 나간 여자였다.

정신 나가게 멋진 여자였다.

방어 전담을 맡기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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