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지하 투기장
란드와르는 지하 투기장의 각종 전법을 복기했다.
원래 여기는 지상 투기장 시나리오를 완주하면 특전 개념으로 열리는 장소. 특별한 보상은 없었지만 심심풀이로 하기에는 좋았다. 가끔 들러서 깔짝거린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지금 상대가 전사랑 마법사잖아. 그러면 전사가 시작하자마자 너한테 올 거야. 마법사는 뒤에서 거리 유지하고.”
“나으리께 덤빌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냥 패면 되니까 그 가능성은 일단 제외하자. 무조건 니가 물리는 방향으로 생각을 해야 돼.”
배수진을 친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원래 실력 덕분인지 테네브로즈의 원소학 수준은 며칠 사이에 유의미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정공법으로 유효타를 넣기에는 역부족. 녀석이 도망치면서 주의를 끄는 동안 자신이 둘을 처리해야 했다.
“계산을 해 보자. 마법진도, 제물도 없을 때 기준으로 해서 혼란이랑 공포 지속시간이 각각 8초 전후. 중간에 고통을 느끼면 풀릴 수도 있고.”
“마음이 약한 사람이면 지속시간이 끝난 뒤에도 벌벌 떱니다만, 여기에서 그런 일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군요.”
“이게 이렇게 되네. 저쪽 전사가 우리 마법사 물고, 나는 저쪽 마법사 물고. 맞교환해서 마법사 먼저 잡은 쪽이 이기는 거로. 그동안 너는 도망 다니면서 버티고.”
물론 마법사를 멧돼지처럼 밀어 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지하 투기장의 역학은 보다 복잡했고, 지형 역시도 계산에 넣어야 했다.
***
“다음 경기 선수를 안내하겠습니다. 누이는 검술의 천재요, 그 오라버니는 불을 다스린다! 쌍둥이 오누이 도완과 듀베사! 그 상대는··· 뭐야, 이렇게만 적어 놨어? <어디서 뭐 하다가 왔는지 모를 것들>? 오늘 대본 쓴 놈 누구야?”
어디서 뭐 하다가 왔는지 모를 것들.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실로 기막힌 팀명이다. 눈앞의 광경 역시도. 란드와르는 허공에 둥실 떠오른 환영 모래시계를 감상했다.
위쪽의 모래가 모두 사라지면 문이 열린다.
“도망만 다녀라. 뼈 부러지면 귀찮으니까.”
“열흘 배운 마법으로 맞설 생각은 없습니다. 죽을 일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군요.”
노예 검투사의 주인들은 지상 투기장의 후원자 이상으로 선수를 사랑했다. 노예는 그의 소유물이었으며 부상은 재산적 손실을 의미했다.
따라서 지하에서는 대개 날이 없는 검이나 둔기를 썼다. 부러진 뼈까지는 치유술로 회복할 수 있다지만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건 이야기가 달랐던 것이다.
란드와르는 금속제 봉을 움켜쥐었다. 뇌전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각인의 효과는 타격 시 일정 확률로 행동 불능 유발. 지속시간은 짧지만 주문을 차단하기에는 충분했다.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마쳤다.
이제는 기도를 드릴 때였다.
하늘에 계신 아즈리온이시여, 들리십니까? 일부러 못 하는 게 그냥 잘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너무 잘 싸우시면 안 됩니다. 상태이상에도 걸리고 아픈 척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아프면 곤란하고요······.
“경기, 시작!”
사회자의 외침과 동시에 도르래가 움직이며 문이 위로 올라갔다. 란드와르는 기도를 멈추고 입구 너머를 내다보았다. 관객석이 원형 경기장을 둘러쌌고, 돈 많은 이들은 그 위의 특별실에서 경기장을 내려다본다.
경기장의 모래 바닥 위에 솟아난 것은 세 개의 기둥. 입구와 너비가 엇비슷한 사각 기둥은 정삼각형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란드와르 쪽의 두 개가 밑변을 이루고 도완과 듀베사 쪽의 하나가 꼭짓점이 된다.
“오른쪽으로 가자.”
투기장에는 매 경기마다 서로 다른 마법적 구조물이 배치되었다. 시야를 가로막기 위한 용도였다. 개활지에서는 기동성 좋은 원거리 공격수가 너무 유리하니까.
란드와르는 오른쪽 기둥 뒤편에 몸을 숨긴 뒤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상대편 역시 자기네 기둥을 본진으로 삼고 있었다. 저쪽에서 먼저 들어와야 되는데, 올 기미가 도통 없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흐르자 관객들의 야유가 거세졌다.
“···일단은 내가 먼저 들어간다.”
마법사가 낀 조합에서, 먼저 모습을 내미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원거리에서 상태이상을 얻어맞을 게 뻔한 탓. 중앙으로 나서는 즉시 곧바로 메즈가 들어올 터였다.
“도완의 화염 강타가 전사에게 적중합니다! 한 번 맞으면 얼이 빠지죠. 여기에 잘 대처할지 한번 볼까요.”
예상대로 아찔한 열기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눈을 질끈 감은 란드와르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틀었다. 뜨거운 기운이 쌩하니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씨발, 수많은 상태이상 중에서 시야 방해쯤은 별것도 아니다. 일단 여기까진 괜찮았다.
“전사, 후속타를 피합니다. 이 와중 꼬마가 반대편으로 돌아 도완에게 접근하고, 듀베사가 그쪽으로 돌진하며 막아서는군요. 꼬마가 방향을 바꿔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잠깐만요. 이 꼬마, 선수 정보에 마법사라고 적혀 있는데, 사실인가요? 마법사의 실험체 정도는 될 수 있겠습니다만······.”
관객들이 왁자지껄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주문이 더 날아오지 않는 걸 보면 테네브로즈도 할 일은 한 모양이었다.
일단 녀석이 마법사에게 혼란을 건 다음 전사를 끌고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공포 쿨다운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둘은 쿨다운을 공유하니까.
“아, 마법사가 맞군요! 물 구체를 만드는 건 냉기 주문의 첫걸음이죠. 안타깝게도 얼리는 방법까지는 배우지 못한 모양입니다.”
때마침 시야 상태이상이 풀렸다. 도완 역시 혼란에서 막 빠져나온 채로 주문 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서리 뒤편에 숨어서 상체만을 내민 모습이다. 좋다, 테네브로즈도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자. 란드와르는 기둥을 향해 뛰어들었다.
“꼬마, 물 구체를 얼굴에 던지면서 저항해 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듀베사가 힘차게 검을 휘두릅니다. 이야, 이거 진짜 검이면 팔이 잘렸겠어요. 잠깐만요, 여기서 도완을 한 번 봅시다. 전사가 도완을 쫓고 있군요.”
기둥은 주문만 가로막는 게 아니다. 모서리 언저리에서는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폭 자체가 좁아진다. 원거리 공격수가 기둥을 빨면 전사 입장에서도 귀찮단 소리다.
준비해둔 화염구를 내지른 도완은 서둘러 반대편 면으로 돌아가더니 바닥에 지팡이로 약식 마법진을 그렸다. 란드와르가 넘어오자마자 바로 곁에서 불기둥이 격발했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딛었다가는 다리가 익을 뻔했다.
기본 회복력도 좋고 재생의 반지도 끼고 있다지만 그건 지속성 피해에나 적용되는 이야기. 이런 식으로 큰 부상을 입으면 꼼짝없이 치유사 신세를 져야 했다. 꾸물거리는 게 이상해서 슬쩍 옆으로 비킨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불기둥을 피했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다. 도완을 근접 거리 안에 넣어야 한다. 란드와르는 잠시 봉을 쑤셔 넣을 각도를 계산하다가 방향을 바꿔 뒤로 돌아섰다. 이렇게 주문을 써댔으면 마력이 떨어질 만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신을 집중하는 도완의 등이 보였다.
그래, 이거지.
“도완이 전사에게 거리를 내줍니다! 마법사에게는 끝장이죠. 화염 강타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게 컸어요. 게다가 원래는 듀베사가 도완을 지키면서 싸우는데, 꼬마에게 한눈을 판 것도 문제였죠. 우리 꼬마가 의외로 오래 버티는군요.”
···어떤 주문은 잇달아 쓸 수 있었지만 어떤 주문은 다시 시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마력만 잃을 뿐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테네브로즈는 혼란 주문에 남은 시간을 따져 보았다. 애매했다.
통증은 참을 수 있었다. 더한 것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요정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은······.
그는 가까스로 충동을 억눌렀다. 혼란과 공포를 제외한 주문은 모두 마력을 외부로 방출했다. 보랏빛 마력이 드러나는 순간 모두가 단번에 선수의 정체를 알아볼 것이다.
붙잡혔다가 도망치기를 반복하던 참이었다. 이번에도 또다시, 전사의 손이 가까워졌다. 그는 상대의 옆구리로 몸을 빼낸 뒤 혼란과 원소학 주문을 동시에 시전했다.
지속시간은 아주 짧겠지만 이 방법밖엔 없었다. 전사의 손 위에서 물 구체를 터뜨린 다음, 혼란을 걸고, 검을 쳐내는 것이다.
“듀베사가 갑자기 검을 놓칩니다! 설마 꼬마에게 손을 맞아서 그런 걸까요? 그럴 리가요. 어쨌거나 듀베사,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순식간에 도완을 제압한 전사가 꼬마에게로 합류합니다. 2대 1이군요.”
***
“사람들이 너는 왜 나왔냐더라.”
“저도 노력했습니다. 나으리께서 원소학 열흘 배우면 저보다 잘 하실 것 같습니까?”
“그래서 나는 마법 안 배우잖아.”
란드와르는 즐거운 투로 휘파람을 불었다. 테네브로즈가 다치지 않았으니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의외로 강골인 듯 뼈는 끄떡없다고 했다. 치유사를 부르고 한 시간쯤이 지나자마자 멀쩡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아직은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그래도 끔찍하게 못 한 건 사실이에요. 다음 경기가 나흘 뒤라던데, 연습할 시간이 충분했으면 좋겠습니다. 학파마다 마력을 운용하는 방식이 다르단 말입니다.”
“끔찍한 거 알아서 다행이네. 그동안 열심히 해라.”
테네브로즈는 나흘, 나흘 하고 중얼거리다가 픽 눈을 감았다. 다시 보자 자고 있었다. 란드와르는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는 벨레다가 빌린 관람용 특별실. 경기가 시작되기까지는 한참이 남았다.
그는 벨레다에게 손짓했다.
“밑에 같이 가자. 각인소에서 뭐 되는지 좀 보게.”
지하 투기장에서는 날이 없는 무기를 쓰는 대신 각인을 선택할 수 있었다. 봉의 각인도 투기장 각인소에서 받은 것이었다. 그때는 마법사를 카운터 친다고 다른 건 보지도 않고 뇌전을 골랐는데, 선택지를 한 번쯤 둘러보고 싶었다.
“바깥에서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곤란해요.”
“내가 설마 너보다 사리분별이 안 되겠냐.”
란드와르는 벨레다에게 핀잔을 주고서는 선반 위에 올려둔 헝겊 가면을 뒤집어썼다. 노예의 표식이었다. 어쨌거나 지하 투기장에 검투사로 나서려면 벨레다의 노예 행세를 해야 했던 것이다.
기분이 묘했다. 개 같을 정도까진 아닌데 좋진 않았다.
“잘 해라. 내가 이거 썼다고 지랄하면 니 스승님 얼굴에 먹칠하는 거다.”
“물론 그래야죠. 잔소리를 사서 듣는 취미는 없는걸요.”
“취미 있는 거 같던데. 아니야?”
걱정이 무색하게도 특별실을 나서자마자 벨레다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초등학생이 단번에 어딘가의 사장님이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온갖 사람들이 벨레다에게 말을 걸어왔다. 대부분은 서로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런 노예를 어디에서 구했냐며 묻는 이도 있었고 갑자기 지하 투기장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궁금해 하는 이도 있었다.
그녀는 모든 질문을 매끄럽게 받아냈지만 그들이 자신을 뒤따라오도록 허락하진 않았다. 란드와르는 헝겊 가면을 쓴 것에 안도했다. 맨얼굴이었더라면 표정을 관리할 수 없을 듯했다.
평소 태도와 비즈니스 상황에서의 언행이 다른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정도로 차이 나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헤이딘이 속이 터져 죽으려는 게 이해가 갔다. 이거 무슨 병 아니야?
그는 충격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정신을 차렸더니 각인소가 눈앞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상한 광경이 란드와르를 반겼다.
카운터에 앉은 각인사가 울먹이고 있었다. 뇌전 각인을 해 줬던 남자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길고 매끈한 백발, 여자, 손등을 감싸는 옷소매. 어딘가 익숙했다.
“어서 오세요··· 흐읍···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을 멈춘 여자는 카운터에 고개를 처박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벨레다마저 당황할 정도였다. 란드와르는 가까이 가서 머리를 억지로 들어올렸다.
눈물 때문에 얼굴이 망가져 있었지만, 분명했다.
용병 사무소의 각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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