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지하 투기장
제대로 된 통성명을 마치고 짧은 대화를 나누자마자 란드와르는 헤이딘이 흠잡을 데 없는 상식인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물론 잠깐 본 것만으로 사람의 결함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사제 놈보다는 멀쩡해 보였다.
“우리는 전문적인 공예가가 아니라오. 해서 용의 비늘을 가공할 능력은 없을 것 같소. 대신 부적이나 반지가 생긴다면 거기에 각인을 새기는 것쯤은 어렵지 않지. 오래전에 만든 것이긴 하지만 대강의 회로는 모두 기억에 남아 있소.”
“완제품이 주어진다면 얼마쯤이 걸리겠습니까?”
예의를 갖추어 응대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야 스트레스 때문에 그랬지, 정중한 태도가 아깝지 않은 상대였다.
“제물로 쓸 영혼을 담을 용도라면 그에 맞추어 몇 가지 회로를 수정해야 할 거요. 재질의 차이도 고려해야 할 테고. 정확한 기한을 장담하긴 어렵다오. 대신 설계만 제대로 끝마친다면 각인 자체는 빠르게 끝나지. 내일부터 설계에 착수하겠소.”
“그러면 장신구의 종류를 정해야겠군요. 편하신 형태를 말씀해 주시지요.”
순간, 헤이딘의 표정이 대학원을 권유하는 교수처럼 변했다.
“와그다스의 각인에서, 새겨지는 물체의 면적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오. 모든 회로는 신의 영토에서 그려지고 작동하지. 각인은 단지 그 회로와 물체를 이어 주는 역할을 할 뿐이오. 이때 이루어지는 간접 참조는······.”
한참은 더 이야기할 기세였다. 말을 끊어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잠깐만요. 형태는 상관없다는 말씀이시지요?”
“언제나 재질이 문제라오. 나무는 많은 회로를 담을 수 없거든.”
“흠.”
란드와르는 펜 끝으로 종이를 툭툭 두드렸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벨레다에게 안 쓴 장부를 빌린 참이었다.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 반지 / 3개월
― 부적 / 1개월
용의 비늘이 가공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었다. 게임상의 수치긴 하지만 큰 차이는 없을 터.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나머지 비늘은 교단에 맡겨 둔 상태입니다. 그걸 부적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완성되기 전까지 회로를 설계하시면 되겠군요.”
“저 부적 가지고 다니면 잃어버리는데요.”
테네브로즈가 끼어들었다. 란드와르는 놈을 힐끔 보았다. 농담을 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씨발, 이젠 흘리는 것까지 고려해야 돼? 그냥 장비창에 끼우면 되는 게 아니라?
“너는 그래가지고 일상생활이 가능하냐?”
“저 빨래도 잘 하고 청소도 잘 하는데요. 가출했을 때 배웠습니다. 귀족들은 모르는 미덕이죠.”
“됐다. 파르타한테 말해서 줄 달아 달라고 할 테니까 목에 매고 다녀.”
저 너머에서 풉 소리가 났다. 벨레다였다. 저걸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둘은 철저한 분업 체제로 일했던 것이다. 헤이딘이 연구소 직원이라면 벨레다는 엔지니어. 실물이 뽑혀 나오려면 벨레다의 손이 필요했다.
게다가 늑대인간 문제도 남아 있었다. 란드와르는 묘한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 주시고, 너도 와서 앉아. 할 말 많다.”
벽가에 기대 있던 초등학생이 총총총 걸어왔다. 란드와르는 벨레다를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화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반지는 이제 둘이서 상의하고, 검투사 관련해서 좀 묻자.”
카스바에는 두 종류의 투기장이 있다. 지상 콜로세움이 하나, 지하 경기장이 하나. 운영 주체나 세부사항 역시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지상에 있는 것이 지하보다 더 깨끗한 것은 아니다. 누가 명예를 가져가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지상 콜로세움에 참여하는 검투사들은 모두 자유민이었다. 그들은 영광과 부를 위해 도처에서 몰려들었으며 기꺼이 목숨을 내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각각의 후원자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혹은 순수한 마음으로 훈련비를 지불했으나 목숨의 소유권을 주장하진 않았다. 그것이 지상의 규칙이었다.
반면 지하 경기장에서는 노예가 주인을 위해 싸웠다. 주인들이 서로 합의한다면 어떤 일이든 용납되었다. 하나가 다섯을 상대했으며 마검사가 마력 구속구를 끼고 나서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기에는 대개 이유가 있었다. 누구도 귀중한 재산을 잃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승산이 충분한 대결에만 선수를 출전시켰다.
“지하 투기장에 들렀다가 늑대인간을 봤다고 했지? 몇 년 전부터 그곳에 있었고.”
“제가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거기에서는 완전히 인기인이에요.”
“하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는 주인도 모르고.”
“일꾼용 노예 무리에 섞여 있었죠. 보통 그런 물건은 내역을 정확히 기록하지 않아요.”
늑대인간의 주인은 아드벡이라는 남자였다. 원래는 노예 시장의 하급 관리자로 일하다가 악성 재고를 떠맡게 되었다고 했다. 정신이 나간 데다 얼굴에 흉터까지 있는 탓에 팔리지 않던 여자를.
“그러다가 지하 투기장의 공고를 보았대요. 패배하더라도 위로금이 약간 나오니까, 그걸 노리고 내보낸 거죠. 짐 더미도 치우고 돈도 벌 목적으로요. 첫 상대가 전사 둘이었다네요.”
석상처럼 굳어 있던 여자였다. 그러나 검을 들자마자 전투 기계로 돌변했고, 모두를 제압한 뒤에는 그대로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이는 없었으나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여자는 지하 투기장의 돈을 몰고 다닐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잠깐만, 이거 좀 이상한데. 늑대인간들이 저들끼리 뭉쳐서 살긴 해도 아예 귀를 닫은 건 아니라고. 이 동네에 늑대인간이 하나도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유명해졌으면 그쪽에서도 눈치를 채지 않았겠냐.”
“구출되지 못한 이유가 궁금하신 거죠? 그것도 순혈이?”
이방인에게 적대적인 만큼 동족을 끔찍하게도 지키는 것들이었다. 늑대인간이 자기네 도시 바깥으로 나오는 이유는 둘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나는 쫓겨나서. 다른 하나는 동족을 구하기 위해.
“늑대인간이면 기본적으로 티가 나니까 묻는 거야.”
“보통은 그렇죠. 손도 늑대를 닮았고, 전투에 들어가면 괴수 형상으로 변하니까요.”
그러나 여자는 완벽한 인간이었다. 한 손 검과 방패를 들고 싸우는, 그냥 인간. 벨레다가 진실을 알게 된 건 오로지 헤이딘 덕분이었다. 영혼을 볼 방법은 야스와다의 주문밖에는 없었으니까.
“혈마법의 기운이 영혼을 뒤덮고 있더군요. 아마 그것 때문에 원래 모습이 억제되고 있는 모양이에요.”
게임에서는 나오지 않은 내용이지만, 이것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달리 설명할 방법도 없었으니까.
“그건 그렇다 치자. 이제 데려오는 게 문젠데. 그런 노예를 돈으로 팔진 않을 것 같거든.”
야스와다 마법은 계산에서 제외한 참이었다. 혼란이나 매혹 같은 메즈기는 제물이나 마법진이 없어도 시전할 수 있지만 그만큼 지속 시간이 짧았다. 아예 정신지배를 걸어 버리면 모를까.
란드와르는 늪지대까지 아드벡을 끌고 간 다음 용을 처치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말이 안 됐다. 그렇다고 해서 호위를 모두 죽이고 그걸 제물로 바치자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머릿속이 쓰레기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원래는 독을 쓰려 했어요.”
“독?”
“샤히드가 가끔씩 실험에 써 달라면서 시제품을 함께 보내거든요. 세카두에 사는 연금술사요. 그중에 괜찮은 게 하나 있어서 몇 개 더 달라고 해 놓았지요.”
독은 체내에 마력 부종을 만들었다. 부종은 평상시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다가, 급격한 마력의 흐름이 감지되면 일시에 터졌다. 원래는 마법사를 겨냥하는 독이었지만 마법적 효과가 걸린 상대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부종이 터지면 마력 흐름이 불안정해져요. 늑대인간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아주 흉포해진 상태와 제정신인 상태를 오가겠죠. 그러면 당연하게도 아드벡은 노예 기술자를 찾을 테고··· 그건 제가 될 거예요.”
란드와르는 게임에서의 전개를 복기했다. 벨레다는 자신의 작업실에 늑대인간을 가둔 상태고, 그 늑대인간은 갖가지 디버프에 걸려 있다. 특히 영혼 오염과 마력 폭주에.
영혼 오염은 임시방편이긴 해도 아즈리온의 축복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력 폭주는, 까다로웠다. 해제할 방법도 없는 판에 세 달을 시달려야 했다.
곤란했다. 그걸 옆에 두고 버틸 자신이 없었다.
“꼭 그래야 돼?”
“아뇨, 사실은 일이 꼬였어요. 테빈이 수송해 오던 수레가 박살났거든요. 하지만 이제 보니 더 깔끔한 방법이 있겠는걸요······.”
***
“고생을 하고 싶으시면 나으리 혼자만 하시지 저는 또 왜 끌어들이십니까?”
“새끼가 말을 막 하네. 왜. 요정들 죽일 땐 좋았고 검투사 되는 건 싫어?”
“노예 검투사 신세라니, 집안 어르신들이 기절하실 겁니다.”
“너 어차피 버린 자식이라면서. 집안 타령 하지 마라.”
테네브로즈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헤이딘을 따로 불러내 이야기를 나눈 게 효과가 있었다. 이놈이 고향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아야 하던 것이다.
“그 노친네가 다 떠들었습니까?”
“갇혀만 지내서 잘은 모른다더라. 근데 돌아가면 네 가문 사람들한테 잡혀 죽을 거라던데.”
“제 잘못이 아닌데요. 물론 제 잘못이 좀 있긴 합니다. 그런데 쫓겨난 건 그래서가 아닙니다. 잘못은 쫓겨난 다음에 한 겁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항상 합니다. 어차피 저쪽에서 절 먼저 버렸는데, 제가 한 게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범적인 횡설수설이었다. 란드와르는 한 귀로 흘리고서는 벨레다가 가져온 마법서를 휙 던졌다.
<원소학 : 냉기 ― 입문>.
이렇게 된 김에 확실히 가르쳐 놓을 작정이었다. 놈이 배운 것 중에서 정체를 들키지 않고 쓸 수 있는 주문은 혼란과 공포뿐이었으니까. 나머지는 모두 요정 마법인 게 눈에 보였다. 투기장에서 쓸 수는 없을 터.
“몰라, 새끼야. 책이나 봐. 팔다리 부러지기 싫으면.”
벨레다가 말한 깔끔한 방법이란 이런 거였다. 지하 투기장에서는 선수를 트레이드할 수 있었다. 돈이 오가기도 했지만 보통은 특별전을 열었다. 교환할 선수를 서로 맞붙인 다음, 이긴 쪽이 둘 모두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결과에 불복한다면 정해진 액수만큼을 내고 다시 사 가는 것도 가능했다.
“아드벡이 특별전을 자주 건다더라. 근데 씨발, 노예가 돼서 지하 투기장 끌려온 놈들 중에 고수가 얼마나 있겠냐고. 그 여자는 순혈 늑대인간이고. 당연히 늑대인간이 이기지. 그러면 아드벡은 노예를 하나 얻든 돈을 받든 하는 거고. 근데 또 도전하는 쪽은 여자가 탐이 나니까 승부를 거는 거야.”
“나으리께서 특별전 검투사로 나서서 이길 거란 말씀이잖습니까. 그러면 늑대인간을 별다른 잡음 없이 데려올 수 있으니까요.”
“오냐.”
“그런데 저는 왜 데려가시려는 건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나으리께서 늑대인간이랑 싸워서 이긴다. 끝 아닙니까. 아드벡이 나으리께 무슨 수작을 부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경기장 바깥의 일이고요.”
이유는 간단했다. 지하 투기장의 기본 경기 포맷은 2대 2였던 것이다. 변칙 룰이 있다지만 그건 소유주 둘이 합의해야만 벌어지는 비정규전. 정규 대진표는 모두 2대 2를 기준으로 돌아갔다.
“야, 생각해 봐라. 누군지도 모르는 놈이 와서 선수 교환하자고 하면 그걸 받아 주겠냐. 일단 정규 대진에서 이름값을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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