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노예 여왕
테네브로즈는 간혹 별불꽃이 주최하는 연회에 모습을 내밀었으나 항상 혼자였다. 그는 나트람의 사냥개였으며 그에게 하는 모든 말은 주인에게로 흘러갈 것이었다. 귀족들이 믿기로는 그랬다.
따라서 그는 연회장을 휘젓고 다니며 손님들이 기겁해 흩어지는 순간을 즐겼다. 나트람은 그런 행동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내버려 두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온갖 헛소리를 내뱉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큰 어르신, 제 생각에는 수석 요리사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기름진 음식은 정신을 게으르게 만듭니다. 별점술사가 말하길, 고기는 나흘에 한 번씩만 먹는 게 가장 좋으며 그 양은 반 접시를 넘어선 안 된다더군요.”
테네브로즈는 2층의 사람들을 한 번씩 괴롭힌 뒤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반응은 좋지 못했다. 나트람은 잔에 남은 술을 벌컥 들이켜고는 난간에 팔을 얹었다.
“이제 아래로 내려가서 네 피붙이에게 말을 붙여 보는 건 어떠냐? 입구 근처에 어둠달 놈들이 모여 있더구나. 누구든지 좋아. 내 근처에만 오지 말아 다오.”
“모두가 저더러 근처에 오지 말라고 하는데, 그러면 전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정원의 장미 덤불에 얼굴이라도 박고 있어라. 꽃에게는 입이 없으니까.”
“큰 어르신께서 제게 이러실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몸까지 아프게 만들어 주랴?”
그는 테라스를 돌아 나오면서 귀족들이 너무 겁이 많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야스와다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되더라도 그게 퍼져 나갈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다. 나트람이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무슨 말을 하려 치면 입을 틀어막고, 나중에서야 왜 이야기하지 않았냐면서 역정을 낸다. 참으로 불합리한 처사였다. 이런 사람을 믿고 따라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가문에게 버려졌고 친구는 원래부터 없었다. 딱히 나쁜 일을 하면서 살아오진 않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다행히 테네브로즈는 지금의 삶에 만족했다. 순탄하진 않아도 출세의 발판을 쌓는 중이고, 재미있는 일도 곧잘 생겼다. 저택의 외진 곳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별불꽃의 작은 어르신을 여기서 뵙는군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형님께서 제사장 직분에 올랐는데, 이토록 좋은 날에 뒤뜰에 틀어박혀 계시다니요. 지금 연회장으로 가시면 모든 가문에서 온 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하러 온 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무슨 음모에 연루되어 있을 게 뻔합니다만······.”
나트람의 말대로, 장미 덤불에 얼굴이라도 박을 요량으로 바깥에 나온 참이었다. 울타리로 감싸인 뒤뜰이 눈에 띄었다. 가로대를 붙잡아 오른 뒤, 그 너머로 뛰어내렸다. 바닥은 예상보다 깊은데다가 착지할 장소도 잘못 골랐다.
쌓아 둔 나뭇가지 더미가 부러지며 빠각 소리를 냈다. 그리고 헤이딘이 나타났다.
“아니, 잠깐만. 설마 유령이라도 되신 겁니까? 그건 아닐 텐데요. 그렇게 내려다보지만 말고 무슨 말씀이라도 해 보십시오.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하거든요. 여러 번 물어봤지만 큰 어르신도 입만 다물고 계신단 말입니다.”
“형님이 보냈느냐?”
테네브로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뒤편으로 부러진 잔가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럴 리가요, 여기는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시더군요. 어쩌다 보니 발까지 들이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면 다른 가문의 사주를 받았겠구나. 내게 고발장을 넣은 곳이겠지.”
“아직까지도 와그다스의 마법에 미련이 있으십니까? 제가 바로 증인인데 증거를 더 모을 필요는 없지요. 지금은 그저 심심해서 왔을 뿐입니다.”
헤이딘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젊은 요정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조금 주마. 더 좋은 변명이 있지 않겠느냐.”
“진담인데요. 제가 이렇게 충성스러운데 울타리를 넘었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큰 어르신께서도 너그러이 봐주실 겁니다.”
그는 나트람의 모든 지시를 충실히 따랐지만 듣고 싶지 않은 명령은 무시했다. 아주 사소하거나 좋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문제에 한해서는. 물론 들킬 때마다 나트람은 길길이 날뛰었는데, 뭐,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따라오거라. 하인을 부를 테니. 딜지가 문을 열어 줄 게다.”
“저는 그냥 여기 있고 싶은데요. 연회장으로 돌아가 봤자 어차피 혼자란 말입니다. 작은 어르신께서 이렇게라도 말 상대를 해 주시니 좋군요.”
헤이딘은 답하는 대신 계속 걸었다. 테네브로즈가 서둘러 뒤따라가며 말을 얹었다.
“아하, 이야기가 영감에게 흘러 들어가는 게 싫으신 모양이군요.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쯤은 저도 압니다. 그렇다면 제가 혼자 떠들겠습니다. 괜찮겠지요? 정말로, 아무도 제 곁에 있지 않으려 하거든요······.”
“그럴 만도 하지. 스티그미르가 죽었단 소식이 들리더구나.”
“글쎄요, 모르는 일입니다. 노친네가 지병이라도 도진 게 아닐까요?”
“발뺌할 필요 없다. 형님이 직접 말해 주었으니.”
스티그미르는 어둠달의 원로 중 하나였고, 원래는 3교구 제사장 자리에 내정되어 있었다. 그가 갑자기 병으로 죽으면서 나트람에게로 권좌가 넘어갔을 뿐이다.
테네브로즈에게로 의심이 모였지만 고발장이 날아오진 않았다. 그는 누군가를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죽이고 증거를 감추는 데에 재능이 있었다.
“네놈이 일족의 피를 보면서까지 얻으려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형님도 너를 내칠 게야. 그때가 되면 네 일가친척들이 가만히 있진 않겠지.”
“그런 것쯤은 압니다. 모두 감안하고 있습니다. 제가 제사장 자리를 물려받기 전에 영감이 저를 치울 겁니다. 물론 저지른 일을 두고 고발을 넣는다면 영감마저 자리가 위태롭겠지만, 누명을 씌울 구석은 어디에든 있지 않습니까.”
“알면서도 그런단 말이냐.”
“저는 그저··· 사건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 영감은 제게 할 일을 줍니다.”
***
“나잇값을 어찌 그리 못 하십니까? 어르신께서 그 모습이었을 때,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단 말입니다. 벌써 노망이 드셨다면 애석한 일이지만, 아니, 노망은 처음부터 나 계셨던가? 하긴 추적대를 그만두고 금지된 마법을 연구하는 게 제정신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헤이딘은 혀를 쯧 차고서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마력으로 재구성된 몸이 불어나면서 노인의 형태로 변했다. 그는 안락의자에 앉은 채로, 보란 듯이 오른팔을 내밀었다. 손이 잘린 쪽이었다.
“눈도 없고 발도 하나가 날아갔다. 이런 꼬락서니로 다니면 모양이 어디 좋겠느냐.”
“이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뒤뜰에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몸은 멀쩡하셨을 텐데요. 언제부터 그렇게 된 겁니까?”
“그것도 오래전의 일이지. 꽤 됐다. 형님 성격을 잘못 건드렸어.”
“그 늙은이를 꼬박꼬박 형님이라 부르시는 게 놀랍습니다.”
헛웃음을 흘린 헤이딘은 다시 소년의 형태를 취했다. 야스와다의 일들을 묻기 위해 테네브로즈를 다른 공간으로 불러낸 참이었다. 궁금한 게 많았다.
“인사는 이 정도로 마치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구나.”
“글쎄요, 꽤 복잡합니다. 일단 잠든 분께서 눈을 뜨셨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군요. 타마기스의 성물을 가져와서 희생 의식을 치렀습니다. 3교구에서요.”
요정들이 섬기던 신은 여섯이었지만, 의식을 치른다 해서 모두를 되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깨어난 것은 야스와다를 다스리던 신, 이시 타브뿐이었다. 나머지는 도망쳤거나 완전히 죽은 탓이었다.
게다가 란드와르의 난입으로 의식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그 역시 상태가 온전치 못했다.
“아즈리온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힘을 제대로 되찾기 전에 죽여 놔야지 않겠습니까.”
“그건 알겠다. 소생 계획은 내가 현직에 있을 때부터 진행되던 것이니까. 한데 네가 왜 그 옆에 있느냔 말이다. 배신을 택했다 쳐도 신이 그걸 받아들이냐는 다른 문제일 텐데.”
“보아하니 길을 모르는 것 같더군요. 길잡이를 해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테네브로즈는 3교구에서 일어난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곳의 요정들을 모두 죽였다는 대목에 이르자 헤이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형님은 어떻게 되었느냐? 설마 도망치진 않았겠지······.”
“작은 어르신의 기대를 저버리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피를 보진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3교구에 영감이 없었거든요. 선택받은 자들의 의회에 들어가셨습니다.”
의회는 야스와다 교계의 정점이었고, 모든 중차대사가 그곳에서 방향을 정했다. 죽기는커녕 엄청난 위세를 거머쥔 셈이었다. 헤이딘은 침울한 태도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되는 일이 없구나.”
“실망스러운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꼭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아즈리온께서 영감의 목을 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 생각을 하면 제자가 똑같은 꼴이 날 게 걱정이 된다. 신에게 매혹을 걸고서도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아.”
“아,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으셔도 되겠는데요. 애초에 나으리는 아즈리온이 아니거든요.”
헤이딘은 미간을 좁혔다. 그런 대업이라면 화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천사나 사도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였다.
“직접 대화를 나눠 보시면 아시겠지만, 뭔가··· 완전히 다른 겁니다. 천사도 아니고 신도 아니에요. 정확한 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꽤 자비롭다는 것만 압니다. 가끔은 정말로 떠돌이 전사 같지요. 인간 같고요.”
그는 잠시 침묵했고,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신들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필멸자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뜻을 짐작하려 해 봤자 길을 잃기 마련이니까.
“하긴, 자비로운 건 사실이겠구나. 네놈을 참아 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그 영감도 충성스럽게 모셨단 말입니다. 신의 말씀이라면 더욱 귀담아 들어야지요.”
테네브로즈는 억울한 투로 강변했다.
“그래서 하는 소리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지.”
“됐습니다. 아무도 제 충성심을 믿어 주지 않는데, 작은 어르신도 예외는 아니군요. 본론으로 돌아가죠. 여기에 온 목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헤이딘은 의식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중요한 문제에는 그에 걸맞은 태도가 있는 법이었다.
“어쨌든 그 인간이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하나만 해 주신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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