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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3화 (24/258)

23화: 노예 여왕

탈출은 성공했지만 헤이딘의 계획에 아무런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죽은 이의 영혼이 완전히 흩어지기까지는 사나흘이 걸렸다. 러스터가 매일 아침마다 별채에 들렀으므로 늦어도 하루 안에 시체가 발견되었을 것이다.

불안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됐다. 나트람이 만약 주검에 아무런 영혼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걸 헤이딘의 도망과 연관시켰다면? 그래서 비밀리에 사냥개를 풀었다면? 그는 카스바에 자리 잡은 후에도 최악의 가능성을 잊지 않았다.

“일단 나트람이 보낸 건 아니야. 그건 다행이지. 헌데······.”

헤이딘은 안락의자에 몸을 푹 파묻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바깥에서는 반지에 갇혀 지내야 했지만 이곳에서라면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슈문의 은총 덕분이었다. 그는 충성스러운 신도들에게 자신의 영토를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각인을 새겨서 요새로 쓸 수 있도록.

벨레다는 영토를 태피스트리와 목제 가구로 꾸몄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집이었지만 손님이 갑자기 칼을 꺼내든다 치면 공간을 비틀어버리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응접실에 갇힌 상대가 굶어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방식이 통했다. 나트람이 보낸 졸개들마저도 그렇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신은, 아즈리온의 화신은, 아니었다.

“···왜 아즈리온이 여기에 왔을까? 그것도 저 놈을 옆에 끼고?”

야스와다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을 추측하기에 헤이딘은 너무 오랫동안 요정 사회를 떠나 있었다. 수십 년간 저택에 갇혀서 하인들이 전해 주는 이야기를 들었고, 지난 여섯 해는 인간 세상에 머물렀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서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 그림자가 불쑥 드리웠다.

“스승님!”

해맑은 목소리에 헤이딘은 미간을 찌푸렸다. 벨레다는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각인을 가르치느라 다른 것에는 소홀하던 게 문제다.

“조금이라도 진지해질 수는 없는 게냐?”

“뭐, 어때요. 제가 정말로 말하고 다닐 것도 아닌데요. 제가 비밀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는 스승님도 아시잖아요.”

“나는 네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지가 의문이다.”

“아, 알아요. 당연히 알죠. 여기 아즈리온의 화신이 있다, 고 외쳐 봐야 요정들만 좋다는 거요. 나트람도요. 그 늙은이는 정말 아즈리온한테 목이 잘려야 하는데.”

벨레다가 누군가에게 말할 가능성은 고려하지도 않았다. 요정이라면 질색하는 아이였으니까. 헤이딘의 걱정은 다른 데에서 왔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야스와다 요정들이 문제가 아니야. 목이 잘리는 게 네가 될 수도 있단 말이다. 그게 당장 내일일지도 몰라.”

“스승님은 겁도 많으셔. 정 무서우면 이런 식으로 말해 둬요. 제가 사라지면 하인들이 용병의 정체를 퍼뜨릴 거라고요. 그러면 명줄이 조금은 길어지겠죠.”

헤이딘은 온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신들이 이곳마저 들여다보진 못하리란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신을 상대로 협잡질을 했다간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게 된다. 내가 용서를 청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 지금이야 무슨 목적이 있으니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라 쳐도, 일을 모두 끝마친 뒤에도 널 참아 줄 리가 없잖으냐.”

벨레다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신한테 장난을 쳤다가 죽는 사람이 어디 흔하게요? 엄청난 영광이죠. 신화에 제 이름이 올라갈 거예요. 스승님도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셔요.”

“제발 철 좀 들어라. 남들 앞에서 하는 것의 절반이라도 해 봐. 데라듄 앞에서는 어른 흉내를 그토록 잘 내던 게 왜 여기에만 오면 이러냔 말이다.”

벨레다가 풉 웃더니 두 손바닥으로 헤이딘의 양 뺨을 꾹 눌렀다.

“아이, 스승님도 참. 저보다 어린 모습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죠.”

“망할 것아, 내가 눈알 빠진 꼬락서니로 돌아다니면 좋겠어?”

“전 그 모습이 더 익숙한데요. 그냥 어려지고 싶다고 말씀하셔요. 저는 다 이해하니까. 원하신다면 누나라고 부르셔도 돼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헤이딘은 벨레다를 가볍게 밀쳐 내고서는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놀 시간을 준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대로 황무지에 갔어야 했어. 아니, 내 생각에는 지금 당장 짐을 싸는 게 좋겠다. 준비하려무나. 언제든 도망칠 수 있게 해 둬.”

“스승님도 말이 심하셔. 아직 7년이나 남았는데요!”

그건 둘의 협상안이었다. 황무지로 가서 남은 연구를 계속해라. 대신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인간 세상에서 놀아도 좋다. 젊은 나이에 흙먼지만 씹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상황이 다르지 않으냐. 아즈리온이 내려왔다는 건 큰 일이 터질 징조야. 야스와다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모양이지. 전쟁이 다시 날지도 몰라.”

“황무지에 숨어서 벌벌 떠는 것보단 신한테 죽는 게 더 재밌을 거라니까요. 스승님은 그걸 몰라요.”

헤이딘은 자신의 잘못을 절감했다. 각인술은 제대로 가르쳤지만,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벨레다가 그보다 뛰어났지만, 어린 인간을 기르는 면에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10년간 벨레다가 대화를 나눈 상대는 헤이딘을 제외하면 러스터와 딜지, 그리고 나트람이 끝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셋을 모두 속여야 했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가 제대로 되어 먹은 사람일 수 있다면 그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눈을 감고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일도 온다고 했지.”

“네,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대요. 아침쯤에 하인을 보내기로 했어요.”

“나는 요정 쪽과 이야기를 좀 나눠 보려 한다. 형님 소식을 들어야겠어. 따로 다른 방에 가 있을 테니 그동안 헛소리만 하지 말거라. 장난도 치지 말고. 제발 부탁이다.”

***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자고? 늑대인간 구할 때까지?”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란드와르는 다시 대화에 착수했다. 내일 아침에는 또 얼굴을 보게 될 텐데, 그때의 대응을 미리 생각해둬야 했다.

“안될 게 뭐가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 나으리께서는 지금 벨레다의 피를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신 것 같습니다만, 테빈을 죽일까 말까 고민하던 전사와 같은 분인지 의심스럽군요.”

“테빈은 내 영혼 안 봤잖아. 장소도 대평원 한복판이었고. 걔는 그냥 되도 않는 애가 덤빈 거지 별로 위험하진 않았단 말이야. 근데 이건 아니라니까.”

게임은 두 페이즈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체가 공표되기 전과 공표된 후. 그전에는 운신이 자유롭지만 신앙심이 덜 쌓인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신앙심 충전 속도가 빨라지고 협조를 구하기도 쉬워지지만, 요정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두 상태 모두 일장일단이 있었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건 적당한 시점의 일이어야 했다. 핵심 시나리오를 두 개쯤 처리하기 전까지는 떠돌이 전사인 편이 나았다.

“그러니까 나으리는 벨레다가 떠들어 댈 가능성이 걱정이신 거군요.”

“저거 저래서 입 간수 잘 하겠냐?”

“경솔한 인간은 아닐 겁니다. 나트람 영감이 꽤 날카로운 편이거든요. 함부로 속여 먹으려 했다가는 금방 들통이 난단 말입니다. 그런데 저 애는 그걸 10년간 했습니다.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

헤이딘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나트람의 명령을 받아 행동하는 만큼, 테네브로즈도 대강의 사정은 듣고 있었다.

인간 여자아이를 애완동물로 삼았고, 덕분에 얌전해졌다고. 금지된 마법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게 되었다고. 둘 다 멍청하게 별채에만 앉아 있다고.

“그런데 사실은 헤이딘과 벨레다가 영감보다 한참은 똑똑했던 겁니다. 뭐라고 하셨지요? 반지에 헤이딘의 영혼이 들어가 있고, 그게 와그다스의 각인으로 만든 거라고?”

“그래.”

정체를 들킨 것에 비하면 사소했지만, 이것 또한 문제였다. 반지는 테네브로즈의 코어 장비였던 것이다.

야스와다 학파의 주문은 제물이 없으면 화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 단점. 영혼 파편을 떼어내 가지고 다니더라도 제약이 컸다.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데다가 본체와 거리가 멀어져도 힘을 잃었다.

따라서 제물용 영혼을 비축해 두기 위해서는 벨레다의 반지가 필수적이었다. 비록 보관 슬롯이 하나뿐일지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컸다.

“헤이딘이 죽고 나서, 나트람 영감이 계속 혼잣말을 주절거리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시체에 영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 진상이 이제야 밝혀졌군요.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 아닙니까.”

“야, 그건 니가 재미있는 이야기지 나는 재미가 없어. 지금 일이 너무 꼬였다고.”

“뭐가 꼬였단 말씀이십니까? 비록 들키긴 했지만, 벨레다는 말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말씀하신 늑대인간은 구해 오면 그만입니다. 하려던 걸 그대로 하면 된단 말입니다.”

테네브로즈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그냥 벨레다가 비밀을 지키길 빌면서 계획을 차근차근 지켜 나가면 됐다.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

근데 그러면 안 되는데. 벨레다가 나쁜 새끼가 아니면 못 죽이는데. 그러면 씨발, 얘 장비는. 그거 없으면 레이드에서 캐릭터 DPS가 10%는 깎이는데······.

란드와르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카스바에 온 이유 중에 그 반지도 있거든. 니가 쓸 반지야. 근데 벨레다가 나쁜 새끼가 아니면 못 죽이잖아. 장비 얻으려고 민간인 때려죽이면 안 된다고.”

“저걸요? 제가 그 늙은이랑 친하게 지내길 원하십니까?”

“생각해 봐라. 거기에 영혼 담아서 다니면 필요할 때 꺼내서 제물로 바칠 수 있다고. 얼마나 편해지겠냐.”

“아!”

테네브로즈는 감탄을 터뜨리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둘을 희생시키는 건 껄끄럽지만, 그렇다 쳐도 내심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결론을 내린 듯 녀석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으리의 뜻은 알겠습니다. 저 또한 헤이딘에게 못된 짓을 하긴 싫거든요. 동지 의식이죠··· 나트람에게 똑같이 시달린 사람들끼리, 피를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포기하겠단 거냐.”

“아뇨,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하나를 더 만들어 달라고 합시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나무를 깎아 반지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라면 훨씬 쉽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재료까지 훌륭하지요.”

“무슨 재료?”

툭 내뱉은 순간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그랬다.

용의 비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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