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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2화 (23/258)

22화: 노예 여왕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가 원래 공간으로 돌아갔다. 테네브로즈는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 정확히는 벨레다가 녀석을 치웠다. 하인들이 그를 새로이 마련된 숙소로 데려갔다.

이제 응접실에는 벨레다와 란드와르만이 남아 있었다.

“매혹 주문을 건 것은 미안해요. 확인할 게 있었거든요.”

“제 여자 취향이 궁금했습니까? 좀 더 자란 다음에 와요.”

란드와르는 상대를 위아래로 훑었다.

설정상 스물셋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키는 초등학생 수준. 짙은 화장을 해 봐야 어린애가 엄마 화장품을 가지고 노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어린애한테 매혹을 당하는 건 존엄의 문제였다. 인간 이강현의 존엄.

“그건 아니에요. 공포나 혼란보다는 이게 그나마 정중하니까요.”

“무슨 종류의 주문이건 남 머리를 건드리는 건 실례인데요.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모르는 게 많은 모양입니다.”

“스승님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슬퍼하시겠네요. 그래도 잘 길러 보려고 애쓰셨거든요. 아무래도 요정이셨으니까 인간들의 도덕률과는 차이가 있었겠죠. 저도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말 한 마디마다 벨레다 뒤편의 벽이 기묘하게 일렁였다. 벽면에 드러난 각인 회로가 희미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란드와르는 반사적으로 품의 단검을 움켜쥐었다. 주문을 시전하려는 걸까? 어떤 주문을? 승산은 있지만······.

“꺅, 스승님!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새된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깨고 들어왔다.

란드와르는 눈을 깜박였다. 돌연 나타난 요정이 벨레다 곁에 서 있었다. 청록색 머리카락은 길게 길러 하나로 묶었고, 겉보기에는 한참이나 어렸다. 게임에서는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제자가 무덤을 파고 있는데, 스승 된 입장에서 그 꼴을 어찌 두고 보겠느냐? 너는 너무 경솔한 기질이 있어. 상대를 보아 가면서 처신하란 말이다.”

실컷 잔소리를 늘어놓은 요정은 고개를 돌려 란드와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조가 한층 진중해졌다.

“죽음으로 갚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변명할 말이 있어 감히 대화를 청하고자 합니다. 제 이름은 헤이딘이며 한때 야스와다에 적을 두던 요정입니다. 반지를 영혼의 거처로 두고 있으나 각인의 힘을 빌려 이렇게 몸을 얻게 되었습니다.”

···확신이 왔다. 좆됐다는 확신이. 게임에서 헤이딘은 이미 죽은 요정이었고 벨레다는 혼자서 싸웠다. 반지에 담긴 영혼은 단순한 마력 배터리에 불과했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사실 의식이 남아 있었다면? 벨레다가 허공을 바라보던 게, 단순히 생각에 잠긴 게 아니라 헤이딘의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면? 머릿속에서 위험 경보가 울렸다.

<시뮬레이터 설계 과정에서 용량 문제로 쳐낸 게 조금 있어요. 헤이딘은 검수하면서 다시 넣기로 이야기가 됐는데, 개발 부서에서 까먹은 모양이네요.>

동시에 티아가 설명을 붙였다. 란드와르는 생각했다. 이런 씨발, 빨리도 이야기하십니다. 일을 어떻게 한 겁니까?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흐름은 나쁘지 않으니 계속 대화해 보셔요. 저는 그러면 이만.>

천사를 욕하는 건 나중 일로 미뤄 두기로 했다. 그런 데에 생각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대전제가 무너진 것이다. 헤이딘의 정신만큼은 멀쩡히 살아 있는데다가 조건부로 몸을 되찾을 수도 있었다. 아마 벽에서 작동하던 각인이 그 기능을 하고 있겠지.

그것까진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별불꽃이 야스와다의 명문가라는 점이었다. 남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은 학파의 마법 중에서도 최고위 주문에 속했다.

벨레다는 아닐지라도 헤이딘이라면 그걸 익혔을 터.

“봤구나.”

“예, 외람되게도 영혼을 잠시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는 사실을 토대로 감히 추측을 해 보았지요. 일단 만나 뵙기 전에 뒷조사를 조금 했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늪지대를 통과하는 게 아니라 세카두에서 차원문을 탄 다음 여기로 오셨지요.”

란드와르는 계속 말하라는 식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할 이야기가 마땅치 않았다. 기껏 떠오르는 생각이라고는 지금 죽일까, 하는 것뿐.

벌써부터 이런 곳에서 정체를 들킬 수는 없었다. 너무 경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데 씨발, 게임엔 이런 경우가 없었다. 공략을 믿은 게 죄였다.

“세카두는 아즈리온 교단의 본산이고, 당신은 교단의 하급 사제로 알려져 있지요. 이 시기에 지령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할 수 있는 하급 사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제의 영혼은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죽여? 말아?

란드와르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살인 욕구가 뒤따라왔다. 죄책감이고 뭐고 간에 죽여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요정 이교도와 무법 도시의 노예 기술자. 믿을 상대가 아니었다. 테네브로즈처럼 성흔 찍어 놓고 맹약 걸어서 노예 계약 잡으면 모를까.

바로 죽여 버릴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벨레다와 헤이딘은 와그다스의 마법사. 각인을 통해 공간을 쪼개고, 나누고, 다시 합치는 데에 특화된 학파였다. 전투에는 부적합하지만 방어 면에서는 압도적인 성능을 보이는 게 특징. 쉽게 말하면 미궁 설계였다.

처소에 걸린 각인을 미리 약화시키지 않으면 벨레다를 죽이더라도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대로 갇히는 것이다.

“그래서. 요구 사항이 뭐야.”

“다른 것은 여쭙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후일에라도, 이 불민한 아이에게 신의 진노를 내리지 않아 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그냥 여기서 죽이면 안 돼? 죽여서 비밀 엄수시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혀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파르타에게 하는 것처럼 근엄하고 진지한 신을 연기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잘 안 됐다. 뇌가 멀쩡하게 작동하질 않았다. 다행히도 헤이딘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이 공간은 옛 신의 영토에 속해 있습니다. 슈문께서 제게 약간의 땅을 허하셨지요. 당신일지라도 이곳을 쉽게 빠져나가진 못할 겁니다. 그러니 간청합니다. 저희의 불손을 용서해 주십시오.”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

“야! 사제야! 나 들켰다!”

란드와르는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안 그러면 열통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큰 소리로 하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알 게 뭐야. 천계 놈들이 자신보다 더 멍청했다. 훨씬 멍청했다.

그걸 용량이 부족하다고 삭제해? 그리고 복구하는 걸 까먹어?

“···뭐가 들켰기에 난리십니까?”

융단에 드러누워 있던 요정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이 와중에 자고 있었다.

“내 정체. 내가 아즈리온 화신인 거. 뭐든 간에.”

있던 일을 그대로 읊자 테네브로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보랏빛 보호장이 빠르게 크기를 넓히며 거실 전체를 감쌌다.

“정리해 봅시다. 사실은 그 노친네가 반지 속에 살아 있었단 말씀이시죠. 마법도 멀쩡하게 쓰고요. 그래서 나으리의 영혼도 들여다보았고, 들켰다. 맙소사, 그냥 그 자리에서 머리통을 부숴 놓지 않고 뭘 하셨습니까?”

“미궁에 갇혀서 굶어 죽을 일 있냐?”

테네브로즈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침묵했다. 놈도 추적대 출신이니 와그다스의 마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터.

“뭐, 좋습니다. 둘 다 야스와다랑은 척을 졌는데 어디 가서 이 얘기를 하고 다니진 않겠죠. 일단은 느긋하게 기다려 봅시다.”

그러나 장고 끝에 튀어나온 것은 어울리지 않게도 해맑은 대답이었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게 느긋해도 될 문제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디 가서 날씨 이야기 하듯 떠벌리고 다니진 않겠지. 하지만 고전적인 수법은 가능했다. 거처 어딘가에 이 사실을 담은 종이쪽지를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자신이 실종되거나 죽으면 그곳을 찾아보라고.

이것도 끔찍했다. 협박에 써먹을 여지가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미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갇혀서 죽는 것. 혹은 폭탄을 하나 끼고 다니는 것. 만약 터지면 온 세상 사람들이 란드와르의 정체를 알게 됨.

외통수였다.

“이 새끼는 아주 천하태평이야. 추적대가 몰려와도 느긋하게 있어라. 꼭이다.”

“나으리, 아즈리온이 하계에 내려올 이유는 하나뿐이라는 걸 다들 압니다. 야스와다 요정들의 머리통을 부수는 것이지요. 신이 여기 있다며 떠들어 봤자 그놈들만 좋은 일 시키는 셈인데, 헤이딘이 그걸 허락하겠습니까?”

하긴. 반지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벨레다는 완벽한 무능력자였다. 헤이딘이 마음만 먹는다면 제자의 돌발 행동쯤은 차단이 가능하단 소리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테네브로즈의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헤이딘이 야스와다를 싫어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걔도 어쨌든 고향은 야스와다잖아.”

“아뇨. 헤이딘은 추적대 감시 명부에 올라 있습니다. 그 늙은이가 동족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제가 제일 잘 알죠. 담당이 저였는데요.”

“뭐?”

테네브로즈는 추적자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와그다스의 마법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 헤이딘이 그 문제로 고발을 당했다는 것, 한동안 감시하다가 심문도 몇 번 했다는 것, 귀족이 상대라서 주문을 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증거를 거의 잡아냈다는 것.

···그러던 차에 나트람에게 손을 떼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

“멍청하게 굴지 말고 생각을 잘 해 보라더군요. 모른 척 덮고 지나갈지, 아니면 사실대로 말했다가 출세길이 막힐지. 마침 저도 후원자가 필요했습니다. 집을 나온 상황이었거든요.”

듣고 나니 한층 어처구니가 없었다. 헤이딘의 이력이 아니라 테네브로즈의 태도 때문에. 이걸 이제야 말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의아했다. 자신을 엿 먹이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면서. 원한 쌓인 거 없다면서.”

“몇 번 보았다고는 말씀드렸는데요. 심문하면서 몇 번 봤습니다.”

“아니, 씨발. 그게 바로 원한이야. 보통 사람들은 사찰을 당하면 원한을 품어.”

“전 그냥 맡은 일 한 건데요.”

란드와르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빼어 물었다. 얘기를 조금만 더 했다가는 헤이딘이고 뭐고 간에 이 새끼부터 죽이게 될 것 같았다. 참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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