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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1화 (22/258)

21화: 노예 여왕

오후가 되어서야 벨레다의 하인들이 왔다. 란드와르와 테네브로즈를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시장은 노예 기술자를 대우했지만 안전을 보장하진 못했다.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암살자를 보낼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다.

따라서 기술자들은 대개 둘 중 하나를 택했다. 상단의 밑으로 들어가 보호를 받거나, 아니면 거처를 완벽히 감추거나.

벨레다는 후자였다.

“여기입니다.”

비좁은 지하 터널과 계단들을 한참이나 지나자 작은 쪽문이 나타났다. 겉보기엔 낡아 빠진 나무 문에 불과했지만, 하인들이 손을 짚고 시동어를 외우자 복잡한 각인 회로가 널판을 뒤덮었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화려한 태피스트리로 감싸인 거실이었다. 하인들은 란드와르와 테네브로즈를 응접실로 안내한 후 다른 문을 통해 사라졌다.

체구가 작은 흑발의 여자가 고풍스러운 안락의자에 앉아 그들을 마주 보았다.

“오시는 길이 불편했을 텐데, 사과 말씀 드리겠어요.”

“사금을 찾기 위해서는 토사를 헤쳐야 하는 법이죠. 작업실이 아름답습니다.”

테네브로즈가 앞으로 나섰고 란드와르는 호위 무사인 척 물러났다.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벨레다가 누구에게 용건이 있을지는 명확했으니까.

“사금을 찾기 위해서는 토사를 헤쳐야 한다니, 재미있는 비유네요. 나는 내 황금을 보여 줬어요. 당신도 그래야겠죠.”

환술을 풀라는 소리였다. 테네브로즈의 손날이 관자놀이를 스치자 고동색 머리의 인간 소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요정 마법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피식 웃은 벨레다는 란드와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요정의 일행이 제 모습으로 돌아다니진 않겠죠. 솔직히 하자구요.”

테네브로즈는 내키지 않는 투로 란드와르에게 걸린 환술을 풀었다. 그는 칙칙한 금발이 선홍색으로 돌아온 걸 확인하고서는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군요. 어둠달의 테네브로즈입니다. 한때는 3교구의 추적자였지만, 지금은 배신자 신세죠. 먼 땅에서 별불꽃의 일원을 만나 기쁜데요.”

벨레다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내가 누군지 아나요?”

“애완동물이 달아나는 일이 흔치는 않으니까요. 정원의 무덤에 장미가 꽤 멋들어지게 피었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흐음.”

짧게 신음한 벨레다는 몇 가지를 더 캐물었다.

추적자가 어째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는지. 옆의 전사와는 무슨 관계인지. 어째서 함께 다니게 되었는지. 카스바에 온 것은 야스와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함인지. 그리고 기타 등등. 모두 예상 범위 안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대답까지 들은 뒤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했다. 길다면 긴 침묵이 흐른 끝에 벨레다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내 소개를 할 차례네요. 나는 노예 기술자고, 인간들의 정신을 망가뜨리는 게 일이에요. 보통은 물약에 더해 야스와다의 마법을 쓰죠. 제가 아는 주문은 기초적인 것들뿐이지만, 영혼에 흠집을 조금 내 두면 물약의 효과가 훨씬 좋아지거든요.”

“잠깐만. 그 늙은이도 엄청난 일을 저질렀군요. 평민들에게만 가르쳐도 잡혀갈 주문을 인간에게 알려 주다니요. 나트람 어르신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추적자를 다섯쯤은 보냈을 겁니다.”

정신 계열 주문은 야스와다 학파로 분류되었지만 도시의 모든 요정이 그 마법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명문가가 마법서와 주문식을 독점했다.

소수의 명문가란 대전쟁 이전부터 야스와다를 다스려 오던 귀족 계층을 의미했다. 명문가 혈족 이외의 존재에게 야스와다의 마법을 가르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다른 도시에서 온 귀족일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는 야스와다 요정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아요. 특히 명문가라면 치가 떨리도록 싫어하죠. 여기에서까지 귀족 행세를 하려 한다면 앞날이 편치 못할 거예요.”

“아마도 우리 사이가 좋아지려면 저는 낱말을 아끼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하지만 오해는 말아 주십시오. 저는 모두를 이런 식으로 대하니까요.”

란드와르는 잠시 테네브로즈에게 대화역을 맡기는 게 현명한 일일지 고민했다. 이야기를 나눠 보라 했더니 기 싸움을 벌이고 앉았다. 더 큰 문제는 이놈 스스로는 그걸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소통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회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놈이었다.

“신관님.”

직분을 부르자 테네브로즈가 뒤를 돌아보았다. 란드와르는 말을 더하는 대신 눈빛으로 칼을 갈았다. 이윽고 요정의 허리가 꼿꼿해지더니 태도가 변했다.

“무례에 대해서는 사죄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디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사과할 줄 아는 건 마음에 드네요. 그러면 본론으로 넘어가자고요.”

설명은 지하 투기장에서부터 시작됐다. 지금까지는 딱히 관심을 두지 않고 지냈는데, 얼마 전에 사업상의 문제로 경기를 직접 관람할 일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던 와중 한 선수가 눈길을 끌었다는 것이다.

“늑대인간이 노예 검투사로 출전하고 있더군요. 그것도 순혈이요.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어요. 요정의 마법에 걸려 있었죠. 그 주인에게 물어 보았지만, 자신도 시장에서 사들인 것이라 정확히는 모른다더군요. 그마저도 몇 년은 된 일이라고.”

벨레다는 뒷조사를 해 보았지만 별다른 정보를 건지진 못했다. 알아낸 것은 검투사가 여러 명의 떠돌이들과 함께 수레에 실려 왔다는 사실뿐. 그때도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고 했다.

“야스와다의 주문이겠군요.”

“아뇨, 바단의 혈마법이었어요. 내가 본 게 맞다면요.”

바단의 마법사들은 괴수를 복종시키고 군단을 이끌었다. 늑대인간을 제국의 수호병으로 거느릴 수 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늑대인간은 기본적으로 늑대 괴수와 인간 영혼의 혼합체. 괴수들만큼은 아니지만 혈마법에 큰 영향을 받았다.

“궁금해졌죠. 요정들이 무슨 수작을 벌이고 있는지.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긴 어려운 일이라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마침 당신들이 왔군요.”

“글쎄요, 거기에 대해선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타마기스에서 성물을 훔쳐 오긴 했지만 늑대인간을 건드리진 않았어요. 그 족속들을 상대하느니 걸어 다니는 시체가 낫지요. 교단이 한 일이 아닙니다.”

늑대인간은 혼란이나 매혹에 기본적으로 저항이 있었다. 괴수의 야성과 인간의 지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탓이었다. 하나가 무너지더라도 다른 쪽이 나머지를 지탱하므로.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혈마법을 쓸 수도 없었다. 야성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 자리에서 찢겨 죽을 공산이 컸다.

“정말로요? 누군가의 단독 행동 때문에 순혈 늑대인간이 저렇게 됐다는 말을 내가 믿어야 하나요?”

“바단에서 온 것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언제나 그렇지 않습니까. 무너진 도시 출신의 귀족들은 야스와다의 명문가를 미워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벨레다가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그 뒤에 누가 있는지는 아직 몰라요. 내가 알고 싶은 것도 그거고요. 어떻게든 늑대인간을 데려와서 주문을 풀어 낼 생각이에요. 이성을 되찾으면 자세한 사연을 들을 수 있겠죠. 당신들이 그 일에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노예 기술자의 소명은 아닌 것 같은데요. 돈이 벌릴 리가 없잖습니까.”

테네브로즈가 넌지시 반론했다.

“돈은 필요하지 않아요. 나는 박애주의자거든요.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죠. 다른 기술자들은 매질과 고문밖에는 모르지만, 나는 누군가를 돕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도록 정신을 뜯어고쳐요. 어차피 만들어질 노예라면 행복의 총량을 늘려야지요.”

“인간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정말 낯설군요······.”

테네브로즈는 그렇게 말하면서 힐끔 란드와르를 보았다. 정신 나간 사람의 표본이 되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니었지만, 란드와르도 동의했다. 범상치 않은 정신머리의 소유자였다.

“모두들 그렇게 반응해요. 별채에 갇혀 지내는 동안 세상을 잘못 배웠는지도 모르죠. 일곱 살 때부터 10년을 거기에서 보냈거든요.”

그 지점에서 벨레다의 말이 뚝 멎었다. 그녀는 기억을 되짚듯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테네브로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쓸데없는 말이 많았네요. 본론으로 돌아가자고요. 나를 돕겠어요, 아니면 추적자들에게 쫓기는 편을 택하시겠어요?”

이 시나리오의 보상은 둘이었다. 영혼을 담을 수 있는 반지와 늑대인간 동료. 그중에서 늑대인간은 특히 중요했다. 구출한다면 이후의 늑대인간 관련 시나리오의 전개가 크게 변했다.

벨레다가 이 시나리오의 보스인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다짜고짜 때려죽이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았다. 아직 늑대인간은 투기장에 얽매여 있었고 둘은 목적을 공유했다.

“여기에서 조금 머물러도 괜찮겠지요? 계약서를 고칠까요?”

“그러도록 하십시오.”

테네브로즈는 란드와르의 의향을 물었고 란드와르는 무뚝뚝한 호위병을 연기했다.

“우리 둘만 따로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네요. 잠시 기다려 줘요.”

순간, 벨레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

말이 끝나자마자 입구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각인이 벽을 기어올랐다. 곧이어 란드와르는 완전히 다른 방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일이 귀찮아졌다는 느낌이 왔다.

그래도 차례가 넘어온 이상 최선을 다해야 했다. 란드와르는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 둘, 이 그런 뜻일 줄은 몰랐습니다.”

“손님을 돌조각처럼 세워 놓아서는 예의가 아니죠.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서트펜. 서트펜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서트펜은 란드와르가 카스바에서 쓰게 될 가명이었다. 그는 짧게 덧붙였다.

“경호원은 원래 돌조각처럼 서 있는 게 일입니다.”

“저 요정이 당신 눈치를 보고 사과하더군요. 단순한 호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란드와르는 돌아가면 테네브로즈에게 욕을 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회성이 범죄적으로 부족한 놈이었다.

“무슨 관계일 것 같습니까?”

“글쎄요. 일단 당신은 요정이 아니에요. 어떤 요정도 칼을 들고 맞서 싸우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라기에도 이상하네요. 인간 전사가 명문가의 요정과 함께 다니고, 요정은 인간의 명령을 듣는다?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죠. 설명을 듣긴 했지만 의문이 남아요.”

“계속 추리해 보시죠.”

“여기에서 끝이에요. 아무 단서도 없는걸요.”

어쩌라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지 그걸 왜 또 물어보고 있어. 란드와르는 성격이 급속도로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일이 예상을 벗어나면 어김없이 짜증이 밀려왔다. 안 좋은 습관이었다. 안 좋은 습관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데, 못 고쳤다.

“저 요정이 설명해 준 대로만 알면 됩니다. 전 그저 떠돌이 용병이고, 돈을 대가로 야스와다의 배신자를 호위하고 있습니다.”

“신중함과 경계심은 훌륭한 미덕이죠. 하지만 카스바에서 동업자를 구할 때에는, 그런 것쯤은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답니다. 서로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같이 일을 하겠어요? 자, 솔직히 말해 봐요.”

벨레다는 싱긋 웃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저 인간, 주문을 썼어요. 매혹 계열 주문이네요. 걸리진 않았는데 알아 두시라고요.>

티아의 속삭임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짜증이 격발했다.

쌍시옷 소리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머리에 힘을 주었다. 참아야 했다. 여기에서 급발진을 하면 잃을 게 많았다. 늑대인간은 아직 투기장에 있고, 자신은 벨레다와 손을 잡아야 한다.

이런 씨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뇌가 헤집어지는 경험은 천사들한테 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킬 건 지키고 삽시다. 앞으로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닌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뻔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란드와르는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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