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노예 여왕
요정의 신들은 아즈리온에게 심장을 잃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와그다스의 신, 슈문은 학자들과 함께 황무지에 숨었다.
전쟁이 끝나고 혼란이 수습된 후, 도망자의 후손을 찾아 죽이는 것은 야스와다 추적대의 임무가 되었다. 젊은 추적자이던 헤이딘 또한······.
“형님, 이제 나는 다른 분을 섬기게 됐소. 내 안에 그분의 은총이 넘쳐흐르오.”
나트람은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그 역시 추적대의 일원이었지만, 여기에 온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어떻게든 널 찾아오라고 하셨다. 죽었다면 유품이라도 가져오라고. 그러지 못하면 내가 미움을 받게 된다. 딤 나겔에게 별불꽃 가주 자리가 넘어가는 꼴은 볼 수 없단 말이다. 내 말을 이해하겠어?”
“누가 가주가 되거나 말거나, 그런 일은 형님이나 많이 신경 쓰시오. 나는 이 땅에 남아 있으려오. 여기에 세상의 모든 지혜가 있소.”
헤이딘이 먼저 마력을 끌어 올렸다. 스산한 보랏빛 기운이 황금색 모래를 뚫고 치솟았다. 나트람은 코웃음쳤다. 동생은 학자 기질이 있었지만 주문을 사용한 전투에서는 형 쪽이 뛰어났다.
결국엔 나트람이 이겼고 형제는 야스와다로 돌아갔다. 그들의 부모는 황무지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전해 듣고서도 막내아들을 사랑했다. 추적대에 사표를 낸 헤이딘은 자신의 집에 틀어박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금지된 마법을 연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다행히도 나트람은 가문의 흠결을 덮을 능력이 됐다. 모든 일을 수습한 뒤, 그는 동생을 본가로 불러들였다.
***
세월이 흘렀다. 형제의 부모는 늙어 죽었으며 헤이딘은 무기력한 중년이 되었다. 그렇게 지켜 낸 이름이 나트람의 앞뒤에 달라붙었다. 나트람. 별불꽃의 가주이자 3교구의 제사장. 그는 직위가 가져오는 울림을 즐겼다.
그러나 직위에는 책임 또한 뒤따르는 법이다. 나트람은 애증 어린 눈빛으로 벽에 묶인 동생을 쳐다보았다. 지친 목소리가 돌벽에 부딪혀 떨렸다.
“형님, 도대체 가문이 무엇이고, 교구 제사장 자리가 무엇이오. 그걸 위해서 내가 여기 붙잡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또 뭐요. 날 풀어 주시오. 그러면 형님 눈에 결코 보이지 않도록 할 테니.”
“네가 사라지면 추적대가 움직인다. 그게 어떤 뜻인지는 너도 알지 않으냐.”
수사는 끝났지만 헤이딘은 아직 추적대의 감시 명부에 올라 있었다. 그가 야스와다 땅에서 사라지는 즉시 추적자들이 활동을 시작할 것이었다. 행선처를 안다면 어디든 쫓아갔고, 아무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 먼저 거처를 수색했다.
만약 부정이 발견된다면 나트람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비밀을 숨겼다.
“차라리 죽이고 장례를 치르는 건 어떻소. 가주 자리도 물려받았고 어머니도 돌아가셨으니 상관없는 일 아니오.”
“이 나이가 되니 피붙이가 소중하게 느껴지더구나. 방계 놈들은 기어오르고 직계는 말을 듣지 않아. 젊은 신관은 야심만 있는 머저리고 사교계의 명사는 야심조차 없는 머저리지. 네가 추적대에 남아 있었더라면 많은 도움이 됐을 게다.”
“충견이 하나 있잖소. 저잣거리의 평민들조차도 형님이 개를 기른단 걸 안다오.”
“결국엔 어둠달의 아이일 뿐이지. 다루기 힘든 놈이야.”
테네브로즈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의 가문에게 버려진 뒤 별불꽃의 사냥개가 되었다. 정확한 사연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야스와다의 명문가는 각자의 비밀을 간직했다. 나트람이 헤이딘에게 마력 구속구를 씌우고 수십 년간 가둬 온 것처럼.
그는 탈출을 꿈꿨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리고 이제는 저택 지하의 고문실에 묶여 있었다.
“···가끔은 너보다도 골치 아플 때가 있다.”
“내가 형님에게 골칫거리라는 사실이 기쁘오. 내게도 형님이 꼭 그렇다오.”
“앞으로는 아닐 게다. 진작 이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게 후회스럽구나.”
나트람은 몸을 돌려 하인 둘의 이름을 외쳤다.
철문이 열리며 늙은 여자와 젊은 남자 하나씩이 들어왔다. 늙은 쪽의 이름은 딜지였고 젊은 쪽은 러스터였다. 둘 다 평생에 걸쳐 헤이딘을, 별불꽃의 작은 주인을 보필한 충신들이었다.
그러나 러스터의 손에는 손도끼와 단검이 들려 있었다. 딜지가 가져온 것은 물약과 붕대였다. 헤이딘은 돌아가는 상황을 직감하고 자신의 형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말을 얹는 대신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오른손을 잘라라. 그러면 그 멍청한 낙서도 하지 않겠지.”
“그건 와그다스의 각인이오, 형님. 이곳의 각인술과도, 인간의 방식과도 완전히 다르지. 훨씬 정교하고 섬세하다오.”
헤이딘은 낄낄 웃었다. 나트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왼발을 잘라라. 균형을 맞춰야지. 남은 손으로 지팡이를 짚어야 할 테니.”
“내게 뭔가를 남겨 주다니, 참으로 자비로우시오.”
나트람의 고개가 이제야 헤이딘을 향했다.
“애걸해 보거라. 그러면 더한 걸 남겨 줄 수도 있어.”
“아니, 늦었소. 형님은 나를 황무지에 두고 갔어야 했소. 상상해 보시오. 나는 행복했을 거요. 어머니는 조금 슬퍼하셨겠지만, 받아들이셨을 테지. 가문 사람들도 형님보다는 딤 나겔이 가주가 되었어야 한다고 속삭인다오.”
순간 나트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수많은 것들에 맞서며 살아왔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와, 정신 나간 동생과, 하찮은 피가 섞인 사촌을 상대로. 딤 나겔의 이름을 들을 때면 그는 화가 치밀었다.
“다시 말해 보거라. 그 천한 놈이······.”
“딤 나겔은 이제 피송곳니의 주인이 됐소. 제사장 직분에 오르진 못했지만, 사교계에 한몫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일가를 지혜로 다스린다오. 하지만 형님은 폭군일 뿐이잖소.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아.”
헤이딘은 이 순간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지 가늠해 보았다. 더한 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기에는, 그런 이유로 침묵을 지키기에는 너무 오랜 고통 속에서 보내온 삶이었다.
기나긴 침묵이 있었다. 별불꽃의 가주가 하인들을 보았다.
“두 눈을 파내라.”
딜지와 러스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두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하지만, 큰 어르신,”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어려운 일이라면 내가 해 주마.”
나트람은 뻣뻣이 굳어 있는 러스터에게서 손도끼를 빼앗았다.
“···그래, 그게 우리 모두에게 낫겠다.”
날이 고문실의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동작에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자비가 없었다. 몸에서 피가 빠르게 빠져나가더니 격통이 그 자리를 채웠다.
“어머니는, 아버지는 언제나 너만을 사랑하셨지. 네가 우리를 배신한 후에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부모님께 이 모습을 꼭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소원이 됐구나.”
“그분들께서 일찍 돌아가신 게 참 다행이오. 나는 형님이 이보다 더 처참하게 죽길 빌겠소.”
미칠 듯한 홍소. 그리고 도끼질이 다시 한 차례. 툭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는 손. 나트람은 손도끼를 내려놓은 뒤 단검을 움켜쥐었다. 뾰족한 빛이 헤이딘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눈앞이 잠시 붉더니 둔하고 깊은 어둠이 밀려왔다.
“이 가문이, 도시가, 야스와다의 모든 신전이, 형님이 그토록 아끼는 것들이 산산이 무너졌으면 좋겠소. 그게 내 소원이오.”
헤이딘은 스러지는 정신을 붙잡았고, 울부짖었다.
***
헤이딘은 본관 뒤편의 별채로 옮겨졌다. 거기에서 다시 세월이 흘렀다.
딜지는 텅 빈 눈구멍을 가릴 수 있도록 안대를 가져다주었다. 이름난 공방의 장인이 검은 천에 은색 실로 수를 놓은 물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헤이딘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비단의 매끄러운 감촉뿐이었다.
그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안대의 겉모습 따위에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와그다스의 신은 헤이딘을 아꼈으며 끝없는 지혜를 베풀었다. 그 어떤 책에도 적히지 않은 지식들이 눈앞의 어둠을 타고 흘렀다.
손이 멀쩡했더라면, 하다못해 눈이 한쪽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본 것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으리라.
그러나 헤이딘은 자신의 몸에 갇혀 있었다. 마력 구속구나 가시덤불 울타리가 아니라 병든 몸에.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뒤뜰의 낡은 안락의자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딜지의 도움이 필요했다.
“고마워요, 유모. 이제 가 봐요.”
“조만간 만찬이 있을 거예요. 생각이 있으시다면 가주님께 말씀드릴게요.”
“형님이 허락해 줄 리가 없지요. 내 꼴을 보기만 하면 사교계 명사란 것들이 온갖 소문을 지어낼 겁니다. 불청객이 이곳까지 밀려올까 두렵군요.”
딜지는 담요를 덮어 준 뒤 저택으로 돌아갔다. 마른 공기에는 풀내음이 섞여 있었고 따스한 햇살이 무릎을 적셨다. 헤이딘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해가 비쳐 드는 방향으로 판단하건대 서너 시간쯤이 훌쩍 지난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려주세요.>
만찬에 쓸 요리 재료가 도망 나온 모양이었다. 헤이딘은 추적자 시절의 경험을 되살렸다. 인간의 언어를 직접 발음할 일은 많지 않았지만, 대강은 기억이 났다.
<그런 식으로 떠들어 봤자 별 소용은 없을 게다. 요정들은 인간의 말을 모르니까.>
<할아버지는 아시잖아요. 높으신 분들은 인간 말도 할 줄 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면 내 충고대로 하거라. 부엌으로 돌아가려무나. 그대로 식탁에 오르면 된다.>
<죽기 싫어요.>
<인간도, 요정도 모두 죽는다. 때가 되면.>
<저는 아직 어려요. 잡아먹는 것보다는 옆에 두시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예요. 말 상대를 해 드릴 수도 있고, 심부름을 할 수도 있어요. 가고 싶으신 곳이 있다면 어디든 지팡이를 이끌어 드릴게요.>
<그래, 네가 나를 돕는다면 꽤나 편해지겠지. 딜지는 누군가를 돌보기에는 너무 늙었으니까.>
헤이딘은 빙긋 웃으며 왼손을 머리 뒤편의 매듭으로 옮겼다. 눈구멍만 남은 모습이 아이에게 얼마나 기괴하게 보일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리했다.
<그런데 보거라. 이런 늙은이가 널 도울 수 있을 것 같으냐?>
얼마간의 침묵이 지났다. 두려움과 확신이 뒤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발이 없으면, 손이 없으면, 눈이 없으면 일을 하지 못해 굶어 죽고 말아요. 지팡이를 짚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요. 그래서 제가 할아버지께 말을 건 거예요.>
아이의 대답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었다. 허울뿐이긴 하지만, 헤이딘은 별불꽃의 부가주 자리에 올라 있던 것이다. 그의 형이 다른 누구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치고는 영리하구나.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어제가 일곱 살 생일이었어요.>
따라서 그에게도 약간의 권위가 있었다.
전담 시종을 거느리고 애완동물을 들일 정도의 권위가.
<일단은 살려 주마. 하지만 지금보다도 더욱 똑똑해져야 할 게다.>
***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사정이 나아졌다오. 형님이 이렇게 찾아오지만 않으면 더 잘 지낼 것 같소.”
나트람은 헤이딘의 옆에서 시중을 드는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다른 하인들과 달리, 프릴 달린 드레스를 갖춰 입고 있었다. 재단사를 불러 따로 맞춘 것이었다.
덕분에 헤이딘이 어린 인간을 끼고 산다는 소문이 사교계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귀족 사회에서 모습을 감춘 별불꽃의 작은 주인. 그리고 그의 인간 애완동물. 호사가들이 좋아해 마지않는 주제였다.
“딤 나겔에게서 네 얘기를 듣고 오는 길이야. 가문이 웃음거리가 됐다.”
“형님이 원하는 대로 허튼 생각은 그만뒀소. 그냥 이 아이와 살다가 죽을 마음뿐인데, 이젠 또 다른 문제로 나를 괴롭히는군.”
혀를 찬 나트람은 다시 소녀를 보았다. 검지에 걸린 반지가 눈길을 끌었다. 나무를 서투르게 깎은 것이었다. 그는 아이의 손목을 잡아챘다.
“드레스와는 어울리지 않는구나. 누가 네게 이걸 끼워 주었느냐? 저 병신 놈이? 아니면 본관의 하인이?”
“아녜요, 큰 어르신. 제가 직접 깎은 거예요.”
“반지를 만든답시고 대장장이를 부르지 않은 건 칭찬해 주마. 그랬다가는 타마기스의 시체들마저도 우릴 비웃었을 테니.”
“죄송합니다, 큰 어르신. 가문에 폐가 될 일은 하지 않을게요.”
소녀의 작고 하얀 얼굴 속에서 검은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해묵은 기억이 나트람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헤이딘에게 눈이 남아 있던 시절에 그는 자신의 형을 그런 식으로 쳐다보곤 했다.
“나는 네 주인의 손발을 자르고 눈을 파냈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더구나. 그런데 지금 보니 너도 주인과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지 않으냐.”
“형님, 그만두시오. 괴롭히는 건 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소.”
헤이딘이 다급히 외쳤다. 나트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의 검지를 쥐었다.
“자, 어린 인간아. 너는 어떨지 한번 보자.”
손에 힘을 주자마자 눈물이 소녀의 뺨을 적셨다. 나트람은 만족감과 함께 차오르는 안도를 느꼈다. 눈빛이 닮았다고 느낀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여기에 있는 것은 정신이 썩어 빠진 노인과 나약한 애완동물이었다.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됐다. 그렇게만 살아 있거라.”
나트람은 몸을 돌려 별채를 나섰다. 그가 창문 너머로도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울음소리가 멎었다. 아이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은 다음 커튼을 쳤다.
“괜찮으냐?”
헤이딘은 걱정스레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도 참, 다 들으셨잖아요. 제가 우는 걸 보니까 바로 멈추던데요.”
아이가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이딘의 입가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손은 중요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매일 하시는 얘기잖아요. 항상 하시는 말씀이 또 뭐가 있더라? 제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마력이 부족해서 아쉽다고?”
헤이딘은 아이를 자신의 시종으로 삼았고, 벨레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와그다스의 지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기대보다도 훨씬 영리한 소녀였다. 종이도, 펜도 없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각인의 원리를 깨우쳤다.
“네가 요정이었더라면 추적대에도 어렵잖게 들어갔을 게다. 내 밑에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훌륭한 삶을 살았겠지.”
“그래 봤자 저 늙은이 같은 놈이나 됐겠죠. 전 지금이 좋아요. 게다가 곧 있으면 도망갈 수 있을 텐데요.”
벨레다는 자신의 오른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10년간 만들어온 반지는 이제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헤이딘이 각인 회로를 설계하고, 벨레다는 그걸 현실로 옮기는 식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완벽히 작동하던 각인들은 실제로 새겨지는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서야 반지 하나에 열세 개의 서로 다른 주문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볼품없는 나무 고리일 뿐이었다.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었다. 마력을 불어넣고 각인을 가동시키는 단계가.
“남은 일들을 말해 보거라.”
벨레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이걸 끼고 스승님을··· 죽여야 해요. 그러면 영혼이 반지로 옮겨지고, 저는 그 마력을 빌릴 수 있죠. 환술을 쓸 수만 있다면 야스와다를 떠나는 건 쉬울 거예요. 요정들은 저를 멍청한 애완동물로만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슈문의 성소를 찾아 서약을 마치거라. 그분은 지식을 찾는 모든 존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인간일지라도 예외는 아니야.”
나트람의 패배였다. 스승은 야스와다에서 죽을지라도 제자는 황무지에서 남은 연구를 이어갈 것이었다.
헤이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내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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