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노예 여왕
데라듄 상단의 주인, 몬도 데라듄은 꽤나 잘 해 오고 있었다. 대부분은 그 자신의 수완 덕분이었다. 노예 시장의 기술자와 거래를 튼 다음 솜씨 좋고 양심이 부족한 연금술사도 찾아냈다. 망각의 물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연금술사는 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혔다.
허공에서 돈이 쏟아졌다. 좋은 시기였다.
“다른 거래처를 알아볼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는걸요. 상단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것도 꽤나 귀찮답니다.”
“불상사에 대해서는 미안하네. 부디 기다려 주게나. 다른 연금술사를 찾아보고 있으니.”
···어제까지는 좋았다. 오늘 아침이 되자마자 나쁜 소식들이 밀어닥쳤다. 샤히드 울프가 죽었다는 것. 물약들은 모두 박살이 난데다가 호위 셋도 잃었다는 것. 수레까지 망가졌다는 것.
늪지대를 지나오다가 순찰을 돌던 용기수에게 걸렸다고 했다. 용 비늘은 데라듄도 확인했다. 테빈을 탓할 수는 없었다. 정신이 나간 놈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해서 나아질 일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당신네 담당자를 데려온 게 용병이라면서요?”
“전사 하나와 그 시종이라더군. 지금은 우리 숙소에 가둬 놓고 있다네.”
“일단 담당자를 불러요. 변명부터 들어 보죠.”
그녀는 명령하듯 고개를 까닥였다. 몬도의 두터운 손가락이 탁자 위에 놓인 종으로 향했다. 종이 두 번 울리자 문 바깥에 서 있던 급사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테빈을 불러와. 그 자식, 지금은 좀 말이 통해? 멀쩡해졌어?”
“너무 멀쩡해서 문제입니다. 의자에 꼿꼿이 앉아서 네 살짜리 어린애처럼 웃고 있다더군요. 누가 말을 걸면 아주 정중하게 대답해 준다던데요.”
“젠장, 그건 멀쩡한 게 아니야. 미친 거지. 진짜 멀쩡한 놈들은 이런 일이 터지면 벌벌 떤다고. 아예 도망을 가거나.”
몬도는 애꿎은 급사에게 으르렁거린 뒤 맞은편에 앉은 상대에게로 시선을 다시 옮겼다.
여자의 이름은 벨레다였고, 카스바 ‘시장’의 수석 노예 기술자였다.
벨레다는 열네 살 소녀보다도 키가 작았지만 작은 체구 때문에 얕잡혀 보인 적은 없었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의 정신을 손쉽게 부숴 놓았으며 자신의 작업 과정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다.
온갖 소문이 호기심을 먹고 자라났다. 누군가는 벨레다가 정체를 숨긴 요정이라 주장했다. 그녀가 사실은 시장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홍보물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하나였다. 벨레다는 중요한 고객이었고, 그녀를 놓친다면 상단의 입지도 함께 흔들렸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짧은 기다림 끝에 집사가 테빈을 끌고 들어왔다. 얼굴에는 멍청한 웃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부하 셋을 잃은 놈이 지을 표정은 아니었다.
“확실히 멀쩡해 보이진 않네요. 질문은 내가 하겠어요.”
“그러게나.”
벨레다는 고개를 돌려 테빈을 바라보았다.
“거두절미하고 묻자. 널 여기까지 호위한 두 명이 누구지?”
“전사 하나와 그의 시종입니다.”
“자세하게 설명해 봐.”
“전사는 건장한 청년이고, 시종은 쥐새끼처럼 얍삽하게 생겼습니다.”
“더 할 말은 없어? 시종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말이야.”
“저는 모릅니다.”
부자연스러울 만큼 정확한 발음이었다. 벨레다는 새된 웃음을 터뜨리더니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 시종은 마법을 쓸 줄 알지? 사실대로 말해.”
그녀는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순간, 테빈의 표정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한동안 우물쭈물하더니 똑같은 대답을 내어놓았다.
“저는, 저는··· 모릅니다.”
벨레다는 즐거운 듯 몬도를 돌아보았다.
“자리를 비워 줘요.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네요.”
몬도는 서둘러 방을 떠났다. 벨레다는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테빈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테빈,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 알아?”
“예! 노예 여왕이라는 별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오른팔로 상대의 목덜미를 감싸 안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람들은 나를 무서워하지. 내 작업실에서 무언가 사악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어. 하지만 아니야. 노예들은 기쁨과 열정 속에서 작업실을 떠나 시장으로 걸어가거든. 내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어차피 카스바에는 노예 기술자가 필요하고, 내가 아니라면 다른 이들이 그 역할을 맡겠지. 공포와 절망 말고는 아무것도 다루지 못하는 머저리들이. 나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거야······.”
반지에서 새어 나온 보랏빛 기운이 테빈의 목을 타고 기어올랐다. 벨레다는 테빈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팔을 거뒀다. 남자가 바람을 잃은 풍선 인형처럼 무너졌다.
“···그리고 이게 바로 당신의 행복이지. 지금은 얼이 빠져 있을 뿐이지만, 제물의 힘이 다하는 순간부터 헛것을 보게 될 거야. 그러다가 완전히 미쳐 버리고. 자, 그러면 이런 끔찍한 주문을 쓴 게 대체 누구일까?”
이윽고 벨레다는 테빈의 가슴 주머니에서 작고 따뜻한 살덩어리를 찾아냈다. 잿빛 생쥐였다. 그녀는 털에 파묻힌 검고 동그란 눈을 들여다보았고,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다시 예의를 차릴 때가 왔네요. 난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아요. 몬도에게 당신들을 풀어 달라고 할게요. 우리 쪽에서 사람이 갈 거예요.”
순간, 벨레다의 두 눈이 고양잇과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리고 착각하진 말아요. 나는 요정들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 안에서 작고 숨 가쁜 찍찍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이내 손목을 따라 핏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생쥐의 시체를 테빈의 가슴팍에 던져 버린 뒤,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반지를 닦는 손길에는 기묘할 정도의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
제국은 망했지만 오랜 전통은 남았다. 야스와다의 귀족들은 만찬에 인간 통구이를 올리는 게 좋은 풍습이라고 믿었다. 아마도 열등감 때문에. 노예들에게 밀려나서 대륙 끄트머리에 처박힌 판이었다. 인간을 상대로 자존심을 세울 방법은 그게 유일했다.
벨레다는 통구이의 재료로 팔려갔지만 다행히도 살아남았다. 부엌에서 도망쳐 나왔다가 귀족 어르신의 눈에 띈 것이다. 그는 소녀를 애완동물로 삼고 금지된 주문을 몰래 가르치기 시작했다.
소녀의 그릇이 깊은 마법을 담기에는 턱없이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도 주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반지에 넣은 뒤 그것을 벨레다에게 선물로 남겼다. 그녀가 반지의 힘을 빌려서라도 야스와다를 떠날 수 있도록.
그렇게 벨레다는 자신의 고향으로, 카스바의 시장으로 돌아왔다. 상품이 아니라 노예 기술자로서. 모두가 그녀의 출신을 궁금해하지만 벨레다는 침묵을 지킨다. 그 침묵 속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고아 소녀를 읽어 낼 사람은 아주 적다.
***
“아, 귀여운 아이였는데!”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생쥐가 죽었어요. 데려온 보람이 있었는데 아쉽게 됐습니다.”
“한 마리 더 구해. 당장 여기에도 수십 마리는 득실거리겠구만.”
란드와르는 짜증스레 주위를 훑어보았다. 침대에 한 명이 눕고 바닥에 한 명이 앉으면 가득차는 방이었다. 벽은 온갖 얼룩으로 너저분한데다 창문도 없었다. 17만 원짜리 고시원 생각이 났다. 심지어 그 고시원 방에 둘이 갇힌 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카두에서 며칠쯤 더 지내는 게 좋을 뻔했다. 일찍 온다고 보너스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시간은 충분히 단축했는데. 괜히 부지런하게 살았다가 손해만 보고 있었다.
“방이 쓰레기야. 이런 곳에 두 명 넣는 거 불법인데.”
“동료가 죽었는데 숙소로 불평을 하시다니요. 나으리는 참 정도 없으십니다.”
짐짓 투덜거린 테네브로즈는 생쥐를 통해 보고 들은 것을 전했다. 키가 작고 머리가 새까만 여자가 관심을 표했다는 것. 행동으로 보아서는 야스와다에 연이 있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기타 등등.
“오른손에 반지를 끼고 있진 않았고?”
“아, 맞습니다. 아시는 분입니까?”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벨레다가 바로 노예 시장 시나리오의 보스였으니까.
데라듄 상단의 도장을 보고 승부수를 던졌는데 정확히 맞아들었다. 일반적인 루트라면 얼굴을 보는 것부터가 문제인 반면 지금은 저쪽에서 먼저 접근해 오고 있었다.
시나리오의 보상은 두 가지. 방어 전담 동료와 마법사용 반지. 일반적인 마법사에게는 평범한 마력 증폭구에 불과하지만, 테네브로즈에게는 코어급 장비였다. 영혼을 저장하는 기능 덕분.
제작자는 당연하게도 야스와다의 요정이다.
“야스와다에 별불꽃이라는 가문이 있지? 거기에서 인간 애완동물이 도망간 적이 있을 텐데. 주인은 죽고.”
“기억이 납니다. 가문의 수치라면서 무덤도 만들어 주지 않고 정원 비료로 썼다던데요. 원래부터 취급이 안 좋았어요. 그 집안 큰 어르신한테는 눈 밖에 나 있었죠. 그럴 만도 했습니다.”
테네브로즈는 신난 듯 험담을 늘어놓다가 뚝 멈췄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한참은 지난 일인데요.”
“쥐 죽인 여자가 걔야. 애완동물.”
헤이딘은 금지된 마법을 연구하던 놈이었는데, 그건 요점이 아니었다. 그놈이 반지에 자기 영혼을 담은 다음 애완동물한테 선물했다는 게 중요했다. 벨레다가 헤이딘의 마력을 모두 물려받았단 소리다. 그 덕분에 노예 기술자도 된 것이고.
“그렇습니까? 용케도 살았군요. 가다가 괴수들한테 잡아먹혔을 줄 알았는데요.”
“그래서 묻는 건데, 야스와다에서 저 애랑 엮인 적 있냐.”
게임상의 전개는 누굴 동료로 데려가든 간에 똑같았다. 벨레다를 혼자서 만나든, 이놈과 함께 만나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튜토리얼에서부터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판이었다. 숨겨진 사연쯤은 상수로 둬야 했다.
“애완동물 쪽은 아예 얼굴도 몰랐고, 주인만 몇 번 보았습니다. 친하진 않았어요. 애완동물을 끼고 노느라 집 바깥으로는 절대 안 나오는 늙은이였거든요. 연이 있다고 치면 큰 어르신 쪽에 있을 겁니다.”
“무슨 사이인데.”
“나트람 영감이, 그러니까 헤이딘의 친형이 3교구 제사장이었거든요. 별불꽃의 가주였고요. 동생 쪽과는 달리 야망도 많고 직함도 넘쳐나는 늙은이였답니다.”
그 순간 게임의 인트로 컷신이 란드와르의 눈앞을 스쳤다. 테네브로즈는 3교구의 부제사장이었다. 그리고 3교구에 있던 요정들은 모두 죽었다.
“야, 그거 니가 죽였잖아. 이거 말 맞춰 둬야 하는 거 아니야?”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바로 올해 초에 더 높은 곳으로 가셨거든요. 꼭 죽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어요.”
“또 왜. 3교구에 있던 것들만 청소하면 됐지 간 사람한테는 왜 그래.”
“제가 한때는 나트람의 충견 소리를 듣고 다녔답니다. 제사장님이 시키는 거라면 뭐든지 했지요. 덕분에 부제사장 자리를 따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란드와르는 잠시 굳어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옛 상사를 죽일 생각이나 하고 있는 놈에게 충견은 과분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제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을 테고, 그래서 지하 감옥까지 굴러 떨어진 것이겠지만······.
“이야, 우리 사제가 출세하는 법을 아네. 은인 아니냐?”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높으신 분이 되더니 저를 치우려 하지 뭡니까. 아는 게··· 쓸데없이 많다더군요.”
정석적인 토사구팽이었다. 란드와르는 여전히, 테네브로즈가 배신을 택한 이유보다는 그가 누군가의 개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하나만 더 묻자. 너 그 나트람인가 뭔가 하는 애 아래에서는 잘 지냈어? 말도 잘 듣고? 욕 안 먹고?”
“말은 잘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했지요. 그런데 만족을 모르시더군요. 시킨 것만 끝냈더니 이건 왜 안 했냐, 일부러 빼먹었냐 하면서 길길이 날뛴 게 수십 번입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요구 사항에 넣을 일이지 다 끝나고서야 화를 냅니까?”
다른 누군가가 한 말이었더라면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나사가 하나 빠진 녀석이 이러니 수상쩍었다. 뭔가를 시키면 질문이 먼저 나오는 놈이었다. 원소학을 배우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했다.
‘제가, 왜요?’
그랬다. 개에도 종류가 있는 법이었다.
그는 비글이 지랄견의 대명사라는 사실을 떠올렸고, 테네브로즈의 옛 상사를 위해 애도했다. 물론 아주 조금만. 만나면 죽여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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