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8화 (19/258)

18화: 세카두로 돌아가는 길

열기를 머금은 공기는 습했다. 갖가지 냄새가 그 속에서 썩어 갔다. 피와 고름, 독성 구름의 흔적. 물의 온도는 아무렴 좋으니 목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타마기스 수비병이 쫓아올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물이 없어서.

늪지대의 암청색 구덩이에 몸을 담그고 싶진 않았다. 깨끗한 물이 나올 곳은 테빈의 수통뿐이었다. 일정 시간마다 물이 가득 채워지도록 주문이 각인된 물건. 긴 여행에서 식수를 수급하기엔 적당했지만 몸을 씻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사제야, 원소학 아직 안 배웠지? 돌아가면 책 줄 테니까 입문만 익혀라.”

“제가 왜요?”

“물이 없잖아. 저놈은 대지 계열이고.”

“그러니까, 제가, 왜요?”

테네브로즈는 어린아이라도 대하듯 각 어절을 끊어 발음했다. 란드와르는 이게 무슨 종류의 질문인지 가늠하느라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해가 너무 뜨거워서 미쳐 버렸나?

“제 몫은 충분히 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도 야스와다의 주문이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을 문제를 맞닥뜨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수도관이 필요하시다면 인간 마법사를 찾아보시는 게 어떤가 합니다.”

말은 길지만 뜻은 결국 하나였다. 나는 할 일 다 하고 있는데 뭘 또 시키냐?

란드와르도 적절한 업무 분장의 중요성을 알았다. 웹 디자이너에게 서버 개발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물을 만들어 내는 주문 자체는 그 정도로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걸 원하는 각도와 온도와 세기로 발사하는 게 어려울 뿐이지.

“내가 연구를 하라고 했냐, 뭘 했냐. 속성 기초만 익히라는 거 아니냐. 어차피 계속 이럴 텐데 좀 배워. 저번에도 그랬잖아.”

“예전에 살짝 본 적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인간 마법은 재미가 없단 말입니다.”

태블릿으로 UI를 툭툭 두드리던 시절이 그리웠다. 마법서를 구한다. 동료창을 연다. 마법사한테 먹인다. 모아 둔 포인트를 적절히 투자한다. 끝.

란드와르는 빙긋 웃으면서 요정을 돌아보았다.

“우리 사제가 재미가 없었구나. 그러면 내가 할까?”

“나으리께서 마법을 배우신다고요?”

“개 같은 질문 하지 말고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라. 내가 할까?”

테네브로즈가 눈동자를 굴렸다. 최소한의 눈치는 남아 있었는지 곧바로 고개가 떨어졌다.

“제가 죄송합니다. 세카두 가면 바로 배우겠습니다.”

***

열 시간이 꼬박 걸려 대평원으로 돌아왔다. 10㎞를 걷는 데에 두어 시간쯤이 걸리니까 많아 봐야 50㎞를 걸은 셈이었다.

숫자로 따져 보니 시시했다. 중간에 쉬어 가기도 했고, 땅이 물러서 걸음이 느려지기도 했으니까 실제로는 더 적겠지. 수레를 늪지대 초입에서 해 먹은 게 다행이었다.

50㎞. 고속도로만 잘 타면 30분밖에는 안 걸리는 거리. 운이 나빠서 고라니를 박고 보닛이 우그러져도 카센터만 부르면 된다. 란드와르는 문명의 이기를 부러워하다가 천사를 호출했다.

카센터는 없지만 다행히도 콜택시가 있었다.

“그 사제들, 아직 세카두에 있습니까?”

티아의 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손에는 서류철을 쥔 모습이었다.

“이제 막 출발했네요. 예상시간 하루 약간 넘게 잡히고요, 최적경로로만 계산한 거니까 거기에서 더 늘어날 수도 있어요.”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교단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거점 도시뿐만 아니라 오지에서도. 신탁을 내리기만 하면 정보사 요원들이 수레를 끌고 달려왔다.

“이거 하면 신앙심은 얼마 남는다더라. 남긴 남아요?”

“그냥 없다고 보면 돼요. 기본적으로 수급되는 양은 일반 행정이랑 화신 유지에 다 들어가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 좋은 기능에도 제약은 있었다. 인간의 신들은 직접적으로 하계에 간섭할 수 없는 탓이었다. 보통은 세 가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첫째, 신도들에게 힘을 빌려주고 신앙심을 얻는다.

둘째, 신앙심을 소모해서 기적을 일으키거나 신탁을 내린다.

셋째, 신탁을 내리면 사제들이 그대로 한다.

평소라면 수레를 보내라는 신탁쯤은 펑펑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화신이 하계에 내려와 있는 상황. 아즈리온이 직접 굴리는 게 아닐지라도, 화신은 존재 자체로 신앙심을 잡아먹었다.

함부로 신탁을 썼다가는 신앙심 관리가 안 돼서 일이 꼬일 수도 있었다.

“초반에는 좀 아끼려 했는데 잘 안 되네요.”

“그래도 로안이 있어서 충전이 빨라요. 그런 아이들을 좀 더 만나셔야겠는데요.”

“광신도 특성을 모아 두란 얘기죠?”

실제로 동료에게 광신도 특성을 붙여 두면 플레이가 편했다. 신앙심 보너스도 많이 챙겨주는데다가 돌발 행동도 없어졌으니까. 하지만 그런 놈들을 옆에 둘 자신이 없었다. 로안 하나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했다.

“굳이 동료로 데리고 다닐 필요는 없는 거 아시잖아요. 신앙심 수집은 신도 전체가 대상이니까.”

“생각 읽는 건 알겠는데, 아닌 척이라도 좀 합시다.”

“미안해요. 대화는 여기에서 마치죠.”

티아의 환영이 도망치듯 사라졌다. 란드와르는 짜증을 가라앉히고서는 옆을 힐끔 보았다. 마법사 두 놈이 드러누워 있었다.

테빈은 어차피 정신지배가 걸려 있고, 테네브로즈는 티아와 대화하는 모습을 몇 번 봤으니 굳이 감추진 않았다. 애초에 잠기운에 빠져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은 듯했다.

순간 놈들이 마법사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야, 깨어 있냐? 걸을 수 있어?”

테네브로즈가 일어나진 않고 졸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쉬지 않고 더 가실 생각입니까? 신탁을 내릴 거라고 하신 기억이 나는데요.”

“아니, 골골거리는 놈 데리고 카스바 가기 뭐하니까 그런다. 나는 괜찮은데 너 몸살이라도 나면 세카두에서 며칠 쉬고 가자고. 치유사 부른다고 해서 피로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인간들은 우리를 약골 마법사로만 보더군요. 천계에 계신 분들도 예외는 아닌 모양입니다.”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 체력 좋냐? 진짜 안 피곤해?”

“힘과 끈기는 다릅니다. 황무지를 열흘 내내 걷기도 했어요. 온갖 곳을 다녀왔지요. 저승도 살짝 봤고요······.”

“그렇단 말이지.”

란드와르는 카스바로 가기 전에 처리할 것들을 떠올렸다.

일단 마법서를 하나 구해달라고 하자. 용 비늘도 교단에 맡기고, 테빈의 부하까지 어떻게든 처분해야 했다. 교단에 박아 뒀던 놈 말이다. 녀석을 카스바로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까.

수도원에 집어넣으면 되겠다는 계산이 섰다. 무법도시 용역이 수도사 생활에 쉽게 적응할 것 같진 않지만, 좋은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갱생의 기회가 아닌가.

세카두에서의 일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이후의 전개는 일단 카스바에 가 봐야 알 수 있었다. 으슥한 술집의 창고로 들어가서 데라듄 상단의 징표를 보여 주고 차원문을 타는 것이다. 그리고 여차저차.

“돌아가서 파르타 본 다음, 하루 자고 바로 이동하자. 너도 동의한 거다.”

란드와르는 생각을 매듭짓고서는 외쳤다.

***

파르타를 만나자마자 모든 게 빠르게 해결됐다.

하급 사제가 시내에서 원소학파 마법서를 사 왔다. 용 비늘은 증거로 쓸 것만 빼두고 교단에 넘겼다. 재료를 다룰 수 있는 장인을 찾아보도록. 테빈의 부하도 수도원에 맡겼다.

마지막 부탁은 독한 술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귀할 필요는 없으니 독하기만 하면 된다고.

<저번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담배랑 마찬가지에요. 약한 독성에는 면역이 있습니다.>

티아가 귓가에 대고 그 말을 읊었다. 란드와르는 생각했다. 씨발, 혹시 모르니까 시험해 보겠다는 거 아닙니까. 욕은 미안합니다.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서요······.

위스키 병이 그의 앞에서 짙은 호박색으로 빛났다. 뚜껑을 비틀어 따면서 파르타에게 들은 명세를 떠올렸다. 글렌모데아 30년. 마스터 블렌더의 이름은 더 브라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역시나 나무 냄새 나는 물이었다. 함께 마시면 도움이 될까 싶어 담배 연기를 입안에 머금고 술을 들이켰지만 여전히 효과가 없었다. 외면하던 허탈감이 밀려왔다.

란드와르는 잠시 멈추고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따져 보았다. 정원에 주저앉아서, 담배를 뻑뻑 피면서, 위스키를 병째로 따고 있는 젊은이. 그것도 대낮에. 날건달이 따로 없었다.

“나으리, 연초는 몸에 안 좋습니다. 술이랑 마시면 몸을 망칩니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테네브로즈까지 잔소리를 얹었다. 판타지 세상에서, 그것도 요정에게 이런 말을 듣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너 그런 거 따지냐?”

“저는 술도 안 마시고 연초도 안 합니다. 만찬에도 안 갔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밤을 새게 되거든요. 건강에는 규칙적인 생활이 필수입니다.”

인신 공양이나 하는 놈에게 건강 조언을 듣고 싶진 않았다. 자신도 한패였지만. 란드와르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테빈을 보았다. 얼굴에 헤실헤실 웃음을 짓고 있었다.

쥐처럼 작은 동물들은 행동을 쉽게 제어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게 안 된다고 했다. 바로 옆에서, 직접 조종할 게 아니라면 교육을 해야 한다고.

“지금 하는 교육이란 거, 얼마나 걸려?”

“완벽하게 하려면 끝도 없고, 대강 하려면 지금 당장도 끝나지요. 지켜야 할 비밀들을 알려 주는 중입니다. 나으리께서 혼자서 용을 잡았다고, 그리고 시종은 사실 요정이라고 주절대면 얼마나 곤란하겠습니까.”

늪지대에서 잠깐 갈구긴 했지만 자기 일은 잘 하는 놈이었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가 각본을 읊는 모습을 잠시 보다가 낯선 질문을 하나 떠올렸다.

카스바에 취직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 다음에 저놈은 어떻게 되지? 계속 저 상태로 살아가는 건가?

게임 시스템을 복기해 보았지만 마땅한 답이 없었다. 모두 쓸모가 다하면 죽인 탓이었다. 아군한테 정신지배를 시전하진 않으니까.

그가 아는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지속시간이 제물의 격에 비례한다는 것.

“저거, 카스바 가면 어떻게 되냐? 주문 풀리면 어떻게 돼?”

“글쎄요, 저도 그런 경험은 없어서요. 풀리기 전에 처분해야죠. 매일같이 술이나 진탕 퍼먹게 하면 알아서 죽지 않겠습니까.”

“흠.”

란드와르는 남은 술을 마저 들이켰다.

술에서는 무화과 꽃향기가 났고 기분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애도는 남은 자의 몫임을 알았지만 그 의무는 늪지대에서 마쳤다고 생각했다. 동료도, 조력자도 아닌 불량배들에게 더 마음을 쏟았다가는 심장에 빈자리가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자신은 카스바로 간다. 가서 노예 시장의 사람들과 얼굴을 맞댈 것이다. 다시 시나리오가 시작된다. 또 다른 사건이 시작된다. 그리고 또 다른 죽음이······.

강현은 거기에서 얻을 전리품이 목숨만큼은 가치 있길 빌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