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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7화 (18/258)

17화: 불한당과 같은 수레를 타는 법

수레 짐칸 위에 앉아 용기수를 기다린 지도 몇 시간이 흘렀다. 피 냄새를 너무 오래 맡은 나머지 깨끗한 공기가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이제는 긴가민가했다. 다행히도 인간의 피는 아니었다.

다행인가?

란드와르는 심란한 표정으로 피범벅이 된 망치를 내려다보았다. 게임을 시작할 때 받은 그 무기였다. 설명을 붙여 보자면 대강 이렇다. 공격력 아주 높음. 천계의 물건이라 어디서든 넣었다 빼낼 수 있음. 모든 종류의 고기를 다지기에 적합함. 특히 요정 고기.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요정보다는 멧돼지 괴수를 다지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망치 바로 뒤편에는 거대한 심장이 놓여 있었다. 괴수에게서 떼어 낸 것이었다. 반나절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펄떡거리면서 선혈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눕고 싶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코를 씻고 싶었다. 뭐가 어쨌든 간에 빨리 이 흉물을 처리하고 싶었다.

“소식이 영 없는데. 이러다가 수비대 만나는 거 아니냐?”

“뭐든 괜찮지 않겠습니까? 다 같은 용인데요.”

“순찰병이랑 수비대를 함께 맞닥뜨릴 가능성을 걱정하는 거야. 용을 둘씩이나 상대할 수는 없다고.”

늪지대 한복판에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용기수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마법진 재료로 쓸 심장을 구한 뒤 아예 성벽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순찰병의 귀환 경로와 겹치도록. 하지만 수비대의 주의를 끌진 않을 정도로 멀리.

다행히도 테네브로즈가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

“글쎄요, 수비대의 기강은 좋은 편이 아닙니다. 온종일 도박판이나 벌이다가 돌아가는 게 다예요. 사실 그렇지요, 어느 미치광이가 감히 이 땅에 들어오겠습니까? 순찰을 도는 이유도, 잡아가서 시체들의 머릿수를 늘리기 위해서지 침입자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랍니다.”

“꼭 직접 본 것처럼 말하는구만.”

“직접 봤는데요.”

옛 신을 깨우기 위해서는 요정 도시 전체에 흩어진 성물이 필요했다. 늪지대의 부패자 세력이 그중 둘을 가지고 있었다.

야스와다 2교구에서 특임조를 파견했다. 일부러 순찰병에게 붙잡혀 가는 방식으로 타마기스에 잠입한 뒤, 황실 금고에서 성물을 빼돌리는 것이다.

“하나는 회수했지만 다른 하나는 두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순찰 반경이 넓어졌죠. 이제 놈들도 야스와다 요정을 붙잡으면 데려가기 전에 바로 죽인다더군요.”

란드와르는 잠시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이 일에 회수라는 단어를 쓰는 게 적절한 일인가 싶었다. 도둑질이 더 적합한 설명 같았다.

타마기스 요정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천 년간 떨어져 지내던 친척이 갑자기 나타나서 황실의 보물을 훔쳐간 것이다.

“결국 니들이 잘못한 거 아니냐.”

“제국의 정통성은 야스와다에 있는데요. 우리 물건을 가져온 겁니다.”

망한 집구석에서 유산 가지고 다투는 꼬라지를 보는 듯했다. 란드와르는 잠시 요정 도시 사이의 관계도를 되짚어 보았다.

일단 여섯 곳 중에서 셋이 폐허가 됐다. 남은 셋도 상태가 좋진 않았다. 수도인 타마기스는 좀비랜드가 됐다. 와그다스는 전쟁 초반에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갔다. 도망가서 거지꼴로 살고 있었다.

그나마 제일 멀쩡한 곳이 야스와다였다. 그나마.

“그냥 대충 살면 안 돼? 다함께 망한 동네에서 정통성 따질 거 없잖아.”

“망했으니 정통성을 따지는 것이지요. 제국의 귀족들은 한때 이런 문제로 다퉜습니다. 황금과 보석에 대해서, 마력 지맥의 소유권에 대해서, 늑대인간 노예 50마리에 대해서··· 그런데 이제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과연 반박할 수 없는 논리였다. 그래서인지 짜증이 훅 올라왔다. 란드와르는 자신이 요정 도시들의 사정을 헤아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니들이 그거 훔쳐 와서 내가 이 꼴 난 거잖아. 옛 신이니 뭐니 부활시킨다고 지랄하다가.

“근데 특임조 보낸 곳이 2교구라면서. 넌 왜 갔냐. 너 3교구 부제사장이잖아.”

“재밌어 보여서 같이 갔죠. 즐거웠습니다.”

란드와르는 심호흡했다. 테네브로즈는 죄가 없었다. 그냥 이놈은 머리에 문제가 있는 요정이고, 예전에도 그랬을 뿐이다. 짜증을 내는 건 화풀이에 불과하다. 좋은 생각을 하자. 좋은 생각을······.

“아, 잡담을 멈출 때가 됐군요!”

···머리가 멍해지려는 순간, 쾌활한 목소리가 귓전을 쳤다.

테네브로즈가 반가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 뒤편에서부터 검고 어두운 점이 차즘 크기를 키우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신이 확 돌아왔다. 란드와르는 눈대중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완전히 도착하기까지는 이삼 분쯤이 남은 듯했다.

“테빈까지 죽으면 안 돼.”

그는 주의 사항을 강조한 다음 망치를 움켜쥐었다. 긴장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럼요. 통행증을 끊어 줄 녀석은 살아 있어야지요.”

또박또박 대꾸한 테네브로즈는 눈을 감고 단검에 신경을 집중했다. 입속으로 오래된 주문을 웅얼거리자 어깨 양옆의 영혼 조각 두 개가 천천히 흩어지더니 살갗에 스며들었다. 자주색 기운이 혈관을 타고 흘러 내려가다가 손끝에서 멈췄다.

동시에 음산한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겁 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야스와다에서 온 벌레들이었구나!”

요정족 기수는 산성 구름을 소환하는 것으로 개전을 알렸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테네브로즈는 눈을 부릅뜨고서는 괴수의 심장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마력이 주입된 심장은 보랏빛으로 번뜩이면서 부풀었고, 바로 다음 순간 검게 쭈그러들었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붙잡고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동시에 날개뼈 사이를 잇는 막이 공기를 가르며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비늘과 근육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살덩어리가 수레의 짐칸과 격돌했다. 충돌음에 비하면 물약 병이 깨져 나가는 소리는 경쾌할 정도였다.

짐칸이 와지끈 부서지며 철골이 지렛대처럼 치솟았다. 날개가 꿰뚫린 용은 고통에 찬 포효와 함께 몸부림쳤다. 그 움직임은 기수의 썩어 가는 머리를 몸으로부터 분리시켰다.

“하찮은 재주를 부리는구나!”

요정족 기수는 양팔로 자신의 두개골을 움켜쥐었고, 익숙한 태도로 목뼈에 박아 넣었다. 그는 고삐를 흔들어 용을 진정시킨 다음 적수를 내려다보았다.

“영혼을 다루는 아이야, 타마기스가 제국의 수도였던 이유를 아느냐?”

“역병에게는 혼이 없기 때문이지요.”

공손하게 답한 테네브로즈는 오래된 경구를 떠올렸다.

― 이시 첼의 마수들은 썩어 문드러졌다. 역병에는 이시 타브가 먹어 치울 영혼이 없었으며 아 드지즈의 얼음조차 그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리하여 윰 시밀은 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용족 기수의 뱃속에서부터 소름끼치는 소리가 훅 올라왔다. 뒤틀린 웃음처럼 들렸다.

“그래, 어린 아이야. 만용이 바로 네 묘지가 될지니!”

하지만 이 요정족 기수는 윰 시밀이 아니었다. 목을 분리하는 것만으로는 죽지 않지만, 뼈를 곱게 빻으면 한 줌의 흙으로 변하는 망자에 불과했다.

테네브로즈는 란드와르를 바라보았고, 슬쩍 웃었다.

“제 일은 끝났습니다. 마무리는 나으리께서 하시지요.”

“오냐.”

망치를 움켜쥔 란드와르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용은 충격의 여파로부터 빠져나와 네 발을 땅에 딛고 있었다. 오른쪽 날개는 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너덜거리는 상태였다.

날아오르지만 않는다면, 용은 해볼 만한 상대였다.

***

기수의 두개골을 부순 뒤 용까지 때려눕히고서야 전투가 끝났다. 고름과 피 냄새가 코를 훅 때렸다. 시큼한 악취까지 더해졌다. 질병과 독 속성 특유의 지속 데미지야 재생의 반지로 버텼지만, 냄새는 방법이 없었다.

란드와르는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단검으로 용의 비늘을 긁어냈다. 역병 때문에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제작 재료는 일단 모아 두는 게 좋았다. 용을 만났다는 증거도 필요했다.

“정말 알뜰하게도 챙기십니다. 저는 숨이 막혀서 죽을 뻔했습니다만.”

“보호장 계속 쓰고 있으라고 했잖아.”

“저 혼자면 괜찮지요. 인간 놈까지 챙기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스스로 걷지도 못해서 독 웅덩이가 생길 때마다 제가 끌고 다녔지 뭡니까. 그럴 때마다 보호장도 새로 세워야 하고요.”

“바닥을 밟으면 안 되지.”

심드렁하니 대꾸한 란드와르는 테빈의 심정을 마음속에 그렸다. 양옆에 앉아 있던 부하가 갑자기 쓰러진데다가 용기수가 독을 펑펑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보면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그 지점에서 생각을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동정심은 좋지 않았다. 안 좋은데, 씨발, 그게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단어를 찾지 못한 생각 덩어리가 머릿속에서 쉼 없이 뭉글거렸다.

“오래 안 걸리지? 최대한 빨리 끝내고 평야로 돌아가야 돼.”

“그럼요. 제물까지 다 준비돼 있는데 늑장 부릴 게 뭐 있습니까.”

“빨리 처리해. 잠깐 쉬고 있을 테니까.”

비늘을 적당히 챙긴 란드와르는 넓고 평평한 바위를 찾아 걸터앉았다. 어제까지는 B급 슬래셔 영화 속에 있는 기분이었는데, 장르가 또 변했다. 40년대의 남부 고딕 영화 같다고나 할까.

시체 두 구가 암청색 땅 위에 누워 있었다. 편해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일어섰다. 망치를 꺼내 두긴 했지만 검도 곁에 있었다. 검신을 땅에 처박았다. 흙이 물러서 그런지 쉽게 들어갔다.

날이 상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삽질을 계속했다. 칼이야 파르타에게 달라고 하면 얼마든 다시 받을 수 있겠지만 테빈의 부하들은 여기에 묻지 않으면 영영 무덤이 없을 것이었다.

소리를 들었는지 테네브로즈가 홱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뭐 하고 계십니까?”

“무덤 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안해서.”

“나으리, 그거 병입니다, 정신병. 저는 그런 거 안 합니다. 일일이 생각하면 미칩니다.”

“알아. 아니까 이러는 거야.”

요정 놈의 말이 옳았다. 사람을 제물로 바쳐놓고 미안하다며 무덤을 파는 것은 정신병이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잊는 것 역시 정신병이라고 생각했다. 씨발, 내가 성격이 나쁘긴 해도 아예 개새끼는 아니었는데, 지킬 건 지키고 살았는데.

물론 이곳과 저곳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서의 살인은 엄청난 금기가 아니었다. 여건과 상황만 갖춰진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서는.

언젠가는 모든 종류의 죽음에 익숙해지겠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는 죄책감을 간직하고 싶었다. 자신이 78억 명의 현대인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었다.

란드와르는, 이강현은 계속 땅을 팠다. 퍼낸 흙을 어깨 너머로 던지고 다시 칼끝을 지면에 밀어 넣었다. 충분히 깊은 구덩이 두 곳이 생겼다. 하나씩을 뉘이고 흙을 메웠다. 땅을 가볍게 밟아 다진 후, 기도하듯이 손을 모았다.

떠오르는 기도문은 없었고 침묵은 길었다.

강현은 한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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