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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6화 (17/258)

16화: 불한당과 같은 수레를 타는 법

요정이 섬기던 신은 모두 여섯이며 제국 역시 여섯 개의 도시로 나뉘어 있었다. 도시 각각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타마기스, 바단, 야스와다, 와그다스, 나우파나, 가디스.

지금 남은 도시는 야스와다가 유일하지만 제국의 수도는 한때 타마기스였다.

신의 피를 물려받은 요정이 타마기스를 다스렸다. 그는 윰 시밀의 아들이자 반신이었고, 위대한 황제로서 제국을 통치했다. 오만과 탐욕에 굴복하기 전까지.

대전쟁 시기에 황제는 아버지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고 힘을 물려받았다. 그 순간, 역병의 저주가 영토를 휩쓸었다. 타마기스의 요정들은 걸어 다니는 시체로 변했고 자신의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저주는 그들이 다른 땅으로 도망치는 것마저도 막았다. 누군가는 죽음을 택했지만 누군가는 꿋꿋이 살아남았다.

끝없는 고통 속에서 그들은 역병을 불사의 축복으로 착각하는 법을 배웠고, 그러는 동안 요정과 인간 사이의 해묵은 원한은 차즘 사라졌다. 이제 북부 늪지대의 시체들은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다.

산 자들에게 부패의 은총을 베푸는 것이다.

***

“이봐, 인간들. 내 머리 근처에 보라색 조각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이지? 이게 바로 그대의 영혼이야. 혹시나 싶어서 미리 빼 뒀지. 가만히만 있으면 다시 넣어 줄 테니 걱정은 하지 말고. 우리 취직만 좀 도우면 돼.”

그 말을 할 때조차도 요정은 환술을 풀지 않았다. 테빈은 사기라고 생각했다. 고동색 머리의 애새끼. 얍삽하게 생긴데다가 칼도 못 들 정도로 빼빼 마른 놈. 미친 전사를 나으리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니는 놈.

그런 놈이 요정 마법사일 수는 없었다. 사기였다.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자업자득은 맞는 것 같습니다.”

부하가 퉁명스레 말을 받았다. 테빈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자업자득이라고 치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연금술사 소식을 안 듣고 지낸 거?”

“그것도 있고, 제가 경고한 것도 무시하셨고, 되도 않는 기습을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기타 등등 많습죠.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뼈나 부러질 걸 그랬습니다. 교단 수도원에 처박히는 게 여기보단 낫겠어요.”

부하의 대답에 테빈은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엔 모두가 자신의 업보였다. 그것도 20년쯤은 된.

노친네가 스승이랍시고 식사를 차려라, 청소를 해라 난리길래 머리통에 바위 화살을 꽂아 줬다. 그러고서는 카스바로 도망쳤다.

그곳에서도 삶은 순탄치 않았다. 겨우 취직한 곳에서는 게으름을 피우다가 쫓겨났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보니 늪지대 수송 담당 말고는 남은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 꼴이 났다.

후회는 많았다. 홧김에 스승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첫 직장에서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세카두 소식을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들었으면, 그래서 연금술사가 죽은 걸 진작 알았더라면 전사를 만날 일도 없었을 터였다.

테빈은 자신이 게으른데다 사악한 사람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되새겼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바까지 굴러 떨어진 마법사들은 대부분 그랬다.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산더미로 쌓여 있는데, 하필이면 자신만 이 꼴이 나는 건 너무한 일이 아닌가.

요정 마법사를 시종으로 부리는 광신도가 얼마나 있으려고?

그 미치광이한테 걸릴 확률은 또 얼마나 되고?

“인간인 척 하는 요정 마법사는, 그래. 있을 수도 있지. 카스바에도 숨어 다니는 놈들이 꽤 있다고 들었어. 광신도 사제도 많이 봤고. 아예 자기가 신인 줄 아는 놈은 처음이지만.”

부하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테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이상하잖아. 아즈리온 광신도들은 죄다 요정 혐오자라고. 요정 마법사도 인간을 쥐새끼로 봐. 그런데 둘이 어떻게 같이 다닐 수 있냐는 거야. 그것도 마법사가 저놈한테 깍듯이 예의를 차려. 이게 말이 돼? 소설도 이렇게 쓰면 안 된다니까?”

“말이 되면 뜯긴 영혼이라도 돌아온답니까? 제발 입 다물고 있어요.”

“모르겠어. 그런데 느낌이 와. 저놈들을 카스바에 들여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테빈은 곁눈질로 란드와르가 있는 곳을 힐끔거렸다.

“저건 재앙이야. 천재지변 같은 거라고. 저걸 카스바에 풀어놓으면 안 돼.”

“갑자기 없던 충성심이라도 생겼어요? 충격이 너무 커서 미쳤나?”

“아니. 카스바가 쓰레기 집하장인 건 사실이야. 나도 알아. 근데 쓰레기통에 굳이 불을 지를 필요는 없는 거잖아. 우리가 막아야 해.”

테빈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애써 강변했다.

“누가 보면 순교자인 줄 알겠습니다. 성인으로 추서해도 되겠어요.”

비아냥거린 부하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래도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돌아가자마자 사실대로 말해요. 우리 상단주가 비록 여자를 밝히고, 돈독이 올랐고, 사람 목숨을 날파리처럼 보는 놈이지만, 요정이랑 친하게 지낼 작자는 아니니까요.”

함구하고 있던 다른 부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테빈과 그의 부하들은 시선을 한 점에 모았고, 말없는 결의를 마쳤다. 그들은 저 2인조와 함께 카스바로 갈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통행증이 나오는 일은 단연 없으리라.

···나무둥치 뒤편을 맴돌던 생쥐가 비웃는 듯한 찍 소리를 냈다.

***

“생각해 보니까, 이게 영혼 파편을 떼어 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그렇잖아. 뭔 협박을 하든 간에 죽을 각오로 떠드는 놈은 못 막는다고.”

“걱정을 참 늦게도 하십니다. 그 저택에서 칼 들이밀 때부터 이미 꼬인 문제였어요.”

“아니, 그때까지는 대화의 여지가 있었지. 사실 쟤네들이 뭘 하든 카스바에만 가면 됐어. 저 유능하니까 한번 써 주십쇼, 하면 협상 시작이라고. 근데 대놓고 요정 마법 쓴 시점에서 선을 넘었다니까.”

카스바에서조차 요정과의 교류는 금기였다. 노예상 중 몇몇은 야스와다의 귀족들과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그 사실을 드러내진 않았다. 비록 테빈의 소속이 그쪽이더라도, 상단주가 요정을 받아들일 사람인지는 따져 봐야 알 일이었다.

게다가 테네브로즈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만에 하나 이야기가 흘러나가는 즉시 추적대가 따라붙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런 생각이 들거든. 너 아까 나랑 있을 때 뭐라고 했냐. 지금 테빈이 잡은 경로로 가면 용기수 만나게 된다고 했지? 부패자한테 순찰 걸린다고.”

늪지대는 요정 제국의 수도가 있던 곳. 지금은 부패자라 불리는 언데드 요정들이 옛 성터를 차지했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라고 해서 얕볼 수는 없다. 마법 실력은 여전한데다가 쉽게 죽지도 않으니까. 목이 떨어지는 것쯤은 장난으로 여기는 것들이다.

게다가 부패자 무리는 맹독용까지 길들이고 있었다. 늪지대의 난이도를 높이는 원인 중 하나였다. 용기수는 공중 유닛인데다가 등에는 역병술사가 타고 있어서 전사로서는 대처가 까다로웠다.

“그렇지요. 원래 그쪽까지는 순찰을 보내지 않았습니다만, 작년쯤부터 순찰 범위가 넓어졌거든요. 상단이 지금까지 문제가 없던 건 그냥 운이 좋아서일 확률이 큽니다. 아니면 인간 상인 따위는 너무 시시한 상대라 내버려 두었는지도 모르죠.”

“아니야. 그러면 안 돼. 무조건 용기수를 만나야 돼.”

인간 하나에게 정신지배를 걸기 위해서는 다섯 명 이상의 인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테빈과 그의 부하 둘뿐.

턱없이 부족했다.

“재고 계산을 때려 보자. 지금 인간 영혼 두 개를 쓸 수 있다, 그렇지? 테빈은 살려 둬야 되니까.”

“맞습니다.”

“용기수를 처치하면 용의 영혼 하나와 요정 영혼 하나가 나온다. 이것도 맞지.”

“예.”

짧게 대답한 테네브로즈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알겠다는 듯한 미소가 뒤이어 떠올랐다.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 같군요. 용의 영혼으로 정신지배를 걸어 본 적은 없거든요.”

계획은 대강 이랬다. 용을 잡는 데에 인간 영혼 두 개를 쓴다. 용의 영혼을 써서 테빈에게 정신지배를 건다. 물약을 다 깨 버린 다음 세카두로 돌아간다. 돌아가서 카스바행 차원문을 탄다.

상단주에게는 용을 만났다고 보고한다. 그래서 수레도 물약도 부하들도 다 잃었다고. 테빈만이 옆의 전사를 만나서 겨우 돌아왔다고.

씨발, 용이 죄다 부쉈다는데 지들이 어쩔 거야.

“그러면 일단 용 떨어트릴 준비부터 하자.”

용기수를 상대하려면 원거리 전담이 필수적이었다. 서리 화살이나 작살포로 날개를 부순 뒤, 용이 추락하면 그때부터 근접 공격수가 나서는 것이다.

비록 주력 마법이 정신 계열 주문이긴 했지만 테네브로즈도 그게 가능했다. 녀석은 혈마법 주문인 <피의 창>을 기본적으로 익히고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혈마법을 쓰겠군요.”

테네브로즈도 똑같은 생각을 떠올린 듯 그 말을 읊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아니, 넌 보호장 치고 뒤에 있어야 돼. 날개 찢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잖아. 그동안 테빈이 독성 구름에 죽으면 안 된다고.”

“그러면··· 용이 직접 내려오는 걸 원하십니까?”

“걔가 네 쪽으로 날아와서 수레에 갖다 박아야 돼. 내가 뭐 시키는지는 알지?”

“재료가 더 필요합니다만, 일단은 가능합니다.”

테네브로즈가 인간 두 명을 제물로 바쳐서 시전할 주문은 <타오르는 고통>. 효과는 두 가지다. 위협 수준 증가와 지속적인 데미지.

게임상에서는 어그로 문제 때문에 단독으로는 쓰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주의를 끌어야 할 때에는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맹독용에 타고 있는 요정 또한 죽이는 즉시 제물로 바칠 수 있었다. 전투 중에도 계속 자원이 수급되는 셈이다. 일단 기수만 처치하면 그 다음부터는 일이 한층 쉬워질 터.

“그나저나 나으리는 참 재미있는 분인 것 같습니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시동을 거냐.”

“아까 전까지는 영혼 조각을 떼어내는 것조차 싫어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분이 이제는 저 인간들을 제물로 쓸 계획을 늘어놓고 계시니 말입니다. 물론 나으리께서 살인을 꺼린다는 것은 직접 보아서 압니다만······.”

쓸데없이 맞는 말만 하는 새끼였다. 란드와르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현대인의 자아와 게이머의 자아를 아무리 구분할지라도, 결국엔 하나가 아닌가.

그랬다. 부하 둘을 제물로 바치고 테빈에게는 정신지배를 걸자며 계획을 짠 건 어쨌거나 이강현이었다. 씨발, 란드와르도 아니고, 이강현이 그랬다. 누가 보면 원래 세계에서도 연쇄살인쯤은 한 줄 알겠다.

그는 테네브로즈의 설득을 되새겼다.

자신은 선한 사람 셋을 살렸다. 그러니까 악당 셋쯤은 죽일 수도 있었다. 죽여서 제물로 바칠 수도 있었다. 그게 합리화인지 변명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는 게 중요했다.

“그냥 네 얘기 들으려고. 그게 맞는 거 같아.”

사사건건 죄책감을 느끼기에는 앞으로 죽일 놈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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