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불한당과 같은 수레를 타는 법
협상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뼈가 부러진 놈을 교단에 인계했고 란드와르는 테빈의 임시 동료가 되었다. 잠깐만, 문장을 뒤바꿔 보자. 테빈이 란드와르의 임시 동료가 되었다. 이 설명이 더 마음에 들었다.
란드와르는 두 팔로 난간을 감싼 채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해는 하늘 한가운데를 지나 서서히 가라앉는 중이고, 세상은 초록색 물감과 파란색 물감을 절반씩 발라 놓은 유채 캔버스 같다.
바람이 세차게 마주 불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여름 특유의 마른풀 냄새가 났다.
“열흘을 꼬박 이러고 다녀야 한다니 끔찍하군요. 제 영혼마저 덜걱거리는 느낌입니다.”
“멀미라도 하냐?”
“그건 아닙니다만, 덜컹거리는 수레 위에 타는 취미는 없단 말입니다. 차라리 걸어가는 게 낫겠어요.”
“그러려니 해라. 저놈들이랑 같이 있으면 얼마나 어색하겠냐.”
게다가 북부 늪지대에 비하면 세카두와 타일라프람 일대의 대평원은 휴양지나 마찬가지였다. 중대형 괴수들이 무리지어 다니긴 하지만 사람이 아예 살지 못할 곳은 아니었다. 실제로 도시와 가까운 곳에는 대규모 경작지가 몇 군데 있었다.
반면 늪지대는 도망자들조차 질겁하는 땅이었다. 그곳에 숨어 살 바에는 감옥이 낫다는 게 사람들의 중론. 오래전에 내려진 저주 때문이었다. 좀비 요정들과 맹독용 무리는 덤이다.
하루쯤을 더 달리면 늪지대 초입에 들어선다. 아무리 빨리 통과하더라도 네댓 날은 그곳에서 보내야 했다. 맹독용에게 잘못 붙들린다면 열흘은 더 걸릴지도 모른다.
란드와르는 그 전까지는 최대한 좋은 생각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
수레가 멈춘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문 뒤였다. 테빈과 부하들은 수레 곁에 간이 텐트를 세우고서는 모닥불을 붙였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일당은 불청객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렸다.
테네브로즈가 어느새 다가와서 지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르신들, 무슨 말씀 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뭐야?”
“지금 표시하신 경로가 잘못된 것 같아서요. 그렇게 갔다가는 용기수에게 잡힐 겁니다.”
뜻밖의 지적에 테빈은 가져온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늪지대를 가로지르는 경로가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상단은 지난 10년간 이 길을 사용했다. 그동안 맹독용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괴수를 걱정한다면 몰라도 터무니없는 지적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놈이. 저리 꺼져!”
테빈은 벌컥 화를 터뜨렸다. 저 미친 전사라면 몰라도 철없는 시종에게까지 예의를 차릴 마음은 없었다. 테네브로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서는 자신의 주인에게로 되돌아갔다.
란드와르는 자그마한 마법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새긴 것이었다. 혼란이 걸린 생쥐가 마법진 안쪽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잡아온 보람이 있구만.”
“쥐는 귀가 밝거든요. 크기도 작고요. 야스와다의 추적자들은 모두 이 짐승을 사랑한답니다.”
뱀이 마법진 바깥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혼란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테네브로즈는 압정을 찌르듯 단검으로 뱀의 머리를 바닥에 고정시켰다. 검은 피가 왈칵 터져 나오며 마법진의 골을 따라 흘렀다.
곧이어 그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요정족의 오래된 조가弔歌를 읊기 시작했다. 죽음을 위로하는 노래에는 곧잘 마법적인 힘이 깃들었으며 그중 몇몇은 주문으로도 쓰였다.
“꿰뚫는 눈을, 고민하던 심장을 가져오너라······.”
란드와르는 의식이 진행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제물을 요구하는 주문에는 이러한 의식이 필요했고, 게임에도 엇비슷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시전 시간 동안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 생물이나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문마다 요구 사항이 서로 달랐으니까. 정신지배를 걸기 위해서는 대상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격이 높은 영혼이 필요했다. 쥐에게는 작은 뱀이, 작은 뱀에게는 고양이가, 고양이에게는 늑대가.
그리고 인간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다섯 명 이상의 인간을, 혹은 요정 둘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란드와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이 가능성은 아직 계산에 넣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재료도 부족했다.
이윽고 노래가 멈추면서 피의 흐름도 잔잔해졌다. 테네브로즈는 수통에 있던 물로 쥐를 대강 씻은 다음, 시험 삼아 명령을 내렸다. 생쥐는 자신의 꼬리를 쫓으며 빙글 돌다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고, 갑자기 굳은 듯 멈췄다.
테네브로즈의 얼굴에 묘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자, 다녀오렴!”
쥐는 재빨리 어둠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바로 다음 순간, 작고 새까만 덩어리가 테반의 배낭 근처에서 나타났다가 곧바로 모습을 감췄다. 테네브로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란드와르를 쳐다보았다.
“기다려 보십시오. 이제 저 녀석이 뭐든 물어올 겁니다.”
***
“아까 얘기했지? 새벽에 바로 죽여 버려. 저 시종 녀석은 아무것도 아니야. 전사 놈부터 처리하라고. 자기가 아즈리온인 줄 아는 과대망상증 환자 말이야.”
“그 애새끼 있죠, 제가 보기엔 마법사 같습니다.”
“헛소리. 그 자식이 마법 쓰는 거 봤어? 지팡이는? 성물은? 반지나 목걸이는?”
인간이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마력을 제어하고 증폭시키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다. 형태는 다양했다. 귀걸이, 반지, 팔찌, 검, 지팡이, 혹은 모든 형태의 성물. 하지만 시종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요정일 수도 있어요. 놈들의 피에는 마력이 흐른다고요.”
“그렇다고 치자. 요정이 저 미친놈을 나으리, 나으리 하면서 따라다닐 이유가 뭔데? 인간을 벌레 보듯 하는 놈들이라고.”
“그건 그렇지만······.”
“겁쟁이 녀석. 그때도 혼자 구석에 가서 벌벌 떨던 주제에.”
“저도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합니다. 뭔가 위험한 게 있어요. 다들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경고했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테네브로즈도 남자를 알았다. 함부로 칼을 들이밀었다가 공포를 얻어맞은 녀석이었다. 약하게만 걸었는데도 그새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결국엔 아무것도 모르게 될 테니까.
***
“둘 다 자고 있지?”
“예, 완전히 곯아떨어졌습니다. 갑시다.”
부하는 란드와르의 배에 올라탄 다음 한쪽 손으로 목을 내리눌렀다. 가슴팍을 겨눈 칼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이더니 그대로 아래를 향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한순간이었다. 란드와르는 칼을 쥔 팔을 낚아채고서는 그걸 반대로 밀어붙였다. 칼날의 방향이 뒤바뀌며 부하의 가슴팍 밑을 파고들었다. 고통에 찬 비명이 아슬아슬한 정적을 깼다.
“젠장, 빨리 찔렀어야지!”
테빈은 한쪽 손으로 수인手印을 만든 뒤 지팡이로 땅을 두드렸다. 흙이 움찔거리며 솟아나더니 테네브로즈의 목을 옭아맸다. 공격 주문을 준비하는 동안 시종 녀석을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
“잠을 깨워서 미안하지만, 좋은 결말을 보고 싶으면 잘 생각하라고. 저 녀석 목뼈 부러뜨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니까!”
엄포를 놓은 테빈은 다른 부하를 노려보았다. 멍하니 서 있던 남자는 시선을 깨닫고 란드와르에게로 달려들었다.
란드와르는 첫째 놈에게서 단검을 비틀어 뽑아낸 뒤 곧바로 일어섰다. 다른 무기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두 번째 녀석은 꽤나 긴 곡도를 썼기 때문에 사거리 면에서는 지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는 모든 공격을 수월하게 막아냈지만 빈틈을 노리진 않았다. 상대가 큰 동작의 여파로부터 몸을 추스르는 동안 살짝 물러난 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뿐이었다. 언제든 가까이 다가가 갈비뼈 사이로 단검을 밀어 넣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빈은 협박이 효과를 발휘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좋아, 잘 했어. 칼은 던져 버리고 그 자리에 멈춰. 검술 실력은 칭찬해 주지. 쓸모도 없는 인질을 데려온 건 유감이지만, 실전에서는 그것도 실력인 법이야.”
말이 끝나고서도 한동안 칼날이 맞부딪히는 소리만 허공에 챙챙 울렸다. 이윽고 짜증 섞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거 언제 끝나냐?”
“뭐라고?”
테빈은 반문했다. 이번에는 드러누워 있던 시종이 말을 받았다.
“상처를 좀 크게 내 놓으라고 말씀드렸는데요. 피가 너무 느리게 흐르지 뭡니까. 이제 됐어요.”
“대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순간 테빈은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마법진이 발밑에서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랏빛 마력이 마법진의 골을 따라 흘렀다.
마력은 주문에 따라 서로 다른 색채를 지녔다. 원소학파와 비전학파의 마법서에는 그런 색이 없었다. 인간은 그런 주문을 쓰지 못했다. 생각이 거기에 닿는 순간 빛이 사라지면서 어둠이 몰려들었다.
아니, 어둠이 아니었다. 수만 마리의 벌레 떼였다.
테빈은 오래전에 배운 내용을 되뇌었다. 어떤 마법도 허공에서 생물을 창조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벌레들은 환각일 뿐이다. 하려던 일을 하자. 저놈의 머리통을 향해 바위 화살을 쏘아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벌레가 살갗을 갉았다. 살갗뿐만이 아니라 입 속과 눈꺼풀까지, 가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소용없는 질문들이 곤죽이 되어 휘돌았다. 마법사라는 게 사실이었나? 그것도 요정 마법사였다고?
문장은 단어로 갈라졌으며 단어는 다시 흩어져서 이도 저도 아닌 어절이 되었다. 아득한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똑똑한 사람이 한 명 있긴 했는데, 너무 후회하진 맙시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으니까요. 그렇죠?”
시종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에 뒤섞여 윙윙 울렸다.
***
소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쓰러진 인간들을 모으고 있었다. 슬래셔 컬트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만약 슬래셔 영화의 등장인물이 된다면 어느 배역을 맡는 게 좋을까? 살인마? 아니면 생존자? 뭐든 되고 싶지 않았다.
“잠깐 멈춰 봐라. 나는 이게 좋은 생각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나으리께서 제안하신 방법 아닙니까.”
“내가 하자고 한 거 맞는데, 근데 생각해 보니까 아닌 거 같다고.”
세 개의 자아가 있었다. 게이머 이강현과 현대인 이강현, 그리고 떠돌이 전사 란드와르.
테빈 일당에게서 영혼 파편을 떼어 내자는 계획은 게이머의 자아가 내놓은 것이었다. 통제도 쉬워지는데다가 맹독용을 상대할 때 제물로 바치기에도 편했다. 란드와르의 자아도 거기에 동의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인의 자아였다. 현대인 이강현은 인신 공양에 익숙하지 않았다. 여름마다 영화관을 채우는 공포 영화 포스터를 볼 때마다 미친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씨발, 영혼으로 뭘 한다는 거야.
안타깝게도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정신지배를 걸 수도 있고 주문력을 증폭시킬 수도 있었다.
“뭐가 아닌 겁니까.”
“사람 죽이고 제물로 바치는 거. 그런 거.”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거라면 거부감이 덜했다. 상대가 테빈이라면, 더더욱. 두 번이나 칼을 들이민 데다가 인류에 엄청난 공헌을 할 인물도 아니었다. 그냥 범죄자 동네의 양아치였다.
따라서 죽여도 괜찮았다. 현대인의 자아도 여기엔 동의했다.
하지만 제물로 바치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뭐가 다르지?
···모르겠다.
“나으리도 아시잖습니까. 영혼 파편을 떼어낸다고 해서 죽진 않아요. 게다가 시간이 오래 흐르면 영혼은 원래 주인에게 되돌아가죠. 카스바까지만 조용히, 같이 간다면 살려줄 수도 있단 겁니다.”
“맹독용을 만나면 제물로 바치겠지.”
“만나면 어차피 죽었을 놈들인데요. 별것도 아닌 인간 셋이 어떻게 살아남겠습니까.”
옳은 말이었다. 옳은 말인데 입맛이 썼다. 란드와르는 침묵했다. 잠시 궁리하던 테네브로즈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좀 더 진중해진 어조로 운을 뗐다.
“아즈리온은 살육을 주관하는 신이지만, 나으리는 그분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저는 그걸 압니다. 나으리께서 손에 피 묻히는 일을 꺼린다는 것을 압니다. 영혼을 쓰는 주문에 익숙지 않으시다는 것도 압니다.”
“오냐.”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나으리는 이스빈드를 살렸습니다. 연금술사의 딸과 풋내기 용병을 살렸습니다. 죽을 목숨 셋을 이 땅에 남겼지요. 그렇다면 셋의 여유가 생긴 게 아니겠습니까.”
연금술사의 숲으로 가기 전에, 비슷한 마음을 품던 기억이 났다.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그만큼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문장이 앞뒤만 바뀐 채 란드와르의 앞에 던져져 있었다.
누군가를 살렸으니 그만큼은 죽여도 괜찮다고.
어떻게 처분하든 괜찮을 거라고.
“내가 너한테 설득당해도 되냐?”
“나으리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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