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불한당과 같은 수레를 타는 법
마공학 바이크 대여 기간도 연장하고, 무기에도 각인을 받을 겸 용병 사무소에 들른 참이었다. 장기 대여 서류에 서명하고 값까지 치른 뒤 대기실 벤치로 걸음을 옮겼다.
용병들이 란드와르의 얼굴을 보고는 얼어붙었다. 무시하고 아무 데나 앉았다.
늑대인간 여자가 보이질 않았다. 잠깐 자리를 비웠나 싶어 조금 더 기다렸지만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옆의 용병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묻기로 했다. 다른 도시의 각인소에 취직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니, 마지막으로 본 게 이틀 전인데요. 그 사이에 취직을 했다고?”
“어제 일일세. 이제 자기도 일자리가 생겼다면서 펄쩍펄쩍 뛰어다니던데. 늙어 죽거나 납치당하지만 않는다면 거기에서 계속 일할 수 있을 거라더군.”
“어디로 갔답니까?”
“그건 못 들었지. 그냥 꽤 먼 곳이라고만 했어. 대신 조건이 엄청 좋다던데.”
갑자기 침울한 기분이 밀려왔다. 펠로시는 좋겠다, 씨발. 조건 좋은 정규직이라서. 나는 양심 없는 것들이 머릿속도 들여다보고 텔레파시도 쏘고 그러는데.
란드와르는 잠시 멈춰 있다가 낯익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왜, 애인 찾으러 왔다가 실연이라도 당했어?”
“뭐야?”
뒤를 홱 돌아보았다. 알톤이 어깨에 붕대를 감싼 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뼈가 부러지고서도 이렇게 시비를 거는 걸 보니 보통 놈은 아니었다.
“뭔데.”
“누워만 있으니 심심하지 뭐야. 노닥거리러 왔지.”
대답은 하지 않았다. 사무소에 용건이 남은 것도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알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사제님. 우리 이야기 좀 하자고. 할 말이 있어.”
“시비나 걸 생각이면 관두고, 중요한 얘기면 해 봐.”
“아, 젠장··· 그냥 고맙다고 말하려 했어. 고맙다고. 그게 다야.”
고맙다고? 뼈를 부러뜨려줘서 고맙단 말인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 알톤을 빤히 바라보았다. 놈은 멀쩡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자세한 속내를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성격 나쁘고 칼 좀 쓰는 놈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그래서 칼집째로 싸우겠다는 말에 화가 끓어올랐다는 것. 그런데 이 꼴이 되어 놓고 보니 죽이기 싫다는 말이 진심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쪽을 아예 병신으로 만들 생각이었어. 부정은 안 해. 그쪽도 짐작했을 테고. 나는 교단 소속은 싫거든. 사제 놈들이랑은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어.”
“알아.”
“근데 댁은··· 사람은 안 죽이더라도 팔 하나쯤은 그냥 자를 수 있었는데 내버려 둔 거잖아. 팔은 다시 안 자라지만, 뼈는 다시 붙는다고. 그게 고마운 거야,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상한 것으로 시비를 걸더니 이상한 부분에서 감동을 느끼는 놈이었다. 애초에 싸움만 안 걸었어도 뼈가 부서질 일은 없었을 텐데.
하기야 그런 판단이 됐더라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뭐라고 했더라. 원래는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였는데, 홧김에 사람을 죽였다가 파문을 당했다고?
생각이라도 읽은 듯 알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내가 교단 사제 놈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그거야. 훈련원에서 굴렀답시고 남들을 깔본다고. 나보다 실력도 떨어지는 주제에 항상 무시하길래 결투를 걸었지.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죽였어. 그렇게 파문을 당했단 말이야.”
문득 란드와르는 로안에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훈련원 출신이 아닌 사제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고 했지. 알톤이 바로 그 경우인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홧김에 사고를 친 것이다. 흔하고, 안타깝고, 절반쯤은 자업자득인 사연이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까, 나도 똑같은 놈인 것 같더라고. 그쪽한테 다짜고짜 시비부터 건 게. 그래서 미안하고, 팔 안 자른 건 고맙고··· 썅, 그쪽도 딱 보니까 훈련원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처신 잘 하쇼. 나처럼 되지 말고.”
알톤을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뼈까지 부러졌으니 억하심정을 품을 법한데도 사과를 하는 걸 보면 아주 나쁜 놈은 아닌 듯했다.
나중에, 일이 모두 끝나면, 신화에 이 놈 이야기도 한 줄쯤 넣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
“젠장, 샤히드가 죽었다고? 그 얘기를 왜 안 해 줬어?”
데라듄 상단의 중간관리자, 테빈은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그는 몬도 데라듄의 신임받는 부하였고 괴짜 연금술사와도 꽤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카두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열어 놓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샤히드는 발밑에서 화산이 터지더라도 납기일을 지킬 남자였으니까.
“이봐요, 우리는 아저씨랑만 거래하는 게 아니에요. 요정들이 다시 전쟁이라도 시작한 게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한 주제에.”
“문제가 다르지. 상단이 너희한테 정보 구독료를 바치는 이유는 샤히드가 세카두에 살기 때문이야. 다른 건 몰라도 그 소식은 꼭 전달해야 했다고.”
“그건 아저씨 사정이죠. 우리 고객이 아저씨 하나뿐인 줄 아시네. 개인 맞춤 서비스는 부티크에나 가서 찾아봐요.”
“뭐?”
“알아서 잘해 보라구요. 우리 우정이 있으니까 몬도 씨한테는 말 안 할게요.”
창구에 앉은 소년은 호루라기를 꺼내어 불었다. 동시에 건장한 남자 둘이 일어나더니 테빈의 양팔을 붙잡았다. 그는 체념한 채 우악스러운 손길에 몸을 맡겼다. 마법을 쓸 수도 있겠지만 일을 더 키우고 싶진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딱딱한 포석鋪石이 꼬리뼈를 강타했다. 하지만 아픔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몸을 일으킨 테빈은 계단에 주저앉아 돌아가는 판세를 정리해 보았다.
샤히드 울프는 수액 괴물에게 먹혀 죽었다. 지금은 그 딸이 집을 매물로 내놓은 상태다. 하지만 연구실의 물약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 뒤로 빼돌린 것도 아니고 치안대를 부르지도 않았다.
어떤 물건인지 몰라서 내버려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가능성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발주서를 보여 주면 물건은 쉽게 넘겨받을 터였다. 거기엔 상단의 도장도 샤히드의 서명도 있으니까. 그렇게 결론 내린 테빈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수레 대여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하 셋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새는 모든 거래가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 상단 호위대와 관리자가 차원문을 통해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 거기에서 마공학 수레를 빌리는 것이다. 빈 수레를 끌고 먼 길을 내려올 필요는 없으니까.
물론 차원문으로 물건을 수송한다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해 당사자가 너무 많았다. 상단, 마공학자 조합. 차원문 관리업체. 마력 결정 가공업자. 상단 호위대. 그리고 기타 등등.
마공학자 측에서는 차원문 과부하와 전송률 하락을 들먹였다. 차원문 관리업체는 만약 차원문을 물류 용도로 쓰게 된다면 지금의 여덟 배에 달하는 요금을 내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심지어는 모든 상단이 차원문 물류 체계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이 문제로 절박한 것은 늪지대 너머에 위치한 몇몇 상단뿐이었다. 그러니까, 카스바에 근거지를 둔 곳 말이다. 다른 거점 도시 사이의 운송은 시간이 걸릴 뿐이지 위험성은 낮은 탓이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테빈은 위험한 상단의 위험한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샤히드의 죽음쯤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로.
***
“일단 사람이 있는지부터 보자. 딸년이 몰래 치안대를 불렀을 수도 있으니까. 만약 아무도 없으면 물건만 빨리 빼내서 돌아간다. 있으면 대화부터 해 보고. 만약 이야기가 안 풀리면 쓱싹하는 거야.”
“예.”
부하들이 짧게 대답했다.
테빈은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끄트머리로 땅을 두어 차례 두드리자 흙이 움찔거리며 치솟았다. 땅의 정령이었다. 그가 모습을 갖춘 정령에게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 저택 정중앙의 창문이 불쑥 열렸다.
“바쁘신 중에 미안합니다만, 우리 나으리가 한 번 보자는데요. 치안대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카스바에 볼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고동색 머리의 소년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빙글빙글 웃기 시작했다. 짧은 정적이 지나갔다.
“젠장, 저건 또 뭐야?”
테빈은 벌컥 화를 터뜨렸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호위 셋에게 눈짓한 다음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긴 문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저 시건방진 어린놈의 목에 칼을 들이민 다음, 그 ‘나으리’라는 자식에게 인생의 쓴맛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은 카스바의 규칙이고 상단의 방식이었다.
***
“얘들아, 내가 대화로 풀자고 했잖아. 도대체 왜 사람 말을 안 듣냐. 나는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야. 싸움 같은 거 싫어한다고.”
“나으리는 말과 행동 사이에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일관성 충분하지. 내가 바로 일관성의 화신이지.”
란드와르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다짜고짜 칼을 들이미는 놈들을 상대로 뼈만 부러뜨려 놨으면 간디도 울고 갈 평화주의자다. 게다가 죄다 박살을 낸 것도 아니었다. 딱 한 놈이었다.
자신에게 덤벼든 놈 하나는 어깨를 작살낼 수밖에 없었지만 나머지는 처리가 됐다. 테네브로즈를 인질로 잡으려던 녀석은 공포 상태이상을 맞고 구석에서 벌벌 떨다가 정신을 차렸고, 제일 멀쩡한 놈은 사건 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업자득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보낸 놈이야? 재빗홀? 이시그롤 클랜? 아니면······.”
밧줄에 꽁꽁 묶인 테빈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으르렁댔다. 칼자루로 맞은 탓에 눈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그런 거 아니고, 일자리 알아보는 중이다. 이직 좀 하자.”
“일자리라고?”
“상단에 취업시켜 달라고. 칼 솜씨는 봤을 테고.”
“아, 이제 알겠군. 정보원이 네 이야기도 했어. 연금술사 딸년이 아즈리온 쪽 사제를 용병으로 고용했다고. 저택을 들쑤시다가 우리 물건을 발견한 모양이지. 왜? 성직자 노릇도 지겨워졌나? 교단에서 일을 안 줘서 그래?”
란드와르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덤볐다가 코가 깨진 주제에 혀가 길었다. 카리나처럼 양심 있는 인간이라면 말 상대를 해 주겠지만 이런 놈에게는 단어가 아까웠다.
“몰라, 씨발. 나 카스바 가서 일해야 돼. 그냥 좀 데려가 봐.”
“조만간 파문당하고 이 동네로 올 것 같긴 해. 용병 사무소에서 사고를 거하게 쳤다던데, 그런 놈들은 우리 쪽에서도 안 받아. 여긴 상명하복이라고. 대신 투기장이나 가 봐. 인기가 꽤 많을 테니.”
쓸데없이 정보력이 좋은 것들이었다. 테네브로즈가 거기서는 또 무슨 일을 저질렀냐는 표정으로 란드와르를 올려다보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신경만 긁고 도움이 안 됐다. 이마에 열이 올라왔다.
“야, 그러면 이런 방법도 있다. 원래 여기 호수에 수액 괴물이 있었거든. 걔가 샤히드도 먹고 용병들도 먹었어. 그래서 내가 수액 괴물을 잡은 다음 공동묘지를 만들어 줬단 말이야. 묻힌 사람이 열 명쯤 돼. 거기에서 네 명 늘어나면 어떨 것 같냐? 잘라서 묻을 건데 티가 많이 날까?”
테빈과 부하들은 처참하게 패배한 상태. 란드와르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따질 방법이 없었다. 상단이 복수에 나설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고 말이다. 샤히드도 죽었으니 꼬리가 잡히기 전에 손을 털겠지.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잠깐만, 사제 형씨. 신이 토막 살인은 괜찮다고 그랬어? 마음에 안 드는 놈은 잘라서 파묻으래?”
“내 뜻이 바로 아즈리온의 뜻이다, 새끼야.”
란드와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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