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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3화 (14/258)

13화: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카스바는 망한 인생의 집하장 같은 곳이다. 인생살이에 별다른 소질이 없지만 그래도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강령술사에게 영혼을 내맡기기에는 겁이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는다.

도시는 요정 제국의 폐허를 뼈대로 삼아 자라났으며 인간의 땅과는 완벽히 분리되어 있다. 세카두와 타일라프람으로, 그리고 다른 거점 도시들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북부 늪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썩어 가는 요정과 맹독용이 들끓는 늪지대를.

이러한 고립 상태는 카스바에 남다른 특권을 부여했다. 죄인과 도망자, 그리고 어디에서든 기회를 찾아내는 야심가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도박장과 노예 시장과 검투 경기가 있었다. 어디에서도 찾아내지 못할 환락의 마법과 약물이 있었다. 완벽한 타락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 정점에 서길 원했으나 그것이 실현된 적은 없다. 오직 방향 없는 욕망과 충동이 카스바를 이끈다.

***

“그게 다 카스바로 갈 물건이었다는 거지. 물품 납기일은 바로 모레고.”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시지요.”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에게 연금술사의 숲에서 있던 일들을 읊어 주었다.

샤히드는 사실 카스바의 상단과 계약을 맺고 불법적인 물약들을 만들어 왔다. 그러다가 폐기물 관리를 잘못해서 죽었다. 딸과 그녀가 데려간 용병도 죽을 뻔하다가 살았다. 이러나저러나 모레에는 상단이 물품을 가지러 올 예정이다.

설명을 이어 가다 보니 구체적인 정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시나리오가 개방된 시점에 저택의 연구실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게임을 할 때에는 단순한 약탈이라고 생각했다. 시외의, 주인 없는 목조 저택만큼이나 빈집털이에 취약한 곳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 상단이 물건을 회수한 뒤 흔적을 모두 없앤 것이라면?

이 설명이 좀 더 그럴듯했다. 노예를 만드는 데에 쓰이는 물약들은 제조법 자체가 금서로 지정된 상태. 카스바 이외의 도시에서는 소지만으로도 처벌을 받는다. 혹시라도 꼬리가 잡힌다면 상단 입장에서는 일이 귀찮아질 터.

“자, 내 생각에는 일이 이렇게 된 거 같다. 카스바 쪽 상단에서 물건을 받으러 왔다. 근데 왔더니 집주인이 없네. 실종 상태래. 근데 물건은 있어. 그래서 흔적 치우고 싹 가져간 거지. 그 다음에 온 사람들은 약탈당했거니 하는 거고.”

“나으리께서는 지금 시간선을 혼동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는 하계의 사람이라 운명이 얽힌 이야기는 이해치 못합니다.”

테네브로즈의 지적에 란드와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랬다. 아직은 상단이고 뭐고 오지도 않았다.

예전에, 시간 여행 소설을 읽다가 시간어(時間語)에 대한 설정을 접한 적이 있다. <패트롤 언어에는 시간 조정과 가변 시간, 그리고 관련 패러독스를 표현할 수 있는 어법이 있었지만···>*. 그게 필요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시간 여행 소설이 아니었다.

“짧고 간략하게 다시 말한다. 너랑 내가 카스바로 간다. 끝.”

***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와 대화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세카두 외곽 수도원을 찾았다. 저택 지하에 좌표값이 미리 입력된 소형 차원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파르타와 논의할 일이 있었다.

세카두 외곽 수도원은 정보사의 본진. 해도 저문 판에 대뜸 얼굴을 들이밀자니 미안했지만 그냥 갔다. 광신도한테는 업계 포상이었다.

“용병 사무소에서 있던 일은 들었습니다.”

···당연히 정보사 쪽으로도 소식이 흘러갔을 거라고 예상했다. 예상은 했는데, 대뜸 이 얘기부터 꺼낼 줄은 몰랐다. 파르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감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깊으신 심계에 탄복했습니다.”

지금까지 위장한 신분 중에서 제일 그럴듯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알아서 해석해 주니 고마울 뿐이었다. 수염까지 기른 중년 남자에게서 저런 눈빛을 받는 건 부담스러웠지만.

란드와르는 대강 맞장구를 친 뒤 본론을 꺼냈다. 해야 할 이야기는 두 가지. 다음 행선지가 카스바라는 것. 그리고 아무 장식도 없는 검과 단검 하나씩이 필요하다는 것.

“조만간 카스바로 갈 예정이다. 북부 늪지대를 지나갈 테니 시간은 조금 걸릴 거야.”

계획은 이랬다. 물건을 회수하러 온 상단 측 직원들과 협상을 봐서 동행하는 것이다. 마공학 수레가 늪지대를 통과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열흘 정도.

쉬운 일은 아니다. 맹독용에게 습격을 받는다면 일정이 한참은 늘어진다.

“카스바 내에도 정보사 요원들이 몇 있습니다. 임시 출입증이라면 충분히 발급받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런 방안이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었다. 카스바의 보조 시나리오는 개방 조건이 특히 까다로운 탓이었다. 세력 간의 관계도에 따라 접근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한참이나 달랐으니까.

“고정적으로 파견된 요원이 투기장과 도박장에 각각 하나씩이 있는 것으로 안다. 다른 요원 하나는 청부업자 겸 정보상 행세를 하는 중이고.”

“맞습니다.”

“지금 용건이 있는 곳은 노예 시장이야. 요원들의 인맥으로 접근하기엔 문제가 있단 소리다.”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시나리오 다섯 개.

거기에 준하는 보조 시나리오 두 개.

그 두 개의 보조 시나리오 중 하나가 노예 시장에 있다.

보상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 시장 시나리오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인맥을 쌓기는커녕 접점을 만드는 것부터가 어려우니까. 여차하면 시간만 낭비할 공산이 크니까. 우두머리를 때려잡고 아이템을 주워 먹는 것도 일단 우두머리를 눈앞에 둬야 가능한 일이었다.

“노예 시장 쪽 인물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아마도 지금과는 또 다른 신분을 쓰게 될 테지. 환술은 데리고 다니는 요정에게 맡길 생각이다.”

열흘간 늪지대에서 고생하는 대신, 노예 시장과의 접점을 만든다.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정보상 역할을 맡은 요원이 주기적으로 세카두에 옵니다. 그때 분부해 두겠습니다. 다만, 저희 능력이 당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요원들에게 따로 맡길 일은 없을 거야. 내 선에서 끝낼 수 있는 문제들이다.”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카스바는 너무 많은 세력이 복잡하게 얽힌 곳이었고, 대부분의 사람이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따라서 요원들 역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만 그곳에 있었다.

“대신 아무 장식 없는 장검과 단검 하나씩을 마련해 줬으면 좋겠군. 칼집도 함께.”

아즈리온 교단은 카스바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아즈리온만을 따질 게 아니라 대부분의 교단이 그랬다.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교단이 두어 개 있을 뿐. 그곳에서 교단의 표식이 박힌 물건을 들고 다니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동이 뜨기 전까지 저택의 현관에 두도록 하겠습니다.”

파르타가 고개를 숙였다.

***

다음 날이 되자마자 란드와르는 울프 장원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카리나는 아직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대강의 설명을 마친 뒤 함께 연구실에 들어섰다. 미오리타의 설명대로 세 번째 궤짝 안에 절반으로 접힌 발주서가 숨겨져 있었다.

종이를 펼치자 도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형태였다. 데라듄 상단의 표식. 노예 시장에서 온 게 맞았다.

“이건 상단의 도장이고, 옆에는 샤히드 씨의 서명이 있군요. 여기에 있는 숫자가 선지급금이고 그 옆이 물품 대금. 품목명은 은어 같습니다만······.”

카리나는 궤짝과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갖가지 감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혼란. 공포. 분노. 그리고 부정. 카리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게 모두 불법적인 물약들이라는 거죠? 정말로요? 제가 그 말을 믿어야 하나요?”

“글쎄요. 도시로 돌아가서 감정을 맡길 수도 있겠죠. 감정사가 곧바로 치안대를 부를 텐데, 그러고 싶으십니까? 이 정도 물량이면 일이 꽤 귀찮아질 겁니다.”

“협박은 그만둬요. 치안대한테 설명해야 할 쪽은 당신일 테니까. 그래, 이게 모두 사실이라 쳐요. 그러면 당신은 이걸 어떻게 안 거죠? 감정해 준 사람은 누구고요?”

물음표에는 힘이 있다.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주제를 이끄는 힘이. 잘못 휘말렸다가는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들로 힘을 빼기 마련이다.

란드와르는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잠깐만요. 질문을 바꿔 보죠. 굳이 이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무슨 소리죠?”

“물약을 가져가라는 허락은 이미 받았어요. 가지고 싶었으면 말하지 않고 그냥 가져갔겠죠. 반대로 책임을 피하고 싶었으면 여기에 돌아오지 않았을 테고요. 하지만 난 굳이 이렇게 경고를 해 주고 있단 말입니다. 다시 묻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순간 카리나의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돈을 뜯어내고 싶은 거라면 사람 잘못 봤어요. 있던 돈은 아버지께서 연구를 한다고 싹싹 긁어먹었고, 이 저택은 확인해 보니 저당이 잡혀 있더군요. 저는 수녀고요. 얼마를 부르든 간에 못 줘요. 없으니까요.”

입막음 비용을 요구하는 용병이라니, 재미있는 착각이다. 해명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란드와르는 진짜 용건을 말하기에 앞서 덧없는 소망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해를 풀고 상대를 납득시키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난다면.

하지만 대화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었고 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었다. 둘은 서로 달랐다.

“아뇨, 그냥 상단 쪽 사람들이 올 때 자리를 비워 주면 돼요. 내가 알아서 합의를 볼 겁니다. 카스바에 가야 하거든요.”

“아예 한패가 되겠단 소리군요. 하긴 떠돌이 용병으로 사는 것보다는 노예상의 부하가 되는 게 돈은 더 벌겠죠. 제가 그걸 허락할 것 같나요?”

카리나의 반응은 이해했다. ‘너희 집에서 마약 거래를 할 테니 자리를 비워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많지 않을 터였다. 허락하는 척 치안대를 부르면 모를까. 심지어 카리나는 레오나 교단의 수녀.

이제는 동종 업계의 권위에 기댈 때였다.

“저는 비록 소속된 곳 없는 용병이지만, 아즈리온의 종이기도 합니다. 신의 이름에 누가 될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죠. 저 물약이 만들어진 용도 그대로 쓰이진 않으리라는 것도요. 죄책감도, 두려움도 없이 주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란드와르는 정중한 태도로 말을 마치고서는 손등에 성흔을 띄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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