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아까처럼 편하게 해. 나도 말 편하게 할 거니까.”
“예?”
“내 정체를 알게 될 사람은 네가 처음이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거야. 되도록이면 안 밝히는 게 낫겠지만, 한참은 더 많을 거라고. 그 사람들이 모두 나한테 이럴 수는 없잖아. 남이 보면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하겠냐.”
근엄한 신 역할은 파르타 앞에서 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남이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는 데에서 만족감을 얻는 성격도 아니었다. 로안이 넙죽 엎드려 봤자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면··· 사제님이라고 부르면 되는 겁니까?”
“뭐든 간에. 내가 누구인지 의식을 하지 말란 소리야. 그냥 떠돌이 전사라고 생각해.”
일단 로안과는 세카두에서 다시 만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이런 곳에서 이런 꼴로 대화를 이을 수는 없었다. 옷부터가 흙과 수액 파편으로 엉망이었다.
로안을 먼저 보낸 뒤 연구실에 남았다. 나무 궤짝에는 세 가지 물약이 정리된 상태로 담겨 있었고, 선반에 있는 것들은 종류가 모두 달랐다. 기성품과 시제품 정도의 차이인 듯했다.
이 시제품 중에 괜찮은 물건이 하나쯤 있을 듯했다.
란드와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견습 천사가 창문에 팔을 얹고는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팔꿈치 길이의 날개만 제외하면 그 나이대의 보통 여자애 같다. 사무실에 현장 체험을 온 중학생.
현장 체험을 왔으면 일을 해야지.
“미오리타, 여기 있는 물약들 모두 분류한 다음 엑셀로 정리해서 뽑아 와요. 오늘 저녁까지 가능하죠?”
“···엑셀요?”
이 세계의 정확한 명세가 궁금했다. <개인 정보 및 민감 정보 수집 동의서 7(선택)>을 쓰게 만드는 것들이 엑셀은 없단 말인가? 아니면 뭐, 엑셀이 아니라 한셀이라도 쓰나?
<그 아이, 인턴이라 실무는 몰라요. 시켜 놓으면 우리 선에서 가르쳐 둘게요.>
순간 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린다기보다는 느껴졌다. 란드와르는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하면서 허공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젠장, 이건 또 무슨 서류에 붙어 있는 조항이야?
<<개인 정보 활용 동의서 3(선택)>이니까 그렇게 아시면 되고요, 이런 식으로 대화할 일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 다만, 조만간 필요할 것 같아서 미리 연락드리는 겁니다.>
***
교단에서 마련한 거처는 도시 외곽의 주택이었다. 평소에는 타 교구에서 주교급 인물이 방문할 때 임시 숙소로 제공하는 곳. 그래서인지 시설은 현대인의 눈에도 꽤나 좋아 보였다.
사실 수압 좋고 온도까지 정확히 조절되는 수도는 대한민국에서도 기본은 아니다. 그것보다 못한 곳이 한참이나 많다.
강현은 욕조에 목 끝까지 잠긴 채 17만 원짜리 고시원을 되새겼다. 벽지는 누렇고 공용 욕실에서는 얼음물이 쏟아진다. 한 달을 살다가 지금 사는 곳으로 옮기긴 했지만 큰 차이는 없다.
아니, 지금 사는 곳이 아니다. 고시텔에 매달 25만 원씩을 바치는 개인회생자 이강현은 근 일주일 전에 사라졌다. 여기에 있는 것은 떠돌이 전사 란드와르. 전기 기사 자격증은 쓸모가 없지만, 대신 살인 기능장을 땄다.
수면에 얼굴을 처박자 갖가지 질문이 밀려왔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으면 계속 그렇게 살았겠지? 잘된 건가? 형편이 나아진 건가? 형편이라는 게 뭐지? 잘됐다는 건 또 뭐지?
씨발, 이걸 어떻게 비교해?
목욕을 마친 뒤 마당에 나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냄새만 났지 니코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작은 짐승들이 도망가기에 뭔가 했더니, 연초였군요. 동물들이 싫어합니다.”
나무 울타리 사이에서 테네브로즈가 불쑥 나타났다. 어디에 갔나 했더니 정원에 있던 모양이다.
“남 기분도 신경 안 쓰는 놈이 동물 기분을 신경 쓰고 있네. 뭐 하길래 나무에서 나오냐?”
“이런 녀석들과 놀던 중이었답니다.”
가까이 다가온 테네브로즈는 보란 듯이 팔을 뻗었다. 꼬리가 붙잡힌 생쥐가 시계추처럼 흔들거렸다. 반사적으로 욕을 내뱉으려던 란드와르는 몇 가지 사실을 상기하고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첫째, 이놈은 야스와다 학파의 마법사다.
둘째, 학파의 몇몇 주문에는 살아 있는 생물이 필요하다.
셋째, 그래서 이놈은 인벤토리에 생쥐를 넣고 다닌다.
이 미친 요정이 흙투성이 생쥐를 들이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참아야 했다. 생쥐는 쓸 데가 많았다.
“많이 놀아라. 난 애 하나 만나고 온다.”
손바닥에 시가를 눌러 껐다. 살이 타들어 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해졌다.
***
로안과 다시 만나자마자 란드와르는 <개인 정보 활용 동의서3(선택)>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녀석이 아즈리온 신화의 각 구절을 줄줄 읊기 시작한 것이다.
“이시 첼을 죽일 때 셀리멘을 데려가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몰라, 씨발, 내가 한 거 아니야. 그만 물어보고 밥이나 먹어.
<셀리멘은 그때 따로 맡은 일이 있었어요. 다른 신의 흔적을 정화하느라 바빴죠. 그렇게만 말해 두면 돼요.>
티아가 속삭였다. 란드와르는 그대로 따라 읊었다.
“그렇군요! 본가에 가면 친척 어르신들께 꼭 말씀드려야겠어요. 그때 갑자기 사라지신 이유를 다들 궁금해하시거든요.”
“친척들도 너처럼 신화에 관심이 많냐?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아, 이걸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잠시 말을 멈춘 로안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이야기가 새어 나갈까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음식이 나오고서도 30분을 내리 신화 이야기만 하고 있었는데, 걱정이 참 빨랐다. 식당 테이블이 룸 형태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사실 그분께서 제 조상님이시거든요. 같은 가문이에요. 노르덴홀즈죠. 로안 노르덴홀즈.”
“···노르덴홀즈?”
란드와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낱말을 되풀이했다.
노르덴홀즈는 타일라프람을 통치하는 세 가문 중 하나였다. 타일라프람은 마법사와 연금술사, 그리고 각인사의 도시. 그중에서 노르덴홀즈는 마법사를 대표했다.
쉽게 말하면 로안은 그냥 명문가 도련님이 아니라 왕자쯤은 됐다. 물론 그 안에서도 직계와 방계가 나뉠 테지만, 저 정도로 마력 감응이 뛰어난 놈이라면 방계여도 톡톡히 대접을 받았을 터.
“본가가 타일라프람에 있는 거 맞지?”
“기억하시는군요! 일찍 말씀드릴 걸 그랬어요. 그분이랑은 꽤 오래 다니셨잖습니까.”
“야, 조상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너 인생 얘기부터 해야 돼.”
탐색 의뢰를 맡았다가 수액 괴물에 먹혀 죽은 초급 용병. 게임엔 나오지도 않는 NPC. 그리고 타일라프람의 왕족.
말이 안 됐다. 그런 놈이 세카두에서 그렇게 어이없이 죽을 수는 없었다. 살아남았다 쳐도, 그런 놈이 여기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범죄였다.
란드와르는 계획을 수정했다. 원래는 초중반에만 데리고 다니다가 대기를 태울 생각이었다. 높은 성장성을 감안하더라도 제대로 키우기엔 리스크가 크니까.
하지만 이놈이 노르덴홀즈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질문에만 대답해라. 가출은 정확히 언제 했냐.”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로안은 분위기가 바뀐 것을 깨닫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반년쯤 됐습니다.”
“타일라프람에서는 어떻게 지냈냐.”
“책만 읽었습니다. 몇 번 검술 사범을 들이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다 쫓아내셨어요.”
“마법 공부는 제대로 했고?”
“열 살 때까지는 꼬박꼬박 했는데··· 그 후로 손을 놓아서 이론적인 건 많이 모릅니다. 제어도와 정밀성이 떨어지는 게 그거 때문입니다.”
“가문에서는 직계냐, 방계냐.”
“방계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문제를 겪은 적은 없습니다. 실력만 좋으면 대우해 주는 분위기라서요.”
“지금부터 다시 제대로 해 본다고 하면 지원받을 수 있냐?”
“언제든지 말만 하라고 얘기 자주 들었습니다. 다들 좋아하실 겁니다.”
란드와르는 노르덴홀즈 가문의 비밀 금고를 떠올렸다. 이름에 노르덴홀즈가 붙은 놈을 동료로 영입하면 열리는 장소였다. 거기에 있는 것은 갖가지 마력 증폭구와 영약들.
로안은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강력한데다가 비밀 금고까지 출입할 수 있으니만큼 마력 감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관건은 제어도와 정밀성이다. 이론과 연습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부분.
“얼 타는 일 없이 사람처럼 마법 쓰려면 몇 달 걸리냐. 그 이론적인 거 다 배우려면.”
“보통 3년쯤 걸립니다. 기초를 모두 익힌 다음부터는 실전 경험이 중요하다고들 합니다.”
3년. 너무 늦었다. 6개월 안에 핵심 시나리오에 진입해야 했다. 그래야만 최후반까지 데리고 다닐 포텐셜이 생겼다.
“일단 집부터 가자. 지금 말한 그거, 여섯 달 안에 해결해라. 안 그러면 나랑 못 다닌다.”
***
로안을 차원문에 태워 보낸 후 숙소로 돌아왔다. 거실에 들어서자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요정놈이 보였다. 잘 보니 연금술사의 숲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목욕하러 들어가면서 잠시 빼 둔 걸 잊고 있었다.
“그거 마법사가 끼는 거 아니다.”
테네브로즈가 고개를 돌려 란드와르를 보았다.
“그러면 누가 쓰는 겁니까? 주문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재생의 반지야. 칼 맞아도 금방 아무는 거.”
반지를 건네받은 란드와르는 잠깐 고민하다가 왼쪽 중지에 끼워 넣었다. 예전부터 반지가 있으면 거기에 꼈다. 습관이었다. 테네브로즈가 그걸 보고는 몇 마디를 더했다.
“회복 각인이라, 나으리께서 이런 게 필요할 줄은 몰랐는데요. 어지간해서는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상처가 사라지는 분이 아닙니까.”
실제로 그랬다. 손바닥에 담배를 눌러 꺼도, 칼에 뺨이 베여도 곧바로 나았으니까. 당연하게도 재생의 반지는 란드와르를 위한 게 아니었다.
<이스트리아 퀘스트>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는 별다른 장비가 필요하지 않다. 처음부터 주어지는 망치부터가 이미 하이엔드급 무기인데다 전투 부적이 없어도 충분히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비를 모아야 하는 이유는 딱 하나.
동료들이 써야 되니까. 공격대 우두머리의 패턴을 혼자서 막아 낼 수는 없으니까.
“내 물건도 아니야. 이제 그거 낄 놈을 찾아야 돼.”
“찾아야 된다고요. 행선지는 정해 두셨습니까?”
“그게 문젠데.”
란드와르는 게임의 굵직한 줄기를 복기했다. 일단 핵심 시나리오가 다섯 개. 거기에 준하는 보조 시나리오는 두 개. 그리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잡것들.
잡것들은 코어 아이템만 골라 먹으면 그만이고 핵심 시나리오는 의무였다. 그러나 두 개의 보조 시나리오는 포지션이 애매했다. 깨기엔 시간이 빠듯하지만 그냥 넘기기엔 보상이 좋았다. 그야말로 계륵.
아직까지도 본격적인 게임 시작까지는 열흘이 남아 있었다. 그게 충분한 보너스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보조 시나리오 둘을 해결하려면 각각 세 달씩이 필요했다.
완벽하게 처리한다면 모두 끝마친 다음 핵심 시나리오에 진입할 수 있겠지만······.
“아, 맞다. 아까 전에 어떤 꼬마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더니 받아 적으라면서 뭘 읊던데요. 나으리께서 시키신 일 아닙니까?”
테네브로즈의 말에 란드와르는 생각을 멈췄다. 미오리타에게 물약 감정을 맡긴 게 기억났다.
“오냐. 제대로 받아 적었냐.”
테네브로즈는 일어서더니 서가에서 아즈리온 성전聖典을 가져와 펼쳤다. 가장 앞 장에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메모지 대신 쓴 듯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일단 상자당 180개고, 효과에 대해서는 따로 문의하라는군요. 불꽃 기름 두 병, 마력 부종 생성제 열 병, 아무 효과도 없는 마력 응축물 네 병, 희미한 망각의 물약 한 상자, 무기력의 물약 두 상자, 복종의 물약 두 상자······.”
기대한 건 회복 물약이나 영약이었는데 내용이 점점 이상해졌다. 희미한 망각의 물약, 무기력의 물약, 복종의 물약, 모두 노예 시장 관련 시나리오에서나 등장하는 이름이었다.
“지금 제대로 읽고 있는 거 맞지?”
“예. 상단 발주서도 상자 안에 있었다고 전해 달라던데요. 가서 직접 대조해 보셔도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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