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실패한 연금술사의 숲
카리나는 란드와르가 묫자리를 파고 뼈를 쏟아 붓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희생자 각각을 구분할 수도 없는 판이었다. 소지품마저 태반이 녹아내린 상태. 호수 곁에 함께 묻을 수밖에 없었다.
반지를 낀 용병만 따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똑같이 취급하기에는 미안했다.
“안타깝지만 슬퍼하진 않으려 해요. 실험에 평생을 바치느라 가족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으셨거든요.”
흙을 모두 덮고서야 카리나의 입술이 달싹였다.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눈가에는 슬픔이 조금이나마 엿보였다.
“보수는 용병 중개소에 예탁해 뒀으니 거기에서 받아 가면 돼요. 지금 바로 가서 의뢰를 마무리 짓고 토지 중개인을 찾아보려고요. 고마워요.”
“토지 중개인이요?”
로안이 물었다.
“이 집을 팔 생각이에요. 들어와서 살 생각도 잠깐 했는데, 역시 안 되겠네요.”
공인중개사 사무소의 악성 매물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듯했다. 목조 저택은 관리도 어렵거니와, 호수는 마력으로 오염되어 있었으며, 벌써 열 명 남짓이 죽었다. 누가 매수인이 될지 의문이었다.
···어딘가 불운한 호구가 하나쯤은 있겠지. 아니면 아예 강령술사가 탐낼 수도 있고.
란드와르의 주의는 곧바로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여긴 기본적으로 연금술사의 거처.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개방되는 시점에서 물약은 모두 약탈당한 상태였지만, 아직까지는 건질 게 남았을지도 몰랐다.
“아버님의 제작품들은 어쩌시렵니까?”
“글쎄요, 어떻게든 처분해야죠. 값어치 있는 게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분류표도 제대로 안 붙어 있어서 걱정이에요. 감정사를 부르는 비용이 파는 비용이랑 비슷하게 나올 것 같네요. 이거 원, 어디 부어 버릴 수도 없고.”
카리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액 괴물의 잔해를 심상에 그려 보는 듯했다.
“잠깐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의뢰인님만 괜찮다면 가져가고 싶습니다만.”
“감정 기술이 있나 보죠?”
“아뇨, 용병으로 일하다 보면 눈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쓸 만한 것쯤은 구별할 수 있죠.”
둘러대는 소리일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진실이었다.
강화 효과 지속 시간이나 장비의 명세는 티아에게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왔다. 물약도 그런 식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딱히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상대가 아니었지만.
모 대기업에서 노조 위원장을 사찰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신문으로 자주 접했으나 뇌가 감청당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인간의 아홉 선신이 아니라 아홉 양아치 새끼들이었다.
그래도 티아가 이 속마음까지 듣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란드와르는 표정을 관리하지도 않고 빙긋 웃었다. 그걸 본 카리나의 얼굴에 석연찮은 기색이 떠올랐다.
“바로 가져가실 건가요? 부작용이 생겨도 책임은 못 져요. 치유술로 마법 효과를 해제할 수는 없거든요.”
“오늘은 한번 보기만 할 생각입니다. 짐칸이 넓지 않아서요.”
“어차피 다 옮기려면 수레쯤은 끌고 와야 할 걸요. 직접 가서 봐요.”
카리나는 창고 겸 연구실을 보여 주고서는 휙 떠났다. 해가 지기 전에 일 처리를 마치려면 시간이 빠듯하다고 했다. 란드와르는 연구실로 들어섰다.
벽면의 선반은 물약 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먼지가 수북했다. 바닥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두텁게 쌓여 있던 먼지가 코를 훅 덮쳤다.
“에···엣취!”
뒤따라 들어온 로안이 기침을 터뜨리더니 소매로 코를 덮었다. 고참 전사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십분 이해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 놓고 보니 조금 성가셨다.
“숨을 쉴 수가 없네요.”
“바깥에 있으라고 했지 않았냐. 물약도 안 필요하다면서.”
“그래도 확답을 듣고 싶어서 그럽니다.”
“나중에 하자. 나는 이거나 좀 보련다.”
해야 할 일들을 기억하고는 있었으나 그 일 각각을 어떤 순서로 처리해야 할지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원래 로안과의 대화는 나중의 문제로 생각해 두고 있던 것이다. 일단 세카두로 돌아가서 제대로 된 무대를 만든 다음에.
란드와르는 각본을 점검해 보았다. 그 대사들이 자신의 이미지에 어울리는지가 긴가민가했다. 너무 경박하게 행동했다는 후회가 올라왔지만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 애당초 안 어울린다 쳐도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제가 수액 괴물 핵을 깨는 동안 싸우시는 모습을 얼핏 봤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저보다 형님이긴 해도 나이가 많으신 것 같진 않은데요. 어릴 때부터 경험을 쌓았다 쳐도······.”
그래도 로안의 태도를 보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냥 지금 하고 치워야겠다는 결론이 났다. 바로 여기에 천사를 불러내 연극을 한 판 벌이는 것이다.
“야, 그런데, 아즈리온 신앙을 포기할 생각은 없단 거지?”
“당연하죠. 사나이는 근성 아닙니까.”
역시나 말로는 설득이 불가능했다. 한숨을 입속에 남긴 채 가볍게 박수를 쳤다.
“미오리타, 내려와요.”
돌연 신성한 광휘가 연구실을 뒤덮고 있던 그림자와 먼지를 몰아냈다. 란드와르는 청소 서비스의 효과에 내심 감탄하며 눈앞에 나타난 천사를 바라보았다. 짧게 친 금발이 발랄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흠, 흠, 아즈리온님의 종, 미오리타! 그분의 말씀을 받들어 여기 왔습니다!”
티아가 붙여 준 견습 천사였다. 이름은 미오리타.
견습인 만큼 급은 떨어졌지만 천사들이 할 수 있는 작업은 대부분 가능하다고 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빛과 후광을 뿌리거나, 성스러운 음악을 틀어 주거나, 기타 등등.
“어, 어어··· 엣취!”
로안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격렬한 기침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란드와르는 녀석이 제정신을 되찾길 기다리면서 연극의 정확한 내용을 떠올렸다.
등장인물은 셋이다. 아즈리온 교단의 떠돌이 사제와 광신도 용병, 그리고 천사.
사제는 우연히 만난 광신도 용병에게 자신이 바로 그 신임을 밝힌 뒤 성흔을 찍어 준다. 들러리로 천사도 나온다. 배경이 먼지에 뒤덮인 연구실일지라도, 괜찮다. 이따금 볼품없고 초라한 무대는 그 자체로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니까.
“로안.”
“예, 예!”
로안은 화들짝 놀랐지만,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란드와르는 고개를 조아린 청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겠지.”
동시에 그는 저 하늘에 있을 장본인을 떠올렸다. 본신을 참칭하는 인간에게 화를 터뜨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좀 막 나가는 일이긴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제동이 안 걸렸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 괜찮으면 어쩔 건가. 씨발, 짜르든가.
“···죄송합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어쨌거나 로안은 진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이미지 걱정을 한 것에 비해서는 각본대로 반응이 나와 주니 고마울 뿐이었다.
“아니, 너는 언제나 충성스러웠다. 배교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으며 강력한 적에 맞서 싸웠지.”
란드와르는 그 문장을 시작으로 준비되어 있던 연설문을 읊기 시작했다.
너는 지금까지 잘 했다.
포기할 수 있었을 텐데도 꿋꿋이 나를 섬겼다.
나는 너를 시험했으며, 네 충성심을 알게 되었다.
···이제 너를 옭아매던 제약을 모두 풀어 주겠노라.
로안 같은 광신도에게는 꿈만 같을 순간이었다.
“어째서 저 같은 마법사 따위에게······.”
“나는 내게 충성을 바치는 인간을 아낀다. 마법사일지라도 다르지 않아.”
“제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환란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그때, 네가 나를 위해 전장에 나서길 바란다. 아즈리온을 섬기는 마검사로서.”
“세상에는 저보다 더 훌륭한 전사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감히 이런 영예를··· 어떻게······.”
울먹이는 목소리를 보니 완전히 넘어간 듯했다. 이제 중요한 부분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맹약을 시키는 것이다.
맹약은 자신이 믿는 신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약속이었다. 어기면 바로 파문이니만큼 구속력은 보증된 셈. 보통은 교단에 찾아가서 신관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여기엔 천사가 있었다.
란드와르는 미오리타에게 눈짓하고서는 입을 열었다.
“대신 몇 가지만 약속해 다오. 맹약을 하란 이야기다.”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첫째, 너는 앞으로도 나와 함께 다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 정체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아라. 나를 선배 전사이자 동료 용병으로 대해라.”
“침묵을 지키겠습니다.”
“둘째, 나는 네 검술에 대한 열정은 물론이고, 마법에 대한 재능 역시 높게 사고 있다. 네 능력을 속박하던 굴레를 풀어 주었으니 둘 모두를 빠짐없이 수련하거라.”
“그 무엇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셋째, 나를 배신하지 말아라.”
“언제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세 차례의 문답이 끝난 후, 미오리타의 맑은 목소리가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이스트리아의 인간, 로안 노르덴홀즈는 아즈리온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이 맹약을 위반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자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대의 마음에 흔들림이 없길 바랍니다.”
허공에서부터 쏟아지는 엷은 빛은 그야말로 신비로워서 란드와르마저도 잠깐이나마 넋을 잃을 정도였다.
***
“와, 저거 제정신 아닌데······.”
소년이 빙글빙글 웃으며 대형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고작해야 열두어 살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왜소했고, 깡마른 몸에는 뼈의 윤곽이 모두 드러났다. 헝클어진 곱슬머리는 붉고 파란 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우스꽝스러웠다.
소년의 이름은 파울리스. 마공학자와 각인사, 연금술사의 수호신이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수수께끼와 마법적 원리를 다스렸으며 이스트리아의 만신전에서는 끔찍한 악동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저 인간은 그렇다 치고, 천사들은 기강 좀 잡지 그래?”
소년은 소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즈리온이 별 감흥이 없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 딱히 상관없다는 투였다.
“부하 괴롭히는 취미는 없다. 여기 오기 전부터 그랬어.”
“가만히 계시겠다? 그러니까 견습까지 멋대로 일을 벌이는 거야.”
“이왕 버릇을 고쳐야 한다면 네놈부터 어떻게 하고 싶은데.”
파울리스는 심드렁한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즈리온의 세계는 아주 단순한 논리로 굴러갔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모든 문제는 원인 제공자의 머리를 깨부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는 아즈리온이 잔꾀를 부리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외피를 뒤집어쓴 인간은 완전히 달랐다.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데다가 잔머리를 굴리는 법도 알았다. 저 몸으로 저러고 다니는 걸 보니까 낯설고 재미있었다.
“좋아, 일단은 내버려 두자. 보기 좋네. 머리는 너보다 잘 굴러가는 것 같고.”
“뭐?”
파울리스는 대꾸하는 대신 곧바로 자리를 떴다. 날이 저물면 저 인간의 꿈이라도 들여다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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