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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0화 (11/258)

10화: 실패한 연금술사의 숲

사람을 죽이는 건 쉽다. 그냥 칼로 가슴팍을 쑤셨다가 뽑으면 된다.

쉬운데, 이렇게 쉬운데, 왜 이렇게 어렵지. 씨발.

이강현은 잠시 많은 것을 후회했다. 그 이상한 게임을 끝까지 붙잡고 있던 점.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도장을 찍은 점. 그리고······.

아니다. 별로 안 많았다. 거기까지 후회했더니 더 이상 후회할 게 없었다. 물론 사업을 말아먹고 개인회생 절차를 밟던 시절을 떠올리자면 입으로 내장이 올라왔지만 그것과 이 상황은 별로 관련이 없었다.

“가까이 와라. 와서 영원한 고통을 받아들이거나··· 죽어라.”

이렇게 말하는 놈은 샤히드가 고용한 전사. 재생 옵션 붙어 있는 반지 잘못 꼈다가 수액 좀비가 된 남자다. 이름은 게임에 안 나와서 모른다. 그러니까 그냥 용병이라고 하자.

이런 상태라면 마음 편히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일단은 대화가 필요했다.

“칼 내려놓고 얘기 좀 합시다.”

“······.”

첫 번째 대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용병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칼을 쭉 내질렀다. 검신으로 일격을 막아 냈지만, 공세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칼끝이 잠시 물러나나 싶더니 위로 치솟으며 란드와르의 뺨을 스쳤다.

그게 방향을 꺾기 전에 서둘러 용병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놈이 균형을 잃으면서 다시 칼날이 멀어져 갔다. 뺨이 아프진 않고 축축했다. 목덜미도 축축하고 어깨도 축축해졌다. 안 죽이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신이 먼저 피를 봤다. 좋지 않았다.

짜증이 훅 올라왔다.

“씨발, 얘기 좀 하자고. 내가 너 죽이는 거 일도 아니니까. 지금 최대한 인내심 발휘하는 중이니까 대화로 풀자고.”

용병이 그 소리를 듣고는 멈칫거렸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는데도 왜인지 눈빛이 읽혔다. 테네브로즈가 자신을 저런 표정으로 바라보던 기억이 났다.

“그냥 풋내기인 줄 알았더니, 정신 나간 풋내기였군.”

역시나. 란드와르는 입을 열기에 앞서 말투를 가다듬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방금 전의 발언에는 너무 감정이 실려 있었다.

“알아서 생각하시고, 뭐 좀 물읍시다. 대답 듣기 전에는 제대로 못 싸울 것 같아서 그럽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답은 해 주마.”

“죽여도 됩니까?”

“뭐라고?”

“수액 괴물에 뒤덮여 있는 게 편해 보이진 않는데, 혹시 모르잖습니까. 의외로 좀 더 살아보고 싶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당사자 의견을 먼저 들어 보려 하는데······.”

란드와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힐끔 로안을 돌아보았다. 수액 괴물 파편들과 싸우느라 이쪽엔 관심도 주고 있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들었더라면 정신 건강을 의심받았을 테니까.

“재미있는 놈이군.”

반면 용병은 이미 심증을 굳힌 모양새였다.

“되냐, 안 되냐를 물었습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할 수만 있으면 해 봐라. 이렇게 된 이후로 피를 본 적이 없단 말이다. 칼로 허벅지를 쑤셔도 거기로 점액질이 밀려들어와서······.”

용병은 미칠 듯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갑자기 돌진했다. 땅에서 뻗어 나온 점액질이 란드와르의 발목을 옭아맨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제야 동의서에 도장까지 받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상대도 죽음을 원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건, 침입자의 죽음이건 간에.

여전히 내키진 않았지만,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야 했다.

용병은 란드와르에게 거의 근접했다. 란드와르는 순간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용병과 자신 사이에 충분한 간격을 만들었고, 큰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칼날은 깔끔한 원호를 그리며 상대의 가슴팍을 깊게 베었다.

반지가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기에는 너무 큰 부상이었다. 수액 괴물 껍질도 소용이 없었다. 까딱했다가는 아예 반 토막을 낼 뻔했다. 란드와르는 욕지기를 억누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로안!”

“예!”

고개를 돌린 로안은 땅바닥에 널브러진 기사를 발견했다. 소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 끝난 겁니까?”

“아니, 이제 저 커다란 게 움직이면서 뭍으로 올라올 거야. 내가 살점을 맡을 동안 넌 호수 위로 달려가라. 호수 한가운데에 핵이 있을 테니 그걸 부수면 돼. 거기서도 파편이 올라올 테니까 조심하고.”

“호수 위를··· 달린다고요?”

“얼리면서 나아가란 말이야.”

로안이 여기에서 죽은 이유가 이해가 갔다. 마력만 높지 싸우는 법을 아예 모르는 녀석이었다. 알려 주면 그대로 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세상엔 시키는 것도 못 하는 놈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쯤에서 생각을 매듭짓고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액이 발을 옭아맨 탓에 속도가 느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가 고개만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목소리에 가쁜 숨이 섞여 있었다.

“잘 됐군. 끝내라. 내 오른손에 반지가 있어. 그걸 떼어 내지 않으면 나는 계속······.”

그 지점에서 말이 멎었다.

수액 껍질로 뒤덮인 손가락은 차갑고 축축했다. 반지를 챙긴 란드와르는 무릎을 꿇었다. 용병의 눈동자가 천천히 미끄러지더니 그를 향했다. 죽음을 간청하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그렇게 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칼을 고쳐 쥐고는 높이 들어올렸다. 정오의 햇볕이 한순간 불어나듯 하더니 검을 집어삼켰다. 이제 그것은 순전한 빛이 되었다. 이상하리만치 푸른 하늘. 목덜미를 움켜쥐는 열기. 용병을 뒤덮은 그림자. 핏덩어리는 그림자와 수액 껍질 아래에서 울컥거린다.

이대로 칼을 내리꽂는다면 모든 일이 끝났다. 그것이 서로에게 좋은 결말임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용병의 얼굴을 보았다. 흐려진 눈동자가 잠시 번뜩였다.

그게 삶의 마지막 불꽃인지 칼날에서 반사된 빛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란드와르는 숨을 훅 들이쉰 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다.

***

“많이도 먹었구만. 열 명은 되는 것 같은데.”

“처음에 데려간 용병이 셋이었다던데, 그 후로도 사람이 더 온 걸까요?”

“의뢰 때문이 아니라 모험을 하려고 온 녀석들이 따로 있었겠지. 실패한 모양이지만.”

수액 괴물의 핵을 이룬 것은 하얗게 마른 백골과 마력이 깃든 폐기물들이었다. 뼈를 분리해 한쪽에 쌓아 놓은 뒤 폐기물은 그 옆에 따로 두었다. 약병에, 광물 찌꺼기에, 부서진 마력 결정까지. 돌연변이가 안 나오는 게 이상할 환경이었다.

정리를 모두 마치고 풀밭에 앉자 피곤이 몰려왔다. 몸의 피로라기보다는 정신의 피로였다. 뺨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아물었지만 용병의 목숨을 끊던 순간은 아직도 뚜렷했다.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기분이 묘했다.

로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직접 손을 대진 않았을지라도 시체를 본 건 마찬가지인데, 별 감흥이 없어 보이는 게 신기했다.

“넌 괜찮냐.”

“좀 힘들긴 한데 다친 곳은 없습니다. 전사님 덕분이에요.”

“아니,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는데 괜찮으냔 소리야. 이런 거 하고 다닐 나이도 아닌데.”

“아, 그 말씀이셨군요! 물론 그런 걸 즐기진 않습니다. 사실은 이런 생각도 가끔 해요. 그냥 집에서 뒹굴거렸으면 잔소리는 좀 들었어도 고생은 덜했을 거라고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랬다. 이 녀석은 도련님이었다. 그것도 마법에 엄청난 재능이 있는 도련님. 취향과 적성이 정면으로 충돌한 탓에 인생이 꼬였을 뿐이다. 네 삶이니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기엔 재능이 아쉬웠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세카두로 돌아가면 눈여겨본 식당에 가 볼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욕심만 냈는데 돈이 없었거든요.”

“계속 이러고 다닐 건지를 묻는 거야. 초급 용병으로 구르는 게 미래를 위한 선택은 아니지 않냐. 훨씬 괜찮게 살 수 있잖아.”

로안은 잠시 눈치를 보더니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말씀드리려 했는데요··· 혹시 저 데리고 다니실 생각 없으십니까? 시종이어도 괜찮아요.”

***

일단 카리나를 불러오라며 로안을 보냈다. 근처 바위에 걸터앉은 채 녀석을 공격대 로스터에 집어넣을 방안을 생각했다. 중거리 마검사라고 치면 나쁘지 않았다. 순간 화력도 충분하고 말도 잘 들으니까. 게다가 성장 가능성도 높으니까.

하지만 놈이 아직도 칼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란드와르를 따라다니면서 검술을 배우고, 주문은 최소한으로만 쓰고 싶다고 했다.

그건 곤란했다. 마법 실력을 기르지 않을 거라면 로안을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다. 게다가 아즈리온 신앙에서 오는 페널티도 해결해야 한다.

게임상에서 구현된 페널티는 두 종류. 주문력이 약화되고 근접 전투력도 늘지 않는다. 그냥 주문을 시전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물론 성흔을 받는다면, 신에게 인증 도장이 찍힌다면 페널티는 사라졌다. 테네브로즈가 멀쩡하게 마법을 쓰고 돌아다닐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건 예외 상황. 로안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흔을 받을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생각해 보자.

게임에서는 동료들의 전투 특성도, 신앙도, 대기 여부도 클릭 하나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이제는 뭔가를 바꾸려면 일일이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도 끔찍했다.

란드와르는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을 푸념을 속으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신인데, 씨발. 진짜 신은 아니어도 신 비슷한 건데. 칼만 잡으면 아즈리온이 대신 싸워 주는데. 안타깝게도 세상엔 칼싸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순간 생각이 다른 곳으로 도약했다. 어쨌거나 란드와르는 아즈리온의 화신이었으며 전담 천사 역시 불러낼 수 있었다.

천사의 정확한 직무는 아즈리온의 직속 부관. 광신도한테 성흔 하나 찍어 주는 것쯤은 쉬울 터였다.

“티아 씨, 우리 상의 좀 해 봅시다.”

하늘에 대고 전담 천사의 이름을 읊자 여자의 상반신이 담긴 환영이 눈앞에 나타났다. 검정색 정장과 각진 안경테가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성숙한 느낌의 미인.

“후결재를 받아야 하긴 하는데, 일단 성흔 자체는 제 선에서 찍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해 드릴까요?”

티아는 대뜸 본론을 꺼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란드와르는, 아니, 이강현은 벌컥 화를 터뜨렸다.

“아니, 씨팔. 생각을 읽고 있었어요? 이거 인권침해 아니야?”

진상을 부린다고 해서 나빠질 것도 없었다. 나쁜 것으로 치자면 이 제정신 아닌 판타지 세상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것부터가 이미 최악이었다. 심지어 모르던 사이에 사찰까지 당하고 있었다.

“<개인 정보 및 민감 정보 수집 동의서 7(선택)>에 서명하셨잖아요. 약관 다시 확인할 수 있게 인쇄해 드려요?”

티아는 욕설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CS 파트장의 귀감이었다. 강현은 심호흡한 뒤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조항 제대로 보여 주지도 않고 그러는 거,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약관 읽어 보시겠냐고 여쭤봤는데 됐다고 하셨잖아요.”

“계약서가 300페이지인데 어떻게 다 읽습니까. 대신 중요한 부분 고지는 해 줘야죠.”

“인감도장 찍으신 거 못 물려요.”

“불공정 계약으로 고용노동청에 신고한다.”

“여기 그런 거 없어요. 아실 분이.”

꿈에 자문 변호사를 부르지 않은 자신의 죄였다. 강현은 단념하고서는 하려던 얘기로 되돌아갔다. 단순히 로안에게 성흔을 찍어 준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준비할 게 더 있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내 생각을 읽든 뭘 하든 그 부분은 그쪽 분들 알아서 하시고, 할 일 없는 천사 하나만 보내 줘요. 시킬 게 있습니다.”

“네, 최대한 빨리 처리해 드릴게요. 그리고······.”

“그리고 뭐요.”

“생각으로 욕하는 것 좀 멈춰 주실래요? 제 머리가 다 아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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