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실패한 연금술사의 숲
“같이 가요. 방해가 되진 않을 거예요. 수도 서원을 했거든요.”
카리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가슴팍에 달린, 두개골 모양의 브로치를 가리켰다. 레오나 교단의 징표였다. 레오나 교단의 수도자는 정확히 두 종류. 치유사거나, 강령술사거나.
하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 상황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괜찮겠어요?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둘보다는 셋이 낫잖아요. 부상을 입는다면 제가 고칠 수도 있고요.”
<실패한 연금술사의 숲>은 타임어택형 시나리오. 부상당하기 전에 쭉쭉 진도를 밀어서 클리어를 보는 게 관건이다. 나타나는 수액 괴물의 개체수는 파티원 수에 비례해 늘어나기 때문에 치유사를 넣어갔다가는 역효과였다.
“···그냥 맡겨 주십시오.”
***
옳은 판단이었다. 사실은 저놈도 버리고 오는 게 좋을 뻔했다. 수액 괴물에 둘러싸여서 허우적대는 멍청한 놈. 슬슬 위험해지는데도 아무 주문도 시전하지 않는 걸 보자니 존경심마저 느껴졌다.
얼어붙은 수액 괴물에서 칼을 비틀어 뽑아냈다. 쩍 소리와 함께 덩어리에 균열이 생겼다. 발로 걷어차자 두 조각이 났지만 끝은 아니었다. 녹으면 바로 두 마리로 변할 터.
움직이는 놈이 더 없는 걸 확인한 뒤 로안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다친다.”
란드와르는 로안을 둘러싼 수액 괴물 하나에 칼을 쑤셔 넣었다. 칼이 박힌 지점에서부터 흰 기운이 덩어리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수액 괴물의 움직임도 둔해졌다. 잠시 뒤, 그는 단단히 얼어붙은 수액 괴물을 쪼개고서는 나머지도 처리를 마쳤다.
로안은 얼빠진 채 서 있기만 했다. 뺨을 툭툭 가볍게 때리고서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어, 어떻게 하신 겁니까? 핵이 아예 없던데요!”
“너도 수액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알지?”
“당연하죠. 마력이 깃든 물건이 주위의 습기를 흡수해서 생겨나는 게 아닙니까.”
마력의 깃든 물건은 수액괴물의 핵 역할을 했고 주위의 습기는 몸체를 이뤘다.
핵을 박살내지 않는 이상 수액괴물은 죽지 않았다. 흩어졌다가 다시 뭉칠 뿐이었다. 얼리더라도 핵은 멀쩡했다. 물로 만들어진 탓에 화염에도 면역이 있었다. 따라서 수액 괴물의 정석 공략은 예리한 날로 핵을 단번에 베어 내는 것.
하지만 이 숲에서 나오는 수액괴물에는 핵이 없었다.
“이건 그 반대야. 이 일대의 지하수 전체에 마력이 깃든 상태라고. 그래서 수액 괴물들이 땅에서 계속 올라오는 거고.”
로안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면··· 어쩌죠? 마력 흡수가 가능한 마법사는 세카두에 없어요. 타일라프람까지 가야 한다고요. 제 친척 중에 한 분이 계시긴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진짜 핵이 담긴 본체가 따로 있을 거야. 어쨌거나 수액 괴물한테는 마력이 단단히 뭉칠 부분이 필요하니까. 그 본체가 지하수를 끌어 쓰면서 이런 파편을 끝없이 만들어 내는 상황인 거지.”
“본체의 핵을 처리해야 이 녀석들도 다 죽는단 말씀이시죠?”
“의외로 이해가 빠른데.”
란드와르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로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본론을 꺼낼 때였다.
“이걸 처리하려면 냉기 계열 마법이 필요해. 이런 파편은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수가 늘어나니까, 모두 얼리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로안은 하얗게 얼어붙은 수액 괴물 덩어리와 지급품 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그래서 검의 각인이······.”
“봐라, 아즈리온 교단이 마법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마법은 이 세계를 이루는 원리 중 하나일 뿐이지 속임수나 사기 같은 게 아니라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마법을 쓸 수밖에 없어.”
란드와르는 목을 가다듬고서는 훈계를 시작했다. 별 관련도 없는 애한테 설교를 늘어놓으려니 기분이 묘했지만, 목숨을 구해 주는 입장에서 이런 얘기쯤은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게다가 아무 근거 없는 꼰대질도 아니고, 정론 직설이 아닌가······.
“네.”
“마법사 집안 아들내미라면서. 마법 실력은 꽤 있을 텐데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냐.”
로안이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네.”
“알아들었으면 집 가서 부모님한테 죄송하다고 빌어라.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 애 챙기면서 여기 넘어가긴 귀찮다. 저 다음부터는 나무도 많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수액 괴물은 계속 녹아내리고 있었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여기에 더해 새로 나오는 파편까지 함께 상대해야 한다.
“잠깐만요!”
걸음을 옮기던 란드와르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고, 뜻밖의 장면에 굳은 듯 멈췄다.
작고 예리한 빛 무더기가 로안을 감싸고 있었다. 눈부시고, 날카롭고, 차가운 빛이었다. 햇볕을 받아 번뜩이는, 수천수만 개의 작은 얼음 조각들. 펠로시가 해 준 각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한기가 밀려왔다.
“저도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을 거예요.”
충격적이었다. 마법엔 소질이 있으리라고 짐작은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더욱 충격적인 부분은 이놈이 원래는 여기에서 죽을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씨발.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데 죽었다고? 왜? 냉기 주문을 시전할 생각을 하지 못해서? 되도 않는 칼싸움 한다고 깝치다가? 아니면 공략을 몰라서?
뭐든 간에 일머리도 융통성도 없는 놈이 분명했다.
“···그 실력으로 아즈리온을 믿어? 왜? 이유가 뭐야?”
“왜냐하면 저는, 굳이 마흐트님을 안 섬겨도 마법은 충분히 잘 할 수 있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너무 쉬웠으니까 시시하기도 하고요······.”
“제정신이 아닌데.”
란드와르는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로안이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부모님도 그 말씀 자주 하셨어요. 포기를 안 하시더라고요.”
“포기를 하겠냐고. 아들이 마법 천재인데 뭘 포기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기증이 몰려왔다. 란드와르가 아니라 이강현이던 시절에도 지랄은 자주 했지만, 남 인생에 훈수를 둔 적은 얼마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 새끼가 용병을 한다고 날뛰는 건, 칼에 집착하는 건 혼자만의 손해가 아니라 인류와 세계의 손해였다.
“넌 도대체 뭐가 문제냐. 뭐가 문제라서 되도 않는 칼싸움을 한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그 나이에 가출해 가지고, 용병 일 뛰면서 대체 뭘 하겠다고··· 씨발······.”
“하지만, 그······.”
“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냐? 마법 안 쓰고 살래?”
“아, 네! 이번에는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마법은 안 쓰기로 다짐했거든요. 제 검술 실력으로만 승부를 보기로요. 하지만 사제님 말씀 듣고 생각이 변했습니다.”
대답을 듣자 마음이 놓였다. 완전히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냐.”
“아즈리온님은 마법도 싫어하시지만, 도망치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제가 마법 때문에 신앙을 포기한다면 그건 도망자일 뿐이죠. 언젠간 신께서도 제 마음을 알아주실 겁니다.”
곧바로 판단이 뒤집어졌다.
세상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생각이 있는 놈. 생각이 없는 놈. 생각이 이상한 놈. 마지막이 제일 위험하다. 생각이 없는 놈한테는 시키는 일만 하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생각이 이상한 놈은 그것마저도 불가능하다.
“부모님 고생이 많으셨겠네.”
“저, 그래도 나쁜 짓은 한 적 없습니다! 제발 착하게만 살아 달라고 어머니께서 그러셨거든요.”
란드와르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두통도 두통이었거니와 수액 괴물이 슬슬 깨어나고 있었다. 설득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파편 구간을 돌파할 때. 검을 단단히 움켜쥐고는 로안에게 눈짓했다.
로안이 기쁜 표정으로 뒤따라왔다.
***
울프 장원의 주인, 샤히드 울프는 유능한 연금술사였지만 자신이 다루는 힘을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다. 그랬더라면 마력 담긴 폐기물을 숲 한가운데의 호수에 퍼붓지는 않았을 테니까.
사실 그런 선택은 언제나, 모든 곳에서, 의도적으로 일어난다. 화학 공장들이 처리 비용을 아끼기 위해 몰래 폐기물을 내버리는 것처럼.
하지만 의도적인 무지에는 값이 따른다. 화학 공장들은 과징금 청구서를 받아들었고 샤히드 울프는 목숨을 잃었다. 그가 데려간 용병들까지도.
물론 그 값이 항상 정당한 것은 아니다. 샤히드와 용병들은 수액 괴물에 먹혀 죽었지만 한 명은 살아남았다. 재생 주문이 각인된 반지 덕분이었다.
반지는 용병을 셀 수도 없이 많은 죽음으로부터 지켜 주었으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용병은 살아 있었다. 수액 괴물에 뒤덮인 채. 살이 뜯겨 나갔다가 재생되는 고통에 끝없이 시달리면서. 한때 자랑거리던 반지는 이제 저주가 되어 있었다. 실로 역설적이고 개 같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란드와르는 용병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살인을 연습해야 한다면 그 첫 번째 상대는 용병이어야만 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
둘은 덤벼드는 수액 괴물들을 막아 내면서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을 뚫고 나아갔다. 어느덧 빼곡한 잎사귀 사이로 햇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란드와르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호수를 엿보았다.
거대한 수액 괴물이 호수 한가운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반투명한 암청색 살덩이를 통해 그 너머의 나무들이 들여다보였다. 정오의 빛이 수액 괴물의 불규칙적인 결을 따라 흐르며 복잡한 반사광을 만들어 냈다.
실로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게임이었더라면 움직임을 멈추고 스크린샷 버튼으로 손을 옮겼겠지.
“저거, 둘이서 처리할 수 있긴 한 겁니까? 너무 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긴 현실이었다. 란드와르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서리폭풍으로 못 얼려?”
“보셨잖습니까. 제가 마력 제어 연습을 거의 안 해서 범위가 좁아요. 주문을 오래 쓸 수도 없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때 좀 열심히 해 둘 걸 그랬는데······.”
저렇게 커다란 걸 눈앞에 두니 위기감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로안은 스펙을 제외하면 모든 게 폐급이었다. 마력 관리도 안 됐고, 무슨 주문을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순간적인 화력으로 밀어 버릴 뿐. 하수인 구간에서나 통하는 방식이었다.
“본체는 느리기 때문에 위협적이지 않아. 파편이 문제지.”
당연하게도 우두머리를 상대로는 다른 공략이 필요했다. 저기에 있는 것은 <실패한 연금술사의 숲>의 우두머리인 로열 젤리. 로열 젤리의 공략은 두 개의 페이즈로 나뉘어 있었다.
1페이즈에서는 미친 용병과 싸우면서 쏟아지는 수액 괴물 파편을 처리한다. 용병을 쓰러트리면 거기에서 2페이즈가 시작된다. 본체는 핵을 호수 한가운데에 남기고, 자신의 살점을 모두 뭍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다.
나머지 파티원들이 살점을 맡는 동안 특임조 하나가 호수로 들어가 핵을 깨부수는 게 2페이즈의 정석 공략.
“일단은 수액 괴물 앞에 있는 용병부터 처리해야 해. 내가 상대할 테니 네가 수액 괴물 파편을 막아라. 땅에서 계속 튀어나올 테니, 곧바로 얼린 다음 깨부숴야 돼. 꽤 멀리서 나오기도 하니까 유념하고.”
“알겠습니다.”
간략한 브리핑을 마친 란드와르는 호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수액 괴물의 파편은 유리알처럼 맑게 반짝이고 있었으며, 따뜻한 산들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무른 땅이 부드러운 쿠션처럼 그의 몸을 받쳐 주었다.
이 모든 평화가 깨지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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