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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8화 (9/258)

8화: 실패한 연금술사의 숲

“이거, 잘 보니까 의뢰 마감이 오늘까지인데··· 저보다 먼저 신청한 용병이 있습니까?”

“초급이 하나 갔어요. 어차피 의뢰인 분께서도 두세 명은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으니까 인원 걱정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사무원은 의뢰 수락서를 건네주었다. 품질 낮은 종이에 인쇄된 서류였다. 여기에 의뢰인의 서명을 받으면 그게 바로 고용됐다는 증거가 된다.

의뢰인의 이름은 샤히드 울프의 딸. 카리나 울프.

목적지는 세카두 시외의 울프 장원.

<실패한 연금술사의 숲> 시나리오는 이런 내용이었다:

울프 장원莊園은 목조 저택 곁에 작은 숲을 하나 둔 곳이다. 어느 날, 이변을 알아챈 샤히드 울프는 용병들과 함께 숲 수색에 나서는데.

하지만 수색대는 모두 실종된 데다가 상황을 파악하러 온 딸마저 사라지고 만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나선 플레이어는 숲 한가운데의 호수에서 거대한 수액 괴물을 발견하고······.

튜토리얼을 끝까지 진행했더라면 플레이어는 딸까지 죽은 뒤에야 세카두에 도착하게 된다. 보름을 앞당긴 탓에 정상적인 타임라인에서는 만날 수 없는 의뢰를 보게 된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무시한 다음 카리나와 초급 용병이 죽기를 기다릴지, 아니면 지금 바로 의뢰에 지원한 다음 두 명을 살릴지. 전자는 전리품을 두고 협상할 일이 없다는 게 장점이었다.

게임이라면 전자를 골랐을 것이다.

게임이라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그게 피할 수 없는 미래라면, 그 숫자만큼의 사람을 살리고 싶었다. 무슨 도덕이나 정의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

울프 장원까지는 도보로 열 시간쯤이 걸렸다.

다행히도 사무소는 용병의 빠른 합류를 위해 마공학 바이크를 빌려주고 있었다. 거점 도시마다 차원문이 설치되어 있긴 했지만 목적지는 보통 거기에서도 한참은 떨어져 있던 것이다.

운전면허는 1종으로 땄지만 바이크는 처음이었다. 할리는 물론이고 씨티조차 타 본 적이 없는데 이런 물건에 몸을 실어야 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묘했다.

투명한 엔진 룸 안에서 공회전하는 마력 결정이 눈길을 끌었다. 오프로드 오토바이만큼이나 크고 두꺼운 바퀴도. 아마도 고장 없이 노지를 통과하기 위한 용도겠지.

잠시 고민하다가 시동을 걸어 보았다. 외관이 낯설 뿐이지 잘 작동했다. 란드와르는 시외로 빠져나가며 속도를 높였다. 바람이 뺨을 스치면서 생각도 함께 실어 날랐다.

이 세계에 익숙해질 수 있을지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떤 건 끔찍했고, 어떤 건 낯설었으며, 어떤 건 재미있었다.

다행히도 마공학 바이크는 재미있는 축에 속했다.

***

카리나 울프는 침울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검은 드레스와 두개골 모양의 브로치가 인상적인 대조를 이뤘다. 낯선 방문객의 정체를 의심하던 그녀는 의뢰 수락서와 용병패를 확인하고서야 경계를 풀었다.

“지금 오신 게 다행이네요. 시내에 가서 처리할 일이 있었거든요. 서너 시간은 걸릴 거예요. 돌아오면 해가 진 다음이겠죠.”

“밤에 출발할 생각입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밤의 숲은 위험하죠.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면 더더욱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내일 열 시까지 여기로 오거나, 아예 여기에서 하룻밤을 보내거나. 후자가 편했다. 목조 저택은 대가족이 지내고도 남을 만큼 넓었으니까. 용병에게 내어줄 방 하나쯤은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카리나는 숙소로 쓸 방을 보여준 다음 응접실로 향했다. 앳된 얼굴의 소년이 긴장한 표정으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헝클어진 금발만 빼면 고생 한 번 안 하고 자란 놈처럼 생겼다.

란드와르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뒤 사무적인 인사를 건넸다.

“내일 함께 수색을 나갈 전사입니다. 란드와르라고 부르면 됩니다.”

“로안입니다. 저도 전사예요. 초급이고, 이번이 일곱 번째 의뢰입니다.”

청년은 지급품 장검을 힐끔 보고는 부끄러운 듯 덧붙였다.

“교단 소속이신 것 같은데, 말씀은 편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보다 한참 선배님이실 테니까요. 저는 아직 성년식도 못 치렀거든요. 열일곱이에요.”

알톤처럼 시비를 걸지 않는 건 고마웠으나 칼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최소한 자루에 달린 교단 징표는 어떻게든 손을 봐야 했다.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아, 맞다. 교단 사제들은 어릴 때부터 훈련원에서 지낸다면서요? 어떤 식으로 훈련을 하길래 다들 그렇게 실력이 좋은지 궁금합니다. 저는 도통 칼 솜씨가 안 늘거든요.”

“나도 몰라.”

무의식적으로 대꾸한 란드와르는 흠칫 놀랐다. 실제로 모르기야 했지만 꼬마에게까지 퉁명스레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꽤 싹싹한 놈인데.

그나저나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낙하산? 이 세계에 낙하산이라는 말이 있던가? 있을 법도 한데.

“훈련원을 거쳐서 사제가 된 게 아니야. 어쩌다 보니 소속만 이렇고, 평소에는 혼자 다녀.”

“어쨌거나 대단하신데요! 그만큼 실력이 있으니까 훈련원 출신이 아닌데도 뽑힌 거 아닙니까?”

로안은 진심으로 감탄하더니 신나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말하는 것만 봐서는 자신보다 이놈이 교단 사정을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눈치는 상당히 부족해 보이지만.

“그나저나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훈련원 출신 아닌 사제들은 우선순위에서 좀 밀린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요즘 갑자기 바빠졌다고 들었는데, 그런데도 일을 안 줄 정도입니까?”

“그런 게 궁금한 이유가 뭐야?”

질문의 의도가 의아했다. 자신이야 경우가 다르다 쳐도, 곁가지 사제를 상대로 이랬다가는 한 대 얻어맞아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사무실에서 책상 빠진 사람한테 왜 놀고 있냐며 묻는 꼴이 아닌가.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 듯 로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그, 무례한 질문이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사실은 저도 정식 사제가 되는 게 꿈이라서요. 많이 늦었지만······.”

그 말을 시작으로 대책 없는 사연이 술술 흘러나왔다. 원래는 유서 깊은 마법사 가문의 아들이었는데 검술을 배운답시고 가출을 했다는 것, 그런데 검술 실력은 생각보다 빠르게 늘지 않는데다가 마법을 쓸 일은 너무 많아서 신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

“미움을 받게 됐다고?”

“사제님도 아시잖습니까. 아즈리온께서는 주문을 싫어하시는걸요.”

<이스트리아 퀘스트>에서 각각의 신들은 신앙도에 맞추어 다양한 특전을 제공했다. 특수 기술부터 공격대 능력치 보너스까지. 신앙 조합이 중요한 이유였다. 모두 칼리그라를 믿게 해서 은신으로 고난도 구간을 패스하는 식의 플레이도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신앙 시스템에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들에게는 저마다 싫어하는 행동이 있었고, 그걸 어기면 곧바로 페널티가 들어왔다.

아즈리온 신앙은 폭발적인 화력을 제공하는 만큼 제약이 컸다. 주문 시전과 도망, 그리고 기습을 모두 금기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순수 무도가가 아니라면 믿을 수가 없었다. 특히 마법 계열이나 암습 계열 직군에게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로안 같은 마검사가 아즈리온을 택한 이유가 의문이었다.

“위험한 상황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쓰게 됐단 얘기지? 검술로는 상대가 안 되는데 마법을 섞으면 쉽게 싸울 수 있으니까.”

“예, 그렇게 됩니다. 아즈리온께도 미움 받고, 검술 실력도 안 오르고, 그렇다고 해서 다시 마법을 배울 수 없고··· 일이 꼬였죠.”

“그러면 굳이 신앙을 고집할 필요가 있어?”

“예?”

로안이 놀란 듯 되물었다.

“너도 알겠지만, 전사라고 해서 꼭 아즈리온을 모셔야 하는 건 아니야. 방패병은 보통 자렉을 믿고, 마검사는 마흐트를 따르니까 말이야. 아니면 파울리스도 괜찮지.”

란드와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같은 신을 섬기는 분께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혹시··· 비겁한 마법사 주제에 아즈리온님을 믿으려는 게 싫어서요?”

“그건 아니야. 네가 마법사든, 요정이든, 요정 마법사든 간에 난 신경 안 써.”

종족은 실제로 사소한 문제였다. 처음에 주어지는 동료부터가 요정족 암흑사제인데다가 추가 영입이 가능한 동료 중에서도 요정은 많았다.

하지만 신앙은 달랐다. 신을 잘못 고르면 아예 신앙이 없는 것보다 나쁜 결과가 나왔으니까.

“그냥 마흐트를 섬기면 될 텐데, 굳이 비효율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느냔 거지. 이야기 들어 보면 마법 실력도 괜찮은 수준 같고.”

“하지만······.”

“하지만?”

“멋지지 않습니까. 어릴 때부터 아즈리온 신화만 읽고 자랐단 말입니다! 사나이라면 뒤에서 비겁하게 얼음창이나 날려 댈 게 아니라 직접 칼 들고 싸워야죠!”

로안의 눈이 광신도처럼 반짝였다. 머릿속에서 병신 경보가 울렸다.

그랬다. 이놈은 전사의 신이 너무 좋아서 칼 들고 설치는 마법사였다. 심지어 실행력도 발군이었다. 열일곱 나이에 칼 들고 가출한 다음 용병 사무소를 찾았으니까.

열일곱. 란드와르는 잠시 자신이 그 나이에 뭘 하고 살았는지 돌이켜 보았다. 심심하면 야자를 째고 당구장으로 뛰어가던 기억이 났다. 걸려서 복도에 엎드려뻗치던 것도.

거기에 비하면 정말이지 진취적이고 결단력 있는 청소년이다. 진취적이고 결단력 있게 잘못된 방향으로 돌진해서 문제지.

이 세상에 병신이 이토록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판타지 세계라서 사람들이 나사가 하나씩 풀려 있나? 아니면 그냥 너무 적은 표본을 가지고 무리한 일반화를 시도한 결과일까?

란드와르는 눈을 반짝이는 어린애를 잠시 쳐다보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혼자서도 깰 수 있는 시나리오. 저놈 때문에 발목이 잡히진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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