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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7화 (8/258)

7화: 수련의 장

놈이 내건 조건은 잿불사냥개를 쓰러트리면 결투를 해 주겠다는 것. 진검을 쓰되 갑옷은 갖추지 않는 방식으로.

속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거절하면 겁쟁이고, 승낙하면 병신을 만들어 놓겠단 소리다.

“일도 못 받은 파랭이길래 아예 폐급인 줄 알았더니, 다른 이유였군. 이해가 가.”

알톤은 잿불사냥개가 쓰러지는 걸 보고는 허가 찔린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였다. 이제 놈은 일이 재미있게 되었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담고 있었다.

“이유가 뭐일 것 같냐.”

“홧김에 사람 죽이고 파문당할 놈이다, 이거지. 눈빛만 봐도 알아. 네 선배들도 느꼈을 테고.”

“그딴 소리는 가서 일기에나 쓰시구요.”

퉁명스레 대꾸한 란드와르는 칼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괴수의 배에 날을 들이밀던 순간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전투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거짓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조종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는 아즈리온이 있을 하늘 저편을 떠올렸다. 갑자기 신앙심이 충만해졌다.

“잠깐만. 그건 그렇고, 결투 시작하기 전에 기도 한 번 하자.”

“꼴에 교단 소속이라고.”

비웃음은 한 귀로 흘렸다. 눈을 감자 어설픈 기도문이 머릿속에 줄줄이 늘어졌다.

아즈리온이시여, 비록 진검을 들고 싸우긴 하지만, 저놈을 죽여선 안 됩니다.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른네 해를 대한민국에서 보낸 사람이며 그곳에서 살인은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 선고되는 흉악 범죄입니다.

제가 비록 성격이 개차반이고, 입에는 걸레를 물었거니와, 사업까지 말아먹었지만, 선은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최대한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거기까지 읊자 눈이 번쩍 뜨였다.

“너 때문에 기도했다. 사람 죽이기 싫어서. 힘 조절하게 도와 달라고.”

“재미있는 녀석이군.”

“아니다, 씨발. 역시 못 믿겠어. 나는 이러고 싸울 테니까 넌 진검 쓰든지 해라.”

란드와르는 칼집을 찾아 끼웠다. 껄껄 웃던 알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순간 머릿속에서 빠르게 주판이 돌아갔다. 쓸데없이 악명을 쌓는 거 아닌가? 이렇게 유명해져서 좋을 게 있나?

일단 유명해져서 좋을 일이란 없다. 하지만 미친놈처럼 구는 파랭이 사제를 아즈리온의 화신이라고 의심할 요정은 없을 것이다. 연막작전이라고 치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교단도 당연히 정보원을 붙여 놓았을 테고, 파르타의 귀에도 이 소식이 흘러들어가겠지만, 둘러댈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됐다. 시작하자.”

란드와르는 알톤을 바라보았고, 알톤은 심판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심판은 새하얀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였다. 늑대인간인 듯 손등이 짐승의 털로 덮여 있었다.

심판은 살짝 웃더니 하늘을 향해 팔을 쳐들었다.

“자아, 준비······.”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란드와르는 검을 움켜쥐고는 적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톤은 자신의 덩치만큼이나 큰 대검을 썼으며 검신에는 살을 파고들 수 있도록 갈고리 형태의 구멍이 나 있었다.

“오랜만에 사제 놈 피를 보겠군.”

알톤은 위협하듯이 대검을 대각선으로 내리그었다. 공기가 그 구멍을 통과하며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어디선가 피 냄새가 흘러들었다.

자신만의 느낌인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여기에서 피를 흘린 사람은 없으니까.

아직까지는.

그 낱말을 떠올리자 정신이 명료해지고 감각은 선명해졌다. 생각과 동시에 몸이 제멋대로 자세를 취했다. 동작이 미리 정해진 오토마타 인형에 몸을 밀어 넣은 것만 같다.

“···시작!”

여자의 외침. 대검이 울부짖는 소리. 자신이 쥔 것은 칼집에 담긴 지급품 칼. 때늦은 긴장이 핏줄기를 따라 질주했다.

패배가 두렵지는 않다. 목숨은 저 하늘에 계신 분이 알아서 살려 주실 것이다. 겁내는 것은 가능성이었다. 가능성. 만에 하나 칼집을 벗어 던지게 될 가능성. 알톤의 피를 볼 가능성. 어쩌면 내장까지도.

씨팔, 지금껏 본 내장이라고는 물고기 내장밖에 없는데.

란드와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도움이 되는 생각을 하자. 객관적인 사실들은 언제나 도움이 된다. 알톤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것. 그 속도가 결코 느리지 않다는 것. 그리고······.

두 검이 마주치기 직전에 몸을 숙여 오른쪽으로 빠져나갔다. 바람이 얼굴에 느껴졌다. 대검이 허공을 갈랐고 란드와르는 뒤를 쳤다. 칼집에 담긴 검이 호를 그리며 용병의 어깻죽지를 강타했다. 대걸레 봉이 부러지는 듯한 파열음.

대검이 경기장의 돌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쿵 소리를 냈다. 잠깐은 사위가 고요하더니 더 큰 소리가 풍랑처럼 몰아닥쳤다.

“어머, 알톤이 졌네요. 알톤이 졌어요! 치유사 불러 주실 분? 회복 주문 되시는 분? 물약 있으신 분?”

웅성거리는 목소리 속에서 심판을 맡은 여자가 소란스럽게 외쳤다. 숨이 갑작스럽게도 턱 막혀 왔다. 뼈를 부수던 순간의 기억이 손끝에 생생해서인 듯했다.

환영 괴수와는 달랐다. 메스꺼운 느낌이 승리의 쾌감 한구석을 뚫고 올라왔다. 칼집을 끼운 게 천만다행이었다. 란드와르는 가까스로 현기증을 억눌렀다.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감정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씨팔.”

상스러운 말투는 심경을 다스리기에 좋다. 그런 식으로 말할 때에는 모든 문제가 사소하게만 보이니까.

***

감정은 순간이었고 할 일은 한참이나 많았다. 사무소로 돌아온 란드와르는 가능한 의뢰 목록을 훑기 시작했다.

용병들이 귀찮게 말을 걸지 않아서 좋았다. 한 명을 제외하고.

심판을 맡았던 늑대인간이 계속 옆에서 치근거렸다. 간신배 같은 여자였다.

“나 성격 좋은 사람 아닙니다. 봐서 알 텐데.”

“뭐 어때요, 돈 벌어다 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지. 그래서 난 우리 전사님이 좋은데.”

“돈을 벌어 줘요? 내가? 내가 언제 그쪽 전사님이 됐습니까?”

“우리들끼리 따로 내기했거든요. 잿불사냥개는 잡을 거라는 쪽에 건 사람은 몇 명 있었는데, 알톤까지 이긴다는 건 나 혼자 걸어서. 그래서 판돈은 내가 싹 다 먹었죠.”

믿어 준 것은 고마우나 정상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설마 정보사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새어 나간 걸까? 반나절 사이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걸었습니까?”

“아, 좋은 질문이에요. 이게 다 계산이고 이론이거든요. 봐요. 알톤은 임무를 한 번 받고 돌아오면 적어도 이틀은 쉬어요. 그리고 그 이틀 동안······.”

란드와르는 판단을 수정했다. 여자는 간신배가 아니라 역배당 분석가였다. 그는 역배당 분석가의 사고방식을 알았다. 정배당 토토에서 300을 털린 다음 역배당에 10을 걸어서 50을 먹으면 그게 바로 자기 실력이라고 믿는 놈들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딴 돈이 얼마나 됩니까? 다 합쳐서.”

“다 합치면 약간 적자죠. 오늘 좀 따서 거의 메꿨는데··· 괜찮아요! 나 돈 잘 벌거든요.”

역시나 미친것이었다. 서른네 살의 이강현은 미친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자기 돈으로 하는 것이라면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데인 뒤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 돈 벌러 가십쇼.”

딱 잘라 말한 뒤 다시 의뢰 목록을 살피기 시작했다. 돈만 주는 의뢰, 통과. 제작 재료만 나오는 의뢰, 이것도 통과.

소거법을 적용하다 보니 란드와르도 잘 알고 있는 보조 시나리오가 하나 남았다. 장소는 울프 장원. 임무는 숲 탐색. 코어 아이템을 드랍하는 <실패한 연금술사의 숲>이었다. 이 시나리오를 용병 사무소에서 만나게 되다니 뜻밖이었지만, 확실히 맡을 가치가 있었다.

옆을 보았다. 여자가 아직 곁에 붙어 있었다.

“그러고 노닥거릴 거면 일 좀 도웁시다.”

“일요? 나 현장은 안 나가는데.”

“그쪽 데리고 의뢰받을 생각 없어요. 각인소 위치만 알려주면 됩니다.”

“바로 앞에 있네요!”

여자는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실력은 있는데 업장 차릴 돈은 없어서, 사무소에 죽치고 앉아서 각인해 주고 살아요. 여기 용병들은 다 나한테 받고 있으니까 성능은 의심하지 말구요. 엄청 좋진 않아도 돈값은 하거든요.”

란드와르는 고개를 들어 멀찍이 선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미리 짜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근처에 얼쩡거리진 않아도 대화는 모두 듣고 있던 모양이다.

이것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겠다는 계산이 섰다.

“잘 됐네. 돈 번 김에 각인 하나 합시다. 냉기로요.”

각인술은 물체에 주문을 고정시키는 방법이었다. 마공학 제품이나 전투 부적 등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고, 장비를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것 역시 각인술의 영역이었다.

<실패한 연금술사의 숲> 시나리오에 필요한 것은 냉기 속성 무기 각인.

“이거 원래는 비싼 건데, 우리 전사님이니까 특별히 공짜로 해 줄게요.”

“내 덕에 도박으로 벌어먹고 돈까지 받으려 그랬어요?”

“그래서 내 별명이 날강도예요. 날강도 펠로시.”

지급품 검을 건네받은 여자는 주머니에서 색이 서로 다른 마력 결정을 몇 개 꺼내들었다. 겉보기에는 보석 조각처럼 생겼지만, 칼날에 대고 누르자 부드럽게 문드러졌다. 형광 크레파스 같았다.

여자는 능숙한 손길로 각인을 새기기 시작했다. 란드와르는 마력 담긴 기호들이 원래부터 하나였던 듯 검신과 일체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게임에서는 클릭 한 번으로 끝났던 걸 직접 눈앞에 두니 느낌이 새로웠다.

“자, 됐어요! 한 번 하면 이틀쯤 가요. 효과 풀리면 다시 오구요. 공짜로 해 줄 테니까.”

“양심이 있긴 하군요.”

“농담으로 하는 소리지, 진짜 날강도면 이미 유령 됐죠. 칼 들고 마법 쓰는 사람들한테 돈을 어떻게 뜯어.”

각인을 마친 검에서는 눈 속에 파묻혔다 나온 듯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여자에 대한 판단을, 아니, 펠로시에 대한 판단을 다시 한 번 번복할 때였다. 정신머리에는 약간 문제가 있을지라도, 싫어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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