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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5화 (6/258)

5화: 수련의 장

인간 도시들은 대륙의 허리에 모여 있지만 그것을 하나로 규합할 지도자가 나타난 적은 없다. 아홉 개의 교단과 교활한 상인들, 군국주의적인 늑대인간들, 도덕을 거부하는 강령술사와 마공학자들, 그리고 누군가의 명령을 듣기에는 너무나도 강력한 마법사 가문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따라서 도시 각각은 느슨한 교류만을 유지하는 가운데 은밀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모두의 욕망이 모든 곳에서 충돌한다. 그들이 유일하게 공유하는 공감대가 있다면, 그것은 요정에 대한 적의일 것이다.

***

파르타 차테르지는 15년간 정보사의 수장으로 군림했다.

정보사는 아즈리온 교단을 주축으로 하는, 아홉 교단의 통합 정보기관. 다른 신들이 천계에 머무르는 동안 아즈리온은 화신을 내려 보내 인간계를 누빈다. 신의 흔적을 감추고 불필요한 소문을 차단할 방법이 필요했다.

“우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파르타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엄숙했지만 어절 각각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도록 조율되어 있었다.

“형제여, 자매여, 우리는 그날을 보았습니다. 잠든 자들이 깨어나 이 땅을 집어삼키는 것이 보입니다. 피와 전쟁과 살육이 보입니다. 무너지는 권세와 빛 잃은 영광이 보입니다.”

회당은 깊고 어두웠으며 모든 소리가 전쟁 전의 함성처럼 울려 퍼졌다. 청중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보입니다.”

그들의 손등에서 서로 다른 형태의 성흔이 타올랐다. 여기에 모인 모두가 정보사의 사제들이었다. 파르타는 계속 말했다.

“우리의 주인께서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느냐, 솔베른과 다고베르트와 하타울프가 이룬 것들을 기억하느냐 하셨습니다.”

“기억합니다.”

아즈리온은 무예와 살육의 신. 전운이 감돌 때마다 화신의 몸을 빌어 가장 먼저 현계를 밟는다. 그 화신은 한때 솔베른으로 불렸고, 그 다음에는 다고베르트였으며, 마지막으로는 하타울프였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이름을 더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나팔이 울리고, 그 이름이 들립니다. 우리의 주인께서 말씀하신 그 이름이 들립니다. 형제여, 자매여, 말하십시오. 여러분이 들은 것을 발음하십시오.”

머지않아 떠돌이 전사가 세카두에 도착할 것이다. 그 이름은······.

“···란드와르.”

그것은 성흔을 받은 이들이 공유하는 신탁이었다.

***

비즈니스맨의 삶은 수십 가지의 다른 태도로 이루어져 있다. 투자자를 모실 때의 태도와 거래처를 향한 태도는 달라야 한다. 동업자와 사무 보조를 대하는 태도 역시 같을 수 없다.

이강현은 그런 차이에 익숙했고 성격을 휴대폰 케이스 바꾸듯 갈아 끼웠다.

“씨팔.”

그러나 강현의 본성은 고상함이나 정중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편한 사람과 있을 때에는 입에 걸레를 물었다. 판타지 세상에 떨어져서 신의 사도가 되었을지라도 갑자기 바른 생활 사나이로 변할 수는 없단 말이다.

“왜 또 하늘에 대고 그러십니까. 헛것을 보시는 건 아닐 테고······.”

“뭐, 너한테 대고 해 줄까?”

“사양하겠습니다. 제 섬세한 마음이 상처를 입을까 걱정스럽군요.”

헛소리가 심한 것은 피차일반이라고 생각했으나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노닥거릴 바에는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편이 나았다.

참주가 부른 마법사가 차원문 가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카두로 넘어가면 거기에서부터 또 한바탕 연극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아즈리온 교단의 광신도들을 만난 다음, 신 행세를 해야 하는 것이다.

게임에서는 대사를 알아서 줄줄이 읊어 주지만, 여기는 현실. 모든 대사가 자신의 몫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테네브로즈에게 하듯 아무 말이나 늘어놓고 싶었다. 마음일 뿐이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 하는 법이니까.

“봐라, 사제야. 차원문은 또 다른 차원문이랑만 연결이 된다고. 우리가 세카두로 가면 그쪽 공용 차원문으로 나오게 된다는 소리거든.”

“그런 기초적인 건 설명 안 하셔도 되는데요. 저도 마법 쓸 줄 압니다. 차원문도 지겹게 타 봤고요.”

테네브로즈가 뚱하니 대꾸했다.

“조용히 하고 좀 들어라. 아무튼. 공용 차원문으로 나오면 그쪽 관리인들이 신분을 증명하라고 할 거야. 그런데 우리는 시민증이 없잖아. 교단 징표도 아직 안 받았고.”

“성흔 한 번 보여 주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일부러 광고하고 다닐 필요가 있냐. 변방에서 올라온 전사가 성흔 박고 있으면 눈에 확 띈다고. 사람도 많고, 말도 많은 동네니까 조용히 가자는 거야.”

게임의 관건 중 하나는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것이었다. 요정 세력이 아즈리온의 존재를 감지하자마자 난이도가 대폭 올라가니까. 시도 때도 없이 습격이 들어와서 기껏 모아 놓은 동료를 죽여 버리거나 장비를 털어 가거나 하는 식이다.

튜토리얼이야 차원문에 먼지 쌓인 변방이니까 대충 넘어갔을 뿐이지, 성흔은 최대한 감추는 편이 좋았다. 도시에서는 특히.

“어차피 교단 사제들도 신탁을 받은 상태야. 그러면 굳이 성흔을 꺼낼 필요가 없거든. 내가 아즈리온 교단에 소속된 전사인데 징표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여기 교구 사람들은 나를 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걔네들이 알아서 확인을 해 줄 거 아니냐.”

“뭐, 그거야 그렇지요. 고위 사제들도 진작 준비를 마쳤을 테고요. 나으리께서 입조심을 제대로 하실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만······.”

“넌 나한테 뭐라고 하기 전에 거울부터 보고 말해라.”

자신도 자신이지만 요정도 문제였다. 예의와 눈치가 있어야 할 자리에 비아냥을 탑재한 놈이다. 교단으로 간다면 사제들에게 이 녀석도 소개해야 할 텐데, 잘 될 거란 확신이 없었다.

“교단 본부 들어가면 요정인 거 들킨다고. 경계가 얼마나 심한데 환술 정도는 바로 뚫지. 할 말은 미리 생각해 둬야 할 거다.”

“길게 떠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나으리께서 제게 성흔을 내리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하기야 그것도 그랬다. 란드와르는 아즈리온의 화신인 데다가 테네브로즈에게는 성흔이 있었다. 놈을 적대하는 것은 신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과 똑같은 일.

“물론 저도 인간들이 요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압니다. 나으리께서 걱정하시는 것도 그 부분이겠지요. 대놓고 드러내진 않겠지만, 다들 제 충성심을 의심할 겁니다.”

“오냐.”

“그 경우엔 3교구에서 있던 일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제가 나으리를 꽤 돕지 않았습니까.”

화신은 만능이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긴 하지만, 치명상을 입으면 죽을 수도 있다. 육신에 갇힌 이상 물리 법칙의 방해를 받는다. 혼자의 힘으로 교당에 모인 몇 백 명을 쓸어 죽이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따라서 3교구에서의 전투는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란드와르가 요정들을 처치하고, 테네브로즈는 그 영혼을 제물로 대규모 혼란과 속박을 시전한다. 란드와르는 상태이상에 걸린 요정들을 마저 죽인다. 그 후 앞선 과정을 다시 반복한다. 모든 요정이 죽을 때까지.

도망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테네브로즈의 보조 덕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야스와다의 요정들은 그 사태를 녀석이 배신자들과 짜고 벌인 일로 착각하고 있었다.

도움이 된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하면 오히려 반감만 살 것 같은데. 아즈리온 교단은 마법사랑은 사이가 안 좋아. 요정 마법사라면 특히 질색이고.”

“의심을 풀 방법 중 하나일 뿐이지, 저로서도 사제들에게 호감을 얻을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야스와다에서도 절 좋아하는 요정은 손에 꼽았으니까요.”

왜인지 알 것 같았다. 란드와르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알아. 친구 없어 보여.”

“알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갑이 되어 보기도 했고 후배를 갈군 적도 있지만 사이비 종교를 창설한 경험은 없었다. 한계가 느껴졌다. 다행히 신 흉내에도 슬슬 끝이 보였다.

“모두 이해했습니다. 하계에 머무르시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중년인은 파르타 차테르지. 교단 정보사의 수장이자 유명한 광신도였다. 이 인간 앞에서는 표정 관리와 말투 관리를 동시에 해야 했다. 심각했다.

“만일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즉시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그래도 아직은 머리에 힘을 줄 때였다.

계산기를 굴려 보자. 돈은 숫자에 불과하다. 강화와 제작 재료 역시 부차적이다. <이스트리아 퀘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시간이다. 제자리에 멈춰 있는 기회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발맞춰 움직인다.

튜토리얼을 건너뛰어서 보름을 벌었다. 그동안 보조 시나리오를 몇 개는 더 깰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곧바로 핵심 시나리오에 진입한 뒤, 열흘 남짓의 차이가 어떤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알아볼 수도 있다. 대개는 일을 빨리 끝마칠수록 이득이니까.

그 전에 하나를 처리하고 넘어가야 했다.

“품질은 일절 신경 쓰지 않을 테니, 평범하고 수수한 검을 마련해 다오. 떠돌이가 쓸 법한 것으로.”

기본으로 주어지는 망치는 일종의 함정이었다. 성능이 최상급이긴 하지만, 함부로 장착하고 다녔다가는 난이도가 급상승했다. 요정 세력에게 정체를 들킬 확률이 극도로 높아지는 탓.

따라서 초중반에는 망치를 빼 두는 게 상책이었다. 어차피 나무 막대기를 들어도 인간 흉기일 캐릭터니까.

“교단 지급품은 어떠신지요? 평범한 사제들이 쓰는 것이지만, 성능이 좋습니다.”

란드와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외적인 위장을 떠올렸다.

아즈리온 교단 소속의 떠돌이 전사. 무기는 지급품을 쓰는데다가 교단 징표는 청색이다. 청색은 신참을 갓 벗어난 등급. 존중을 받기커녕 얕잡혀 보이지나 않으면 다행일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딱 적당했다. 중요한 안건이라면 정보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아랫급의 사제들에게는 정체를 밝힐 필요가 없으니까.

“일단은 그 정도면 됐다. 평범한 사제들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군.”

“알겠습니다. 혹시 행선지를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용병 사무소에 들를 생각이다. 수련의 장에서 손을 풀어 보려 해.”

수련의 장은 일종의 훈련 시설이었다. 마법으로 환영 괴수를 불러내 모의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용병 사무소에서도 용병들의 연습과 급수 산정을 위해 하나씩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일처리에 나서기 전에, 전투력 측정을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수련의 장이라면 교구 내에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감히 권고드리자면, 보안이나 시설 면에서는 그 편이 더 나으리라 생각됩니다.”

돌아온 것은 정석적인 반론이었다.

란드와르는 다시 한 번,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런 것쯤은 당연히 안다. 말이 좋아서 용병이지 실제로는 프리랜서 건달. 반면 아즈리온 교단은 정규 군인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시설은 무조건 교구 쪽이 좋다. 구경꾼들이 모두 교단의 사제라면 소문날 걱정도 없는 셈.

하지만 확신이 없었다. 환영 괴수를 이길 자신이 없단 말이다. 전투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리란 보장을 받긴 했지만, 실제로 겪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변방에서 괴수 한 마리쯤은 잡아 보고 왔어야 했는데. 후회를 한다고 해서 지나간 기회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사제들 앞에서 초급 괴수도 못 깨면? 좆 되는 거지······.’

말 그대로 좆 되는 상황이었다. 시설이 좋든 말든 상관없으니 그냥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하고 싶었다. 란드와르는 최대한 심각하고 사연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반론이 돌아오지 않도록.

“이유가 있다.”

신 노릇 하기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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