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참주와 별점술사
“쉿··· 겁먹을 필요 없어. 괜찮아. 우릴 잡으러 온 게 아니란다.”
이스빈드는 무릎을 꿇고 칼린카의 목덜미에 손을 밀어 넣었다. 주름진 손가락이 털에 잠기더니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만족스러운 숨소리로 변했다. 그는 잠시 괴수를 달래다가 다른 둘을 돌아보았다.
“그때 재판을 받은 아이예요. 다른 하나는 느, 늙어 죽었고 이 아이만 남았네요. 이제는 큰할머니가 되었답니다. 정원에 있는 꼬마들 모두가 이 아이의 핏줄이거든요. 그래서인지 다, 다들 요정을 싫어해요.”
칼린카가 함께 고개를 돌리자 목뒤에 숨어 있던 고리 모양의 흰색 털이 드러났다.
란드와르는 짐승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제미알과의 전투에 등장하는 칼린카 중에서 가장 강한 녀석. 이놈까지 잡으면 별점술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시나리오가 끝난다. 게임에서는 그랬다.
느낌이 묘했다. 튜토리얼에 잠깐 얼굴을 내비치는 괴수조차 이런 사연을 품고 있다는 점이, 이 순간은 세계의 지극한 일부일 뿐이란 점이.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다들 요정을 싫어한다니, 고양이들과 함께 야스와다에 돌아갈 수는 없겠군요.”
“돌아갈 생각이 있었더라면 도망쳐 나오지도 않았을 테지요. 귀, 귀족들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모, 모, 모두 미치광이입니다. 싫습니다. 물론 이 아이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요?”
“이 아이는 저를 좋아합니다. 이 아이가 낳은 꼬마들도 저를 좋아하지요. 이곳의 인간들은 저와 꼬마들을 받아 주었습니다. 저는 이곳이 좋습니다. 그래서 꼬마들도 이곳을 좋아합니다. 제가 아는 것은 그게 다입니다.”
이스빈드는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란드와르는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다른 고양이들도 이 녀석만큼 말을 잘 듣습니까?”
“대부분은요. 대부분은 제 할머니를 따르죠. 그런데 어린 것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싸, 싸울 생각만 하고 있어서······.”
옛 신의 별들이 움직이면서 공기 중의 마력이 짙어졌다는 게 이스빈드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어린 것들이 힘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건드리지는 않아요. 만약 그랬더라면 이 아이가 먼저 혼을 냅니다. 성 근처에 가면 다, 다른 괴수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그쪽에 어슬렁거리는 것뿐이에요. 보름. 보름만 지나면 별들도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아무 일이 없을 겁니다.”
별점술사를 죽일 수는 없었다. 자신의 죄책감이 아니라, 성의 사람들 때문에. 칼린카들이 사라지면 다른 괴수가 그 자리를 차지할 테니까. 하지만 여기에 남은 채 보름을 허비할 수도 없다.
해결책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이스빈드가 직접 참주에게 진실을 말해야 했다.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해 동안 이 성을 지켜온 별점술사에게, 그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했던 참주에게.
우정은 중요하지. 우정은 중요한데, 씨발, 세계가 더 중요했다. 자신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세카두로 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제미알.”
인간으로서의 이름을 듣자 이스빈드의 표정이 무언가를 직감한 듯 어두워졌다. 란드와르는 사무적인 어투를 유지하려 애쓰며 계속 말했다.
“우리는 세카두로 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시간을 지체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
“···예.”
“가서 참주에게 말해요. 당신은 사실 요정이고, 성 근처에 나오는 칼린카들은 당신이 기르는 고양이라고. 그래야 합니다.”
이스빈드는 등을 돌리고는 칼린카를 빤히 응시했다. 고양이를 닮은 괴수는 눈을 감은 채 고롱거리는 숨소리를 뱉고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무겁디무거운 정적 속에서 밤의 냄새만이 더욱 강해졌다. 흙과 아릿한 풀과 썩어 가는 낙엽의 냄새였다. 평온과 고요의 냄새였다.
끔찍하게도 긴 시간이 흘렀다. 이스빈드는 결연한 표정으로 둘을 돌아보았다.
“참주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제나 그럴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때가 왔을 뿐입니다.”
종막終幕이 코앞에 있었다. 여기에 피 냄새가 더해지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
참주의 이름은 사토리스.
대전쟁 당시, 이 성을 맡던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먼 조상의 이름을 물려받은 셈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괴수를 무찌른답시고 홀로 요정들의 땅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일이다.
이제 그는 이름보다는 참주라는 직위로 불리길 더 좋아하는 중년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영웅이 되기엔 너무 늙었고 평범했으며 책임질 사람은 한참이나 많았다.
모두 그만두고 다 함께 대도시로 떠날 궁리를 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수천 명을 차원문에 태우기엔 마력 결정을 살 돈이 없었고 도보로 행군하기엔 거리가 멀었다. 도시에서 살아갈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엔 포기하고 변방에 남았다. 그의 선조들처럼.
포기한 뒤에도 사토리스는 때때로 핏줄을 생각했다. 전쟁 영웅의 후손이라는, 허울뿐인 영예를 생각했다. 전쟁이 없었으므로 전장도 없으며 전리품 역시 없었다. 사실은 전쟁 중이라고 해서 그럴듯한 공훈을 올렸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요정들의 땅을 뻔질나게 들락거렸지만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마지막으로 갔을 때에는 곰 형태의 괴수와 단신으로 싸우다가 죽을 뻔했다. 아마도 별점술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사토리스는 별점술사의 오두막에서 붕대에 휘감긴 채 눈을 떴다. 상처가 모두 나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리고 함께 성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의 삶은 소소한 기적 같았다. 엄청나진 않아도 돌이켜 보면 기묘한 일들이 이어졌다. 별점술사는 변방에 머무르면서 수많은 미래를 일러 주었다.
곧 기나긴 비가 쏟아질 테니 낟알이 썩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 마구간에 불이 날지도 모르니 감시인을 보내 두라는 것, 그리고······.
모든 예언이 맞아떨어졌고 괴수들의 습격 역시 줄어들었다. 변방에서 썩기보다는 대도시로 올라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별점술사는 이곳에 남았다. 모든 선물을 마다하고 성 바깥의 마당이 넓은 집만을 원했다.
사토리스는 생각했다. 도대체 어째서? 왜?
답을 알 기회는 몇 차례 있었다.
레오나 교단의 전임 사제는 별점술사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며 경고했다. 그는 순환 근무가 끝나자마자 도시로 돌아갔다.
칼 솜씨가 뛰어나던 경비대장은 별점술사가 괴수를 쓰다듬는 모습을 봤다고 증언했다. 그 역시 도시로 떠났다.
별점술사 얘기를 하던 모든 사람이 도시로 도망갔다. 별점술사만 남았다.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된 일입니다. 지금까지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중년인의 얼굴이 천천히 흩어지며 요정족 청년의 것으로 변했다. 사토리스는 오래된 의문이 답을 찾는 순간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요정이 얼마나 오만하고 잔인한 족속인지는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그들이 제국을 이루던 시절에 인간은 노예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인간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아홉 신이 내려왔다. 대전쟁이 일어났고 제국은 무너졌다.
그리고 요정은 자신들이 지켜 낸 마지막 땅에 남아서······.
그러나 사토리스는 역사나 신화를 몰랐다. 한때는 영웅담의 모든 문장을 외우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다.
대신 낡은 성벽과 푸석거리는 빵과 도시로 떠나기엔 별다른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그의 세계를 채웠다.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세계였다.
이스빈드는 그 초라한 세계에 충성을 바쳤다.
사토리스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어쨌거나 대화로 해결이 됐군요. 안 죽인 게 다행입니다.”
“동의한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튜토리얼대로 일이 흘러갔더라면 결말이 안 좋았을 터였다. 참주에게도, 이스빈드에게도, 성의 사람들에게도. 게다가 자신은 그 무엇도 죽이지 않으면서 보름을 벌었다. 모든 면에서 이득이었다. 내친김에 점도 한 번 쳤다. 별 소용은 없었지만.
“근데 내 미래는 왜 못 읽었을까. 그렇게 유능한 놈이.”
“나으리의 미래를 점치려면 운명의 신쯤은 와야 할 겁니다.”
“그건 그렇다만.”
란드와르는 이스빈드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던 순간을 떠올렸다. 란드와르를 계산에 넣는 순간 별의 흐름이 모두 일그러진다나 뭐라나.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앞날을 묻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자신이 죽일, 죽여야 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알고 싶었다. 이스빈드는 살렸다 쳐도 다른 우두머리를 똑같이 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아직은 무기조차 제대로 휘둘러 본 적이 없었다. 란드와르는 물끄러미 망치를 내려다보았다. 고기 다지기에 딱 좋게 생겼다. 그게 돼지고기가 아니라 요정 고기라서 문제지.
“사제야.”
“예?”
“3교구 교당에서 죽은 요정이 몇 명이냐?”
“이백오십육 명하고도 다섯이 더 됩니다만, 그중에서 나으리께서 취한 목숨이 얼마고 제 몫이 얼마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세다가 그만두었거든요.”
수를 모두 기억하는 것부터가 용하지만, 끝까지 세어 봤으면 정말로 미친놈이다. 란드와르는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낯선 도덕관념의 소유자 앞에서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본론으로 넘어갔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가 지금은 배신자 신세라 쳐도 원래는 동료였던 애들 아니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신적으로 충격 같은 게 없냐 이거야. 눈앞에서 동족 몇 백 명이 죽었는데.”
“허,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모르는 사이에 아즈리온의 신격이 변한 겁니까? 파괴에서 자비로요? 아니면 사랑과 용서입니까?”
문득 영혼이 바뀐 게 이 요정에게도 좋은 일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진짜 신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이미 시체가 되었을 텐데.
“그딴 식으로 말해도 내버려 두는 게 자비다, 새끼야.”
란드와르는 그렇게 내뱉고서는 테네브로즈의 배경을 떠올렸다.
사실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갔다. 이 녀석은 아즈리온이 3교구를 청소하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누명 때문에.
배신하지 않는 쪽이 이상했다. 똑같은 처지였더라면 자신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간 테네브로즈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흘러들었다.
“누군가를 죽이면서 동정을 느낀 적은 있습니다. 그러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때는 차라리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하나의 단어가 머릿속에서 형태를 뒤바꾸며 서로 다른 문장을 만들어냈다.
익숙해질 수 있다.
익숙해져야 한다.
익숙해질 것이다.
튜토리얼을 건너뛰었으니 세카두에서 보름을 더 쓸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그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일단은 손에 피를 묻혀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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