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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3화 (4/258)

3화: 참주와 별점술사

란드와르가 별점술사를 만날 동안 테네브로즈는 바깥에서 고양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따로 확인시킬 게 있었다.

“안전한 놈으로 데려왔지?”

생각을 해 보겠다며 숙소로 돌아온 참이었다. 란드와르는 문이 꼭 닫힌 것을 확인하고서는 말을 꺼냈다.

“새끼가 한 마리 있더군요.”

테네브로즈는 품에서 새끼 고양이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바닥 두어 개를 이어 붙인 크기였고, 기절한 듯 축 늘어진 상태였다. 겉보기에는 특이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손끝에 마력을 모아 등줄기를 쓰다듬자 고양이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척추가 살을 뚫고 올라오며 뾰족뾰족한 뿔을 만들었고 다리는 굵어졌다. 크기 역시 일어난다면 사람의 무릎에 닿을 수준.

네발짐승 계통의 괴수, 칼린카였다.

“야스와다에서는 많이들 기른답니다. 그만큼 사고도 많이 나고요. 평소에는 평범한 고양이지만, 마력을 흡수하면 이렇게 되죠.”

“별점술사 녀석도 확인했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요정이지요. 환술이 조잡하던데, 촌구석이라 지금껏 무사했던 모양입니다. 그 수준으로 인간 도시에 들어가면 단번에 들킬 테니까요.”

튜토리얼은 이런 식으로 전개됐다. 플레이어는 밤마다 나타나는 칼린카들을 때려잡다가 가장 큰 놈을 죽이지 못하고 놓친다. 놈은 별점술사의 저택으로 도망치고, 플레이어는 거기에서 제미알이 괴수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새끼 괴수를 내려다보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죽여야 되냐?”

죽여야 했다. 게임에서는 사연을 들어 보지도 않고 죽인다.

하지만 그는 떠돌이 전사 란드와르이기 이전에 현대인 이강현이었다. 실제로 해 본 살생이라고는 출조를 가서 생선 모가지를 딴 것뿐. 게임에서 하듯 사람을 찔러 죽일 자신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서른네 해를 살아오면서 한 번도 살인 욕구를 느낀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후배 때문에 사업이 된통 꼬였을 때에는 진심으로 식칼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강현은 대한민국의 상식인이었고, 그래서 가만히 화를 삭였다.

게다가 이스빈드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엔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안 좋은 시기에, 안 좋은 이유로 엮인.

“사제야, 어떻게 할까? 가서 죽일까? 아니면 그냥 참주한테 얘기하고 끝내?”

“그거야 나으리 마음이시지요. 단번에 죽일지, 아니면 이야기를 해 보고 죽일지. 물론, 말을 듣진 않을 겁니다.”

“알던 사이냐.”

“확실하진 않지만 짚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칼린카를 기르는 자는 셀 수도 없이 많고, 별의 운행을 읽을 줄 아는 자들도 어느 정도 있고, 인간들의 땅으로 도망친 자 역시도 몇몇 있지만··· 셋 모두는 하나뿐입니다.”

제미알의 본명은 이스빈드. 평민 출신이지만 별점술로 유명세를 얻은 사내였다. 한창때에는 귀족들마저도 그를 한 번쯤 만나 보고 싶어서 줄을 섰다고 했다.

“저 역시 이스빈드에게 미래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운이 따를 것이나 머지않아 명예와 지위를 모두 잃을 거란 말을 들었지요. 제가 추적대 소속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미친 소리라고 여겼지만······.”

추적대는 죄인과 배신자를 붙잡는 일을 맡았으며 그만큼 영향력이 컸다. 출세의 지름길이나 다름없는 조직.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결국엔 이스빈드가 옳았군요. 명예와 지위를 모두 잃고 배신자가 되었으니까요.”

“실력은 확실한가본데.”

“자, 나으리. 이스빈드가 별점술에는 탁월했을지 몰라도 별점술사로서는 낙제였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미래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말을 듣기 위해 점술사를 찾기 때문입니다.”

이스빈드는 자신이 본 미래를 정직하게 읊었다. 좋건 나쁘건 간에. 그게 문제였다. 자존심 강한 명문가 요정들은 평민 별점술사가 저주를 퍼붓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귀족 꼬마 하나가 악담을 듣고는 열이 잔뜩 올랐지요. 친구들과 함께 별점술사를 죽이러 간 겁니다. 그런데 천운이었는지 악운이었는지, 그날 밤은 마력이 꽤나 짙었고······.”

이스빈드의 애완 칼린카는 귀족 도련님 셋을 찢어발겼다. 처분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귀족 꼬마가 화를 자초한 것이라 보는 쪽도 있었고, 이스빈드의 잘못이라 보는 쪽도 있었다. 의회는 격론 끝에 형벌을 결정했다.

“사실 심하지도 않은 벌이었습니다. 그냥 칼린카를 죽이란 것뿐이었으니까요. 인간들도 사람을 물어 죽인 개는 살처분하지 않습니까?”

“고양이를 살리고 싶어서 도망쳐 왔단 얘기구만.”

“직접 만나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인간들의 기준으로도 본성이 악한 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칼린카 두 마리를 지키기 위해 요정 사회를 떠났는데, 서른 마리를 죽일지는 모르겠군요.”

사연을 듣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시도는 해 볼 일이었다.

***

란드와르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주위를 둘러보겠다며 성 바깥으로 향했다. 별점술사의 집까지 가는 길은 기억하고 있었다. 두터운 어둠 속에서 고양이들의 눈동자가 도깨비불처럼 날아다녔다.

“이게 다 괴수란 말이지.”

“예. 그러니 이스빈드를 죽여야 한다면 일단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쪽을 권하겠습니다. 개만큼이나 충성스러운 짐승이거든요. 마력을 완전히 흡수하면 사람보다도 커지고요.”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자고.”

대화의 여지가 남은 이상 살인은 달가운 선택지가 아니었다. 란드와르는 문을 두드리고서는 이스빈드가 나오길 기다렸다.

“낮에 뵌 저, 전사분이시군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위기감을 느끼는 모습은 아니었다. 테네브로즈가 빙긋 웃더니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별점술사들은 제 미래를 보지 못한단 말이 있지. 그게 사실인지 항상 궁금했는데, 드디어 답을 찾았군.”

테네브로즈의 손바닥이 콧잔등을 스쳤다. 순간 이목구비에서 앳된 느낌이 사라지더니 갈색 더벅머리가 물결치는 은발로 변했다. 동시에 이스빈드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아니면, 오늘은 아직 별의 운행을 읽지 않았나? 점칠 시간을 조금 줄까? 그대의 앞날이 어떨지는 나도 알고 싶거든.”

웃음기 섞인 질문에 이스빈드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서는 고개를 조아렸다. 당장에라도 죽을 듯한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하찮은 배신자가 어둠달의 테네브로즈를, 뵈, 뵙습니다.”

“가문의 이름을 부를 필요는 없어. 그대가 알려 준 미래가 옳았으니까. 이제는 서로 똑같은 처지야. 자, 이걸 보라구.”

테네브로즈는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자신의 성흔을 보여주었다.

이스빈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치 형태의 불꽃과 요정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짧은 시간이 흐른 후, 안도의 기색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현관에 계속 서, 서 계시기보다는 안으로 들어오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쭙고 싶기도 하고요.”

란드와르는 기꺼이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낮에는 깨닫지 못한 냄새들이 뒤섞여 났다. 우유의 달큰한 향기. 이름 모를 찻잎과 향신료. 오래된 책 속에서 삭아 가는 잉크.

이런 거실의 주인이 엄청난 악당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손에 피를 묻히는 시점은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미뤄 두고 싶었다.

“무, 무, 무엇부터 여쭤봐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추적자님이 여기에 찾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요새는 별들이 너무 혼란스럽게 움직여서······.”

다과를 가져온 이스빈드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맞은편의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요정족 사제가 인간 전사와 동행하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듯했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에게 눈짓했다. 동족끼리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를 추적자라고 부를 필요는 없어. 그건 내가 야스와다에 있었을 때조차도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 버렸거든. 얼마 전에는 부제사장 자리까지 올랐지.”

테네브로즈는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3교구 부제사장이 되긴 했으나 영예의 기간은 길지 않았다. 교당 지하감옥에서 열 명 남짓한 죄수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던 것이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했다. 신임 부제사장이 제물대에 올랐다.

테네브로즈의 죄목은 포로들을 몰래 탈출시켰다는 것과 오랫동안 배교자 무리와 내통했다는 것. 그걸 진실로 믿는 요정은 아무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계속 충성을 바칠 이유가 없더군. 그래서 그만두었어.”

“탈옥···을 하신 건가요? 그, 그렇다 쳐도 성흔은······.”

이스빈드는 란드와르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궁금한 게 많은 듯했다. 그럴 법도 했다. 요정 마법사와 인간 전사는 흔치 않은 조합이니까. 그 둘이 모두 아즈리온의 성흔을 받고 있다면 더더욱.

다행히도 불필요한 문장들이 오가기 전에 테네브로즈가 선수를 쳤다.

“자세한 건 넘어가자고. 지켜야 할 비밀이 있는 건 피차일반 아니겠나.”

지켜야 할 비밀은 이런 사실들을 포함했다. 아즈리온이 3교구를 청소하러 왔다는 것. 하필이면 가장 처음 만난 요정이 테네브로즈였다는 것. 전직 부제사장은 다음 날 사형될 예정이었으며 무예의 신은 길 안내가 필요했다. 둘의 뜻이 일치했다.

“저 역시 이, 이해합니다. 더 여쭙지 않겠습니다.”

이스빈드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떨어트렸다. 눈치도 있고 사릴 줄 아는 모습이 좋았다. 그랬으니 서른 해 동안이나 아무 문제가 없이 인간들 속에서 살아온 것이겠지만. 그것도 참주의 조언가로서.

요정 이스빈드가 아니라 조언가 제미알을 생각해 볼 때였다.

제미알은 소박하고 조용한 성격이었고, 그래서 성의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애완 칼린카들이 지금껏 인간을 건드리지 않았으리라는 점 역시 명백했다.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란드와르는 참주가 지나가듯 한 말을 떠올렸다. 별점술사가 이 성에 온 후로 괴수들의 습격이 부쩍 줄었다, 고.

추론은 가능했다. 이 요정은 인간으로서의 삶에 만족했을 것이다. 함께하는 인간들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칼린카를 보내 다른 괴수들이 성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아직까지는 추론일 뿐이었다.

이걸 사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의문 하나를 해결해야 했다.

“요정들끼리 할 말은 끝난 것 같으니, 괴수 이야기를 해 봅시다.”

란드와르는 사무적인 어조로 운을 뗐다. 테네브로즈처럼 하대할 수도 있겠지만, 정중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싶었다. 서로 알던 사이도 아니니까.

“괴수들이 흉포해진 건 별 때문이 맞습니까?”

“무슨 마, 말씀이신지···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별점술은 잘 모릅니다. 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잘 몰라요.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아무 일도 없다가, 하늘이 갑자기 이상해진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 사실대로 말씀드려도 괜찮을지요?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이 되는데······.”

“말해 봐요. 듣고 나서 판단하겠습니다.”

이스빈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옛 신의 별이 우, 움직이고 있습니다. 잠든 분께서 깨어나셨어요. 참주께는 정확히 말씀드리지 않았지만요. 변방의 인간들이 아, 아, 알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란드와르는 내심 감탄했다. 실력 좋은 별점술사라는 평가는 과찬이 아니었다.

“좋아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세카두로 가야 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참주가 괴수 소탕을 돕지 않으면 차원문을 열어 주지 않겠다더군요. 다행히도 우리는 성 주위에 나타나는 칼린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압니다. 그건 사실 마력을 흡수한 고양이들이고, 아마도 당신은······.”

방법이 보였다. 누구도 죽이지 않으면서 차원문을 열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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