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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화 (3/258)

2화: 참주와 별점술사

요정 영토 인근의 성들은 작은 벽이 허허벌판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대전쟁 당시 세워진 장벽의 흔적이었다.

한때 변방의 장군들은 많은 무훈을 세웠지만 모두가 지난 이야기였다. 전쟁 후반에 요정 세력은 괴수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던 것이다. 괴수들은 인간 도시들로 진군하는 대신 자신의 땅에서 안주하기를 택했다.

변경 수비대가 없더라도 인간 도시들은 안전했고, 그래서 변경은 어떤 명예도 가치도 없는 것으로 전락했다. 참주僭主는 성의 주민들을 다스렸으나 그 권세는 도시의 상인보다도 하찮았다.

***

차원문은 마공학과 비전 마법의 집약체였고, 어디에서나 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카두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내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이와는 일행이오?”

내성 경비의 말에 란드와르는 뒤에 선 소년을 힐끔 돌아보았다. 갈색 더벅머리에 낡은 모직 셔츠가 추레한 인상을 줬다. 자신 역시 망치를 제외하면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닐 터였다.

“예, 동행하고 있습니다. 참주께 청할 것이 있어 내성에 발을 들이려 합니다.”

“신분증을 보여 주시오. 적 없는 떠돌이는 들여보내지 않고 있소.”

신분증은 없었지만 란드와르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왼손의 손등을 경비대에게로 향한 후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새빨간 화염이 손가락을 타고 기어오르며 낫과 망치의 형상을 이뤘다. 교단에서 숭배 서약을 하는 게 아니라, 신에게 직접 선택을 받을 때에만 생기는 성흔. 환술로 흉내 내더라도 사제들이라면 그런 속임수를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경비의 얼굴에 경악과 감탄이 일었다. 그는 잠시 말을 더듬거리다가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무례에 사죄드립니다! 확인을 위해 사제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여기에 계시는 분은 레오나를 섬기시지만,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일단은 들어와서 편히 쉬고 계십시오.”

인간이 모시는 신들은 서로 연합을 이뤘다. 섬기는 신이 다를지라도 성흔 확인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레오나는 치유와 죽음을 관장하는 신인 만큼 가장 널리 퍼져 있었고, 자연스럽게 레오나 교단은 신성력에 관련된 잡무 대부분을 담당했다.

“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란드와르는 경비를 따라 내성 바로 안의 경비대 휴게소로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 달라 부탁하자 경비들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를 따라온 더벅머리 소년은 휴게실에 둘만이 남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경비한테는 예의를 차리시던데요. 나으리께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니 낯섭니다.”

테네브로즈는 환술을 쓴 상태였다. 본모습 그대로 인간 마을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내가 어떤 식으로 말하길래 그런 소리를 하냐.”

“글쎄요. 적당한 비유를 찾기 어려운데요. 제 가문은 야스와다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거든요. 뒷골목에 드나들었다가는 단번에 가문 어르신들께 끌려가서 경을 칩니다.”

비아냥거리는 실력을 보면 명문가 출신이라는 것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신을 뒷골목 잡배 취급하는 걸 보면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지만. 란드와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미친 요정을 노려보았다.

“가문 어르신들이 신한테 예의 갖추는 법은 안 알려줬냐?”

“저는 어르신들께도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미워하는 분이 더 많으시지만, 마음에 들어 하는 분들도 종종 계시죠. 그러니 이번에도 나으리의 자비를 믿어 볼 뿐이랍니다.”

순간 테네브로즈의 눈동자가 어둡게 반짝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손가락을 튕겨 그들을 감싸는 작은 방벽을 만들었다. 어두운 보라색 기운이 허공을 덮는 동시에 바깥의 소음이 한층 둔해졌다.

“···그리고 어차피, 진짜 신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란드와르는 잠시 놀랐으나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놈은 사제인 동시에 야스와다 학파의 마법사. 야스와다의 주문은 영혼과 정신을 다뤘다. 란드와르의 겉껍데기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을 터였다.

“그걸 또 확인했구만.”

말투를 다듬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본성을 들킬 테니까. 아니, 사실은 빨리 들킬수록 일이 편하다. 격식을 차리는 건 귀찮다.

“무례에 대해서는 사죄드립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도 아시겠지만, 나으리의 행실이 천계의 일원이라기엔 격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잖습니까. 그래서 영혼을 한 번 들여다보았을 뿐입니다.”

“오냐. 들여다봤더니 뭐가 나오더냐.”

“글쎄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데요. 신도, 인간도, 천사도, 요정도 아닙니다. 따라서 완전히 다른 것이라 생각하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즈리온을 대신한 분이니 저 같은 필멸자는 아니리라 짐작할 뿐이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란드와르는 그 이유를 잠시 궁금해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몸도 아니었으니까. 테네브로즈 역시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만 알면 된다. 내가 하기로 했어.”

말을 마치는 동시에 문 덜걱거리는 소리가 방벽을 뚫고 들어왔다. 테네브로즈는 재빨리 주문을 거둔 후 평범한 인간 시종으로 되돌아갔다. 레오나 교단의 사제는 잠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으나 그뿐이었다.

***

<이스트리아 퀘스트>는 그 불친절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시작하자마자 플레이어를 허허벌판에 떨어트려놓는 건 다행일 수준. 퀘스트 동선을 제대로 안내해 주지도 않는 주제에 시나리오를 깨는 순서에 따라 나머지 전개가 모두 변했다.

예를 들어 보자. A지역을 먼저 깨건, B지역을 먼저 깨건 그건 플레이어의 자유다. 하지만 B지역을 먼저 깨면 시간상의 문제로 C지역의 핵심 오브젝트가 사라지고 만다. 중후반 전개가 아예 막히는 것이다.

이 현상을 어떻게 대처하느냐.

대처는 무슨 대처. 리셋하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시간 순서를 찾을 때까지.

이 미친 게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양심이라면 튜토리얼이었다. 그렇지. 지금이 게임팩에 설정집 동봉해 주던 90년대도 아니고, 인게임 튜토리얼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내용도 꽤나 정석적이다. 플레이어는 성흔 확인을 마치자마자 참주를 만나고, 참주는 차원문을 열어 주는 대가로 괴수 퇴치와 조사를 부탁한다. 플레이 방법을 익히는 데에 중점을 둔 시나리오였다.

“···보름간 머무르면서 병사들을 도와줄 수 있겠나? 분위기가 심상찮아. 괴수들이 근래 들어 갑자기 늘어났단 말일세. 특히 밤만 되면 고양이를 닮은 것들이 성 근처를 맴돈다네.”

“하필이면 보름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별점술사가 말하길, 천체가 기묘한 형태로 정렬했다는군. 그동안은 계속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거야. 부탁하겠네. 내가 거느린 병사들은 수준이 그닥 높지 않아.”

하지만 란드와르는 굳이 시나리오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게임 진행에는 이골이 났거니와 전투 연습이라면 더 좋은 장소가 있었다. 여기에서 보름을 낭비할 바엔 조금이라도 빨리 세카두로 가는 편이 낫다.

“일단은 별점술사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게임이라면 선택지가 제한되어 있지만 여기는 현실.

압도적인 자유도를 믿어 볼 작정이었다.

***

제미알은 참주의 신임을 받는 별점술사였지만 거처는 성 바깥에 두고 있었다. 그가 기르는 수십 마리의 고양이 때문이었다. 원래는 암컷과 수컷 하나씩이었던 게 서른 해라는 세월을 지나오며 대가족을 이룬 것이다.

참주는 제미알을 신뢰하는 만큼 그의 뜻을 존중했고, 고양이들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도록 정원이 있는 집을 하사했다. 제미알의 원래 신분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원래 외딴곳에 오두막을 짓고 은거하던 떠돌이였다.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살인을 저지르고 변방으로 도망쳐 왔다고도 했고 남몰래 사악한 마법을 부린다고도 했다. 참주는 그 마법에 사로잡힌 것이라고도.

그러나 진상은 기대와 달랐고, 모두가 빠르게 흥미를 잃어버렸다. 이제 성의 사람들은 그를 집에 틀어박혀 고양이를 쓰다듬는 데에 평생을 바친 남자로 기억했다.

“몸이 온통 검은 녀석은 흔히 봤지만, 눈동자까지 검은 고양이는 처음이군요. 밤에 돌아다니면 눈치를 못 채겠습니다.”

“하, 함부로 쓰다듬으시면 안 됩니다. 성질이 덩치에 비해 사나워요. 저도 자주 물리거든요.”

“나도 그래서 손끝에 흉터가 있다네. 무서운 녀석들이야.”

거실은 좁고 아늑했으며 고양이로 득시글거렸다. 란드와르는 그들 중 하나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눈빛을 보고는 바로 손을 거두었다. 제미알은 부엌에서 다과를 가져와 차린 후 참주의 옆에 앉았다.

“제가 말이 많이 서, 서툰데,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너무 오, 오랫동안 홀로 지내서서요.”

“이 친구는 성에 들어온 지 서른 해가 됐는데도 아직 이런다네. 하인을 붙여 주겠다고 해도 손을 내저으니 말이야.”

참주는 껄껄 웃더니 서른 해 전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젊은 시절, 홀로 사냥을 나섰다가 깊은 상처를 입고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 제미알이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것. 치료를 위해 몇 달간 머무르던 도중, 그가 뛰어난 별점술사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성에 데려왔지. 내가 갓 스물이 되었을 때의 일이야. 부모님께서 처음에는 의심하셨지만, 곧바로 태도를 바꾸셨다네. 이런 곳에 있을 인재가 아니거든.”

“이런 곳이라고요?”

란드와르의 말에 참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자네도 알지 않나, 뛰어난 사람들은 모두 위쪽 도시에 모여 있고, 변방엔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걸. 그러니 어디에서도 못 찾을 별점술사를 옆에 둘 수 있는 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과, 과찬이십니다. 치졸한 재주일 뿐이에요.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닌걸요.”

“아니, 정말일세! 내가 이 친구를 이방인에게 잘 보여 주지 않는 이유가 있지. 점을 한번 쳐 보면 누구라도 탐을 낼 거거든.”

참주는 제미알을 보고는 뿌듯한 듯 덧붙였다.

“게다가 이 친구를 성에 들인 이후로 괴수들의 습격도 부쩍 줄어들었지 뭔가.”

“우, 우, 우연입니다. 시기가 자, 잘 맞았을 뿐이지요.”

본격적인 설명은 한동안 잡담이 오간 뒤에야 시작됐다.

별의 운행과 마력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고, 란드와르는 들려오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참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파군은 깨트리고 부수는 별이며 건록은 그 후의 차, 창조를 돕습니다. 다만, 이때 파군성이 명궁에 있으나 건록성이 하, 함께하지 않아······.”

란드와르는 찻잔 너머로 제미알을 쳐다보았다. 갈색 머리에 희끗희끗한 기운이 섞여 드는, 유약한 인상의 남자. 눈이 마주치는 동시에 제미알이라는 이름에 얽힌 몇 가지의 사실들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뛰어난 별점술사.

참주의 오랜 친구.

고양이와 책을 사랑하는 떠돌이.

그리고······.

이 시나리오의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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