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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화 (2/258)

1화: 시작

“병신들.”

짧게 중얼거린다. 프로젝트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커지자 잠수를 타 버린 후배를 생각하면서. 술에 취해 대형 바이어에게 욕설을 퍼부은 동업자를 떠올리면서. 엑싯은커녕 빚만 안겨준 벤처 경력을 후회하면서.

“병신 새끼들.”

강현의 성격은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일 처리에 있어서만큼은 뛰어났다. 확실하지 않은 문제 앞에서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면 고민하지 않았다.

사람을 거느리고 통제하는 법도 알았다.

아니, 안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도록 막는 게 중요하다.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후자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스타트업에서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때 강현은 이미 신용불량자였다.

재도전의 기회는 있다. 죽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

서른넷. 대기업 신입 사원 공채는 언감생심이지만 사업판에서는 아직 파릇파릇한 나이. 돈은 개털이 되었지만 인맥은 여전하다. 그럴듯한 아이템도 몇 개 쥐고 있다.

하지만 하기 싫다.

하기 싫었다. 빚잔치를 벌이고 선후배들의 집을 전전하던 그 시기의 기억이 쓰라려서는 아니었다. 인간이 두려웠다. 인간에 얽힌 모든 사실이 두려웠다.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훌륭한 사람들이 머릿속 어딘가에는 하자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어디 숨어 있는지도 모를 지뢰가 터지지 않도록 가슴을 졸여야 한다는 사실이.

자신 역시 예외는 아니라는 사실이.

“병신.”

거울을 보고 그렇게 말해 본다. 경비원 제복을 입은 빚쟁이가 의자에 드러눕듯 기대어 있다. 한때는 사장님이었다가 지금은 작은 빌딩의 경비원 겸 시설물 관리자가 된 남자다.

대학 시절에 따 둔 전기 기사 자격증이 도움이 됐다. 하는 일은 많지 않다. 때때로 두꺼비집 퓨즈를 교체할 뿐이다. 사람을 만날 생각도 없다.

1평 남짓한 경비실에서 온종일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다가 집에 가서 잔다. 태블릿으로 하는 것은 대개 게임. 그것도 싱글 플레이.

게임은 좋다. 유닛들이 항상 명령을 따르니까. 어택땅을 가던 도중 탈주하는 일도 없고, 마법사를 전방에 배치하더라도 항의를 듣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수치와 툴팁뿐이다.

···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야, 너 원소학 안 배웠냐? 물 만들 줄 몰라?”

“나으리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야스와다의 마법은 영혼만을 다룬답니다.”

“돌아가면 바로 배우자.”

“제가 왜요?”

강현은, 아니, 란드와르는 자신 앞의 요정족 사제를 쳐다보았다. 이 요정도 병신이었다.

***

서른네 살 이강현.

되도 않는 판타지 세계에 떨어졌다.

태블릿에 설치한 싱글 RPG 하나가 화근이었다. 모든 핵심 시나리오를 수집하고 엔딩까지 본 날, 기절하듯이 잠에 빠졌다. 그래서인지 게임 등장인물들이 꿈에도 나왔다.

이상한 꿈이었다. 무예의 신이 은갈치 정장을 입고 나타나더니 계약직 입사 제의를 건넸다.

뭐라던가. 하던 게임을 그대로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했다. 전담 천사도 하나 붙여 주고 지원도 해 줄 테니 어려울 건 없을 거라고도.

어차피 걸레 같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도장을 찍었다.

사실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

꿈이니까. 꿈이라고 믿었으니까.

“썅.”

거울 속에서, 새빨간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남자가 입 모양을 반복한다.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진 탓에 평상복을 입고서도 꽤나 위협적으로 보인다. 옆에는 직업을 대언하듯 거대한 망치가 세워져 있다.

이름은 란드와르.

<이스트리아 퀘스트>의 메인 플레이어블 캐릭터.

전사.

“말씀하시는 것만 보면, 나으리께서도 천계에서 내려오셨다는 게 거짓말 같습니다.”

옆에서 시비를 거는 놈은 테네브로즈.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동료로 주어지는 요정족 암흑 사제. 공격력도 유틸성도 뛰어나지만, 원소학을 안 배워서 물 만드는 법은 모른다.

“내가 성격이 참 괜찮은 사람이에요. 살면서 시련도 많았고, 찔러죽이고 싶은 놈들도 많았는데 다 참고 견뎠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 놀라운 일이군요.”

“니가 옆에서 떠들면 내 참을성이 떨어지잖아. 그래서 그래.”

“아뇨, 제 생각에는 내용물이 바뀌면서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요. 천사에게 물어보시죠. 실수로 영혼을 조금 흘렸을 겁니다. 분명합니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의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린 뒤 다시 생각에 잠겼다. 플레이할 때에는 좋다고 했지만 잘 따져 보니 시작부터 미친 게임이었다.

인트로는 대강 이렇다. 요정이 섬기는 신이 있고 인간이 섬기는 신이 있다. 당연하게도 서로 사이가 안 좋다. 대전쟁이 벌어지면서 요정 쪽 신들은 거의 박살이 났다. 하지만 요정들은 심심하면 부활 의식을 치른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교당에 모인 놈들을 다 쳐 죽인 다음 요정족 배신자와 함께 인간 도시로 걸음을 옮긴다.

그렇다. 도시까지 걷는다.

다 쳐 죽이는 컷씬이 끝나자마자 맵을 가로질러야 했다.

스킵 기능은 물론이고, 탈것도 없이.

전담 천사에게 클레임도 넣어 보았는데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인간들의 도시 근처라면 신탁을 내려서 사람들을 보내 줄 수 있겠지만, 요정들의 영토에서는 그냥 걸어야 한다고. 천계에서 가능한 일은 추적당하지 않도록 은폐의 축복을 내려 주는 것뿐이라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임을 받아들인 뒤 그냥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흘이 걸려 인간 마을에 겨우 발을 들인 참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여관방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미뤄 둔 생각들이 란드와르를 덮쳤다. 가장 처음으로 느낀 것은 계약서 검토의 중요성이었다.

꿈에서 들은 설명이 뭐였더라?

하던 게임을 그대로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

직접 게임 세상으로 들어가서 시나리오를 깨라는 이야기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신은 병신이었다. 계약서를 받아 들면 변호사 자문은 못 구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는 읽어 봐야 하는 법인데.

물론, 마냥 불공정한 계약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일이 맞았다.

“내가 누구냐. 최대한 정석적으로 읊어 봐라.”

테네브로즈는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냐는 투였다. 란드와르는 질문을 반복하는 대신 미간을 좁혔다. 그제야 겨우 답이 나왔다.

“아즈리온의 화신이시지요. 인간의 아홉 신 중 무예와 살육을 주관하며 지금은 떠돌이 전사 신분으로 하계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껍데기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약속받은 지원은 모두 받고 있었다.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전담 천사도 하나 붙었으며 쓰고 있는 몸은 무신의 것이었다. 능력치는 당연히 압도적인 수준. 게다가 테네브로즈의 성능 역시 만만찮았다.

“내가 널 데리고 다녀야 하는 이유.”

“유능하니까요. 무신 나으리께서 보시기엔 하찮은 배신자겠지만, 이래 봬도 부제사장까지 오른 몸이란 말입니다. 하계에서의 일이라면 어디에든 도움이 될 겁니다.”

실제로 테네브로즈는 <이스트리아 퀘스트>에서 든든한 원거리 딜러를 담당했다. 강력한 다중 타겟 주문에 높은 유틸성까지. 가장 처음에 주어지는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보스까지 데려갈 가치가 있는 놈이었다.

물론 둘만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나오는 적들도 그만큼 강하니까.

“내가 여기 있는 이유.”

“제 동족이 옛 신을 깨웠기 때문이지요. 약간만 일찍 오셨으면 그 전에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조금 늦으셨지 않습니까?”

게임의 목표는 하나였다. 깨어난 옛 신을 완전히 처치하는 것. 초반부 시나리오는 혼자서 깰 수 있을지라도 요정족 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부터는 공격대를 구성해서 다녀야 했다. 즉, 동료 수집이 핵심이었다.

플레이 방식 역시 공격대 운영에 중점이 맞춰져 있었다. 시나리오를 깨서 장비와 정수를 수집하고, 제일 효율이 높은 동료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그렇게 짠 파티로 상위 등급의 시나리오와 던전에 도전해서 더 좋은 보상을 얻는다. 마지막 신을 처치할 때까지 그걸 계속 반복한다.

선형적이라고 해도 좋을 진행이었다. 핵심 시나리오와 효율 좋은 루트도 알고 있다. 공격대 인원 구성과 직업별 시너지에 대해서도 빠삭했다. 어떤 보스에 치유 전담이 몇 명 필요한지, 누구에게 어떤 축복을 내려야 하는지, 그런 것들.

따라서 게임을 다시 깨는 것뿐이라면, 아무 걱정도 없었다.

게임을 다시 깨는 것뿐이라면.

“이제부터 내가 할 일.”

“도대체 이런 걸 왜 물어보시는지 모르겠지만, 세카두로 갈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쪽 도시에서부터 시작해서 대업에 쓸 인간들을 찾아보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하지만 여기는 게임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였으며 그가 모으고 관리해야 할 동료들 역시 데이터가 아니었다. 단순히 능력치만을 따져서 공격대를 구성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테네브로즈가 성능 좋은 사제면서도 머리에 문제가 있는 요정인 것처럼.

“그러니까 지금 이걸··· 씨발··· 다시 하라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린 란드와르는, 서른네 살의 개인회생자 이강현은 공격대 운영이 본질적으로 인간 관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모든 문제가 인간으로 귀결됐다. 인간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들이 자신의 말을 따르게끔 하는 것. 각각의 불협화음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

실패는 이미 겪었다. 재도전은 수없이 꿈꿨지만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남의,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게임에 빠져들었다. 게임 속 유닛들은 명령을 그대로 따르니까.

하지만 기묘하게도 두 번째 기회는 게임에서 왔다. 그것도 전혀 상상하지 못한 형태로.

그러니까······.

“해야 돼.”

어차피 찍은 도장이었고 시작된 게임이었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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