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한가해 보이는군. 할 일은 있나?”
전사가 말했다. 머리카락이 붉은 인간이었다.
“없습니다. 죽을 때가 돼서 헛것을 보는 중이지요.”
요정은 그게 환각이라고 판단했다. 무구를 갖춘 인간이 요정족의 감옥을 돌아다닐 리가 없으니까.
“사형이라도 기다리는 모양이야.”
“바로 내일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위에 있었는데 한순간에 신세가 처량해졌어요.”
요정은 이 신전의 부제사장이었지만 이제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죄목은 배신자와 내통하고 포로를 몰래 풀어주었다는 것. 형벌은 죽음.
“더 살아 볼 테야, 아니면 그만둘 테야?”
“살려줄 수 있겠습니까?”
“감옥에서 꺼내줄 수는 있지. 길잡이가 필요하다.”
전사는 철창을 우그러뜨려 사람이 드나들 크기의 구멍을 만들었다. 복도로 나온 요정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환각이 아니었다.
거대한 망치를 든, 붉은 머리의 인간 전사.
인간들의 신화에서, 무예의 신은 그런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의 이름은 아즈리온.
요정들이 음모를 꾸밀 때마다 아즈리온은 화신을 내려 보낸다.
“마력 구속구도 풀어 주십시오. 도움이 될 겁니다.”
“출구를 찾는 데에 주문이 필요한가? 나는 마법사를 믿지 않아.”
“요정을 죽일 때에는 필요하지요.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충성이라.”
나지막이 중얼거린 아즈리온은 요정을 똑바로 응시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테네브로즈입니다.”
***
2층 테라스에 선 테네브로즈는 흐뭇한 표정으로 신전의 중앙 홀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그려놓은 마법진이 음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요정족 사제들은 다 죽여 놓았다. 도망간 놈도 없었다. 이제는 자리를 뜰 때였다.
그는 아즈리온과 합류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전사는 피 웅덩이 한복판에 웅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나으리께서 흘린 피로 보이진 않는데요.”
“주어진 시간이 다했을 뿐이다. 너무 급히 내려왔어.”
화신이 지상에 머무르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테네브로즈는 수긍하고는 인사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슬슬 헤어질 때군요. 꽤나 즐거웠습니다.”
“아니, 끝이 아니야. 다른 이가 온다.”
거기까지 말한 아즈리온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짧은 단말마가 허공을 쳤다.
동시에 전사의 눈빛이 변하더니 뺨에 혈색이 돌아왔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씨발.”
한 마디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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