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혈입성 (4)
신동현은 두 손을 모은 채 소파에 붙은 등을 떼어 냈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일 터.
나는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그려 온 제안을 하나씩 꺼냈다.
“우선 대통령님께서 다시 권력을 쥐기 원하신다면, 어느 행정부서든 간에 머리를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물론, 대통령을 했던 만큼, 적당한 권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터.
다만, 그가 아직까지 정계에서 은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기에 제안한 내용.
“우선은 돈의 흐름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재정기획부 장관을 원하시면 당연히 드릴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특별한 사업이라든지…….”
전직 대통령이 다시 감투를 쓰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림 자체는 좋지 않다.
그렇기에 정확히 말하면, 주요 요직에 신동현의 인맥을 꽂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진현수.
그가 재정기획부 장관이 된다면, 그것도 내가 대통령으로 군림하는 동안이라면 신동현이 원하는 대로 예산안을 쥐고 흔들 수 있다.
특히나 가장 중요한 건 각종 사업과 기업에 투자되는 금액이 그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신동현에게 이 자리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는 SV그룹의 오너 출신.
현재도 신동현의 아들이 그룹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손자까지 대물림될 게 뻔했으니까.
“SV그룹 또한 허리에 힘 딱 주고 제대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
“재계 서열 1위. 충분히 가능한 이야깁니다. 제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건, 대통령님께서 지난 4년간 충분히 직접 겪어 보셔서 잘 아시잖습니까?”
그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신동현이 대권을 쥐고 있는 동안 SV그룹은 눈부신 발전을 이뤄 냈다.
원래 1위를 차지하던 자동차 사업에서 독보적으로 나아간 건 물론이고.
만년 2위만을 차지했던 전자 사업에서는 신동현이 대통령에 부임한 지 단 2년 만에 주옥그룹을 꺾어 내고 SV그룹이 1위를 차지했다.
4년 전만 해도 재계 재벌 그룹 순위에서 7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무려 4위까지 올라왔다.
엄청난 성장 속도지.
까놓고 말해서 정부가 대놓고 밀어주기를 하지 않으면 이뤄 낼 수 없는 성장 폭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지금까지의 성장 과정을 보면, 신동현이 대통령이기에 국민들의 눈치를 보며 소극적으로 밀어준 게 이 정도라는 사실.
내가 당선이 된다면, 국민들이 보기에 SV그룹과 나는 관련이 없다.
더욱 적극적으로 얼마든지 밀어줄 수 있다는 뜻이지.
게다가 신동현이 정치인이 되었다고 한들, SV그룹을 누구보다도 끔찍이 아끼며 아직까지도 그룹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입수한 정보 중 하나.
대통령직을 놓치는 게 아쉽긴 할 테지만, 신동현의 입장에서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물러나야 한다면, 빈털터리도 쫓겨나는 것보다는 양손 가득 보따리를 들고 내려가는 게 훨씬 더 나을 테니까.
게다가 그 보따리에는 권력 또한 남겨져 있고.
“흐음…….”
그러나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연신 고민하는 모습에 나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까놓고 말해서 대통령님께서 연임할 수만 있다면 그리 달콤한 제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이 제안을 거절하신다고 한들, 저는 출마할 겁니다. 그리고 저와 경쟁하셔서 만약에 패배하신다면 그 후환은 제가 장담드릴 수 없습니다.”
신동현 대통령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나와 일대일로 붙는다면. 그것도 대한당의 지지를 받는 게 확정된 이 시점에서 신동현이 나를 상대로 이기는 건 불가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
과거 대선에서 신동현이 당선될 수 있도록 내가 도왔고.
내가 검찰총장이 올라갈 수 있도록 그가 도와준 것 또한 사실이다.
다만 그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는 하더라도, 누구 하나가 갑이고 을인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였기에 오늘 대화에서는 충돌이 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자리를 놓고 싸우면 누군가 한 명은 이를 양보하거나 밀려나야 하는 법이니까.
까놓고 말해서 4년 연임제 또한, 내가 캐스팅보트를 사용해 통과시킨 안건이다.
내가 아니었으면 그가 또 출마할 수 있는 권한 자체도 없었을 거라는 뜻이지.
물론, 구질구질하게 그것까지 꺼내서 생색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과정이 어쨌건 간에 결과적으로 신동현은 대통령 자리에 올라 권력을 누렸지만, 연임을 가능하게 할 만한 지지율을 확보하지 못했기에, 내게 양보하라는 것.
그게 전부다.
“흐음…….”
그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오래 고민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나 걱정되는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사퇴하고 변호사님을 지지 선언 한다면, 민국당에서 분명 반발이 있을 겁니다. 그 분노는 자연스레 저와 SV그룹에게로 몰릴 테고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딱 잘라 말했다.
“대통령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는 무조건 당선이 됩니다. 그러면 민국당은 제 선에서 충분히 정리할 수 있고, 혹시라도 반발이 일어난다면 제가 대통령직을 걸고서라도 방어해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확실하다.
굳이 걱정할 필요도 없는 문제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을 테지.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더 이상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신동현 대통령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출마에 대한 결정을 내린 뒤부터, 신동현의 당선 확률은 희박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낙선할 거라면, 명예롭게. 그리고 한몫 당기는 게 옳은 판단이라는 건 옆집 누렁이도 알 수 있는 사실.
신동현도 더 이상 계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말씀대로 하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간단한 인사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그리고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대선 이후에 어떤 자리가 필요하신지도 생각해 두셔도 좋고요.”
“알겠습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고,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
무혈입성은 절대 완벽한 계획이 아니다.
그건 윤설하도, 나도, 고중혁까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지금 당장 오케이를 받았다고 한들, 문서로 찍어 놓은 것도 아니고.
만약 찍어 놓았다고 한들, 선거 조작이기에 효력은 없다.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라는 것이 전부.
다만, 대선이라는 판은 고작 한두 사람의 변덕에 흔들리기에는 너무나도 큰 전쟁터였다.
그렇기에 적어도 보험을 들어 둘 필요는 있었다.
어떠한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어, 공 검사 왔나?”
공상욱은 내가 부른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사무실로 찾아왔다.
양손에 홍삼을 무겁게 든 채로.
“간만에 뵙습니다, 총장님.”
“언제 적 총장이야. 변호사라니까.”
“제 마음속에선 영원히 총장님입니다.”
그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자네가 말하면 아부인 걸 아는데도 기분이 좋다니까.”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래, 일단 앉지.”
“예.”
오랜만에 만난 만큼 근황부터 물었다.
“자네 부장 단 지도 2년 다 되어 가지 않나?”
“예. 안 그래도 내년에 서울중앙지검으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차장을 달면서 넘어가는 건가?”
“그건 조금 더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코를 찡긋하며 눈썹을 들썩였다.
“이번에 대권을 누가 잡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 같거든요.”
“자네에게 우호적인 사람이라면 차장을 달 수 있다, 이 말이지?”
“대한당에서 권력을 잡으면 부장을 한 번 더 해야 될 수도 있고요.”
검사라는 자리가 정치의 영향을 받는 직위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사실 내가 검사로 있을 때도 늘 그랬고.
나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러면 차장 명패로 준비해 두게.”
순간, 그의 눈이 번뜩였다.
“혹시 누가 대선에 나갈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자네와 연이 있는 사람이 대권을 쥘 걸세.”
“아, 혹시 신동현 대통령이 연임합니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공상욱 검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낮게 말을 흘렸다.
“그래도 차장을 달 테니 대한당은 아닐 테고…….”
계산을 하던 그는 순간 멈칫하며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혹시 총장님께서 직접…….”
나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 도움이 필요하네.”
공상욱 검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총장님이라면, 제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돕겠습니다. 아니, 돕지 말라고 하셔도 도울 겁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우선 대선에 나가는 건 비밀이야. 자네만 알고 있게.”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눈에 열의를 불태우며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딱 두 개만 해 주면 되네.”
“어떤 겁니까?”
“김강진 의원과 신동현 대통령. 둘의 약점을 찾아 주게.”
나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적당한 약점이면 안 돼. 선거 도중에 분명 반대파에서 이 잡듯이 뒤질 거야. 그럼에도 찾아내지 못해서 자네만 알고 있을 만한 약점이어야 하네. 그렇다고 너무 약하면 안 되고. 대선 구도를 뒤흔들 만한 큰 건이어야 해.”
“알겠습니다. 혹시 주의할 점은 있습니까?”
“김강진 의원보다도 신동현 대통령 위주로 파 주게. 그리고 신 대통령은 SV그룹과 유착 관계가 꽤 많을 거야. 사업적으로 특혜를 많이 봤을 테니까.”
“예. 최대한 빠르게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래.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네. 자네가 정말 믿을 수 있는 심복들만 데리고 조사해.”
“걱정 마십시오. 확실하게 진행하겠습니다.”
“고맙네.”
“더 지시하실 일은 없습니까?”
“우선은 여기까지야.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함세.”
“예.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그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한 보험이 필요하다.
김강진 의원은 큰 이변이 없다면, 예정대로 사퇴하고 나를 밀어줄 것이다.
그래야 원래의 목표였던 다음 대선에 출마해서 당선될 가능성이 크니까.
문제는 신동현.
그는 이번 대선에서 사퇴하면, 다음은 없다.
게다가 무혈입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눈빛.
절대 심상치 않았다.
말은 내 뜻에 따르기로 했으나, 그때 가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권력의 맛을 알았던 만큼, 더 놓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모든 게 예정대로 가면 좋겠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둬야 한다.
그래야 내가 이번 대선에서 당선될 수 있을 테니까.
이제부터 제대로 움직일 시간이다.
나는 곧장 휴대폰을 들어 연락했다.
“설하 씨, 고 프로한테 연락해서 지금 당장 들어오라고 하세요. 이 정도면 사전 작업은 끝났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선을 위해 몸 풀기를 시작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