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혈입성 (2)
김강진 의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그는 심기가 불편한 걸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당시 자네한테 신세를 진 건 맞네. 하지만 아무리 약속을 했다고 한들, 그 말은 자네를 위해 내 정치 생명을 걸라는 거 아닌가? 이건 아니지.”
그의 언성이 절로 높아졌다.
“나보고 최 변호사 발판이나 하라는 소리 아닌가?”
“발판이라니요?”
나는 능청스레 말을 내뱉었다.
“일종의 러닝메이트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게.”
김강진 의원의 목소리에서 까칠함이 묻어 나왔다.
“내가 예전부터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대선에서 한 번 패배하면 다음 대선은 없다고.”
“패배라니요. 이건 승리죠.”
흥분한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대선에서 정면으로 부딪쳐 패배한다면, 의원님 말씀대로 다음 대선에서 당선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빠져서 승리한 쪽과 손을 잡는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다음 대선에서 충분히 승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코를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현직 대통령이 지지하는 차기 대선 후보자는 당선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건 이미 수치로 증명된 사실 아닙니까?”
순간, 그의 얼굴에 차오른 흥분이 빠르게 진정되는 게 눈에 보였다.
아니, 오히려 미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눈치.
실제로 내가 한 말에서 틀린 건 없었다.
출마했다가 패배한 것과 중간에 사퇴를 한 뒤,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는 건 천지 차이의 일이니까.
게다가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높은 지지율을 유지한 채로 그를 지지한다?
무려 대한당의 당대표를?
한마디로 차기 대권은 그가 따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강진 의원의 입장에서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나는 공격적으로 한마디를 더 뱉었다.
“의원님이 이번 대선에서 눈치만 보다가 보류하신 뒤에, 다음 대선에 출마하신다고 칩시다. 까놓고 말해서 그때 저를 만나면 이기실 수 있겠습니까?”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나는 지금 출마를 하든, 다음 대선에 출마를 하든 강력한 당선 후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제가 당선된 뒤, 확실하게 대권 주자로 밀어드린다는 겁니다. 지금 의원님께 이보다 더 달콤한 제안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없다.
없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그는 이번 대선을 포기하려고 생각했다.
기왕 포기할 거 포기하고, 다음 대선에서 확실한 지원군을 얻는 것.
대통령을 꿈꾸는 이에게 대권을 쥐여 준다는데, 이것보다 더 큰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최 변호사. 내가 자네를 못 이기는 건 인정해. 다만, 내가 출마한 뒤 자네를 지지 선언 한다면 우리 대한당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나?”
“제가 임기 동안 대한당을 제대로 밀어드리겠습니다.”
그를 보며 입꼬리를 휘었다.
“마치 대한당 출신의 대통령이 당선된 것처럼 말이죠.”
“…….”
“그러면 의원님이 사퇴하더라도 대한당 당원들에게 할 말은 있지 않겠습니까? 아주 확실한 이유가 있는 거죠.”
“총선과 대선이 겹치기 때문에 난 차기 대선 전까지는 국회의원도 못 해 먹는데?”
“당 대표 자리는 국회의원이 아니어도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예의상 입에 발린 소리를 덧붙였다.
“의원님 정도 되시면 사실 국회의원을 맡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잖습니까? 어차피 얼굴과 이름이 명함인데요.”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치권에서 그의 영향력은 단순히 국회의원 자리가 주는 정도를 넘어섰으니까.
“흐음…….”
나는 천천히 그를 설득해 나갔다.
“대권을 위한 큰 그림을 보셔야 합니다. 당장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여의도에서는 버틸 수 있더라도, 청와대로 입성하기는 힘들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허어…….”
김강진 의원은 짙은 탄식을 내뱉었다.
“대권만을 생각하십시오. 지금의 국회의원, 당 대표 정도가 전부가 아니라 대권이 목표시잖습니까? 저와 함께 청와대로 가셔야죠. 제가 먼저 가서 의원님이 오실 길을 잘 닦아 두겠습니다. 한번 믿고 도와주십시오.”
그는 입을 닫고 진지하게 고민에 빠져들었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건 알고 있기에 답변을 촉구하진 않았다.
김강진 의원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끝에 나를 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최 변호사…… 아니, 최 프로.”
그는 내가 검사 시절에 부르던 친근한 호칭으로 날 불렀다.
“예, 의원님.”
“내가 밀어주면 확실히 당선될 수 있나?”
김강진 의원은 정말 힘들게 말을 내뱉었다.
“성공하면 몰라도, 실패하면 정말 나락이야.”
“솔직히 말해서 의원님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들, 100%는 아닙니다.”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면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끊고 외쳤다.
“민국당도 똑같이 만들 겁니다.”
“……뭐?”
김강진 의원 얼굴에 경악이 가득 찼다.
“진심인가?”
나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신동현 대통령도 사퇴하게 만들겠다고?”
“예, 맞습니다. 그래야 100%가 되니까요.”
나는 입꼬리를 거칠게 휘었다.
“한 번 대선에 출마를 결심할 때는 확실해야 된다고 의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허어…….”
그는 탄식과 헛웃음을 반복하다가 겨우 진정하고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 신동현 대통령에게도 똑같이 제안할 생각인가? 그러면 나는 이걸 받아들일 수 없는데, 대한당과 더불어 민국당도 밀어준다면…….”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단호하게 부정했다.
“대통령 연임제라는 걸 잘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이번 선거 이후에는 신동현이 대선에 출마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퇴한다면 어차피 제가 든든하게 뒤를 지켜 줄 테고, 정치적 보복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민국당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을 테고요.”
“그러면 어떤 제안을 하려고 하는가?”
“그건 비밀입니다.”
나는 손가락 끝을 맞대고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간단하게만 말씀드리자면 제가 거래를 하는 건 민국당이 아니라, 신동현입니다.”
“그래. 그렇게 되겠구먼…….”
“의원님, 예전부터 의원님의 목표는 이번 대선이 아니라, 다음 대선이셨잖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선거 도중 사퇴하고 지지 선언하는 건 절대 정치 수명을 깎는 일이 아닙니다. 대선에서 패배하는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지지한 대상이 당선이 된다면, 정치적으로는 확실한 기반이 되는 겁니다. 제가 뒤에서 지켜 드릴 테니 지금보다 정치적 영향력과 힘이 더 커지는 건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더 깊은 혼란에 빠지기 전에 미리 준비했던 말을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다음 대선에 누가 후보로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저와 손을 잡는 건, 그 확실치 않은 미래를 대비해 보험을 드는 일이죠.”
협박성 멘트도 아끼지 않았다.
“만약 의원님께서 거절하신다면, 저는 민국당과 손을 잡을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당선이 되겠죠. 그러면 그 이후에는 제가 어떻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가 권력을 휘두르는 게, 그리고 대한당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게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그려지겠지.
“저는 의원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같이 윈윈하는 관계가 되기를 바라기에 말씀드리는 거죠. 굳이 저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김강진 의원은 온갖 고뇌가 담긴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조금만 더 고민해도 되겠나?”
“예. 그러십시오.”
나는 자리에 앉은 채 허리를 세웠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말해 봤자, 혼란만 가중시킬 테니까.
남은 건 그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짧을 것 같았던 김강진 의원의 고민은 30분이 넘도록 이어졌다.
그동안 그는 단 한 순간도 입에서 담배를 내려놓지 않았다.
줄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다하고 있을 터.
사실, 김강진 의원의 생각이 어느 정도 엿보이기는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의 제안을 일시 보류했다가 신동현이 OK를 하면, 자신도 수락하겠다고 말하고 싶을 테지.
그러면 어쨌든 자신도 안전빵이니까.
하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
결정은 오늘의 만남이 끝나기 전에 해야만 한다.
고민하는 사이,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방 안을 가득 채웠고, 김강진 의원은 새로 뜯은 담배 한 갑을 다 비우고 나서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말씀하십시오.”
“굳이 민국당 타이틀을 달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이유가 뭔가? 까놓고 말해서 원한다면 대한당 타이틀도 달 수 있잖나. 자네라면 대한당이나 민국당 타이틀을 달고 나가면 이러한 제안을 하지 않고도 당선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민하지 않고 되물었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제 이미지가 어떻습니까?”
“서민들의 영웅이자 국민들의 영웅이지. 나라를 대표하는 검사고.”
“그런 인물이 특정 당을 대표하면, 분명 반대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아니꼽게 보지 않겠습니까?”
“그들까지 전부 포용하겠다?”
“포용이 아니죠.”
속내를 털어놓았다.
“모두 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팔걸이에 올려져 있던 그의 손이 움찔거렸다.
“최 프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네는 무서운 사람이었던 것 같은걸.”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자네, 정말 한국 자체를 아예 집어삼킬 생각이구먼.”
“그래야 진정한 대통령 아니겠습니까?”
김강진 의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오래도록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손끝에 끼워진 담배가 타들어 가며 재가 땅으로 떨어지는 동안에도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오로지 침묵만이 이어졌다.
독재.
독재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독재에 한없이 가까운 힘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이지.
김강진 의원은 6선 의원으로 오랫동안 정계에 버텨 왔다.
내가 처음 정치 검사로 발을 내딛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던 적이 없는 인물.
최서준이라는 인물의 성장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두 눈으로 봐 왔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나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방금 말한 걸 이루리라는 걸 알고 있을 테지.
그러니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서서 흐름에 역류하여 버티며 맞서 싸울지.
갈대처럼 바람에 휘어질지.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최서준이라는 인물은 단 한 번도 대나무에게 막힌 적이 없다는 걸.
앞을 막아선 대나무는 전부 꺾어 버렸으니까.
김강진 의원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그리고 길게 내뱉은 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겠네. 자네 제안 받아들이지. 함께하겠네.”
“감사합니다, 의원님.”
“그 대신.”
그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말했다.
“무조건 당선되어야 하네.”
“믿어만 주십시오.”
나는 아주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무혈입성.
그 대망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