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3)
***
“나를?”
마츠모토 총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갑자기 그 인간이 나를 만나겠다고?”
-예. 어떤 사유인지 명확히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급히 만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보나마나 뻔하지, 뭐. 이번 소송 때문 아니겠어?”
마츠모토 총리는 음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최서준의 입장에서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
어떻게든 발버둥 치리라고는 알고 있었다.
첫 공판부터 그쪽을 몰아넣으라는 것은 물론이고, 편파적으로 재판을 진행하라고 지시한 것 또한 마츠모토 총리 본인이었으니까.
‘어디서 감히 나한테 덤비려고 해?’
마츠모토 총리는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사과하고 반성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번 소송에서 아예 싹을 자르려고 생각한 것.
만약 어영부영 넘어가서 또 잘못을 인정하게 된다면, 한국은 끊임없이 과거를 통해 일본의 발목을 잡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며 본때를 보여 줘야,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상황을 전개시킨 것이다.
-뉘앙스를 보아하니, 꼭 만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이번 소송에 대해 항의하거나 따지려고 들 테지.
아니면 뇌물을 주거나,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하니, 일본과의 외교와 관련해 정책을 통한 다른 딜을 할 수도 있고.
어쨌건 간에 확실한 건, 지금 마츠모토 총리는 갑이고, 한국 측은 을이라는 것.
“이번 주 일정이 널널하긴 한데…….”
평소 같았으면 콧방귀나 뀌고 만나지도 않았을 테지만, 이번엔 달랐다.
한국에서 그렇게 찬양받고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자신의 앞에서 쩔쩔매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싶었으니까.
그가 일본 총리인 자신에게 머리 숙이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이는 즉 그들만의 힘으로는 한국이 이길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었기 때문.
“한번 불러 봐.”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 대신 애는 좀 태워야겠지.”
마츠모토 총리는 클클거리며 달력을 살폈다.
“느지막이 다음 주 목요일에나 보자고 해. 그쪽 숙소는 알고 있으니, 오후 6시로 시간만 전달하면 돼. 경호 팀에서 데리러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마츠모토 총리는 다시금 엉큼한 상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CCTV라도 달아서 머리 숙이는 걸 확 동영상으로 남겨 버려? 아니면 생방송으로 중계라도 해?”
물론, 실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최서준은 다음 주 목요일까지 애를 태울 것이며, 마츠모토 총리 자신과 만났을 때는 벽을 느낄 것이라는 확신.
그의 머릿속엔 행복 회로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가자, 정장을 입은 남자 세 명이 서 있었다.
“최서준 씨 맞으시죠?”
“예.”
“총리님이 보내셨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군말하지 않고 남자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주차장으로 내려가 검은색 승용차에 날 태우고 곧바로 출발했다.
차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러나 긴장되거나 떨리진 않았다.
어차피 내 휴대폰에는 마츠모토 총리의 약점이 들어 있으니까.
그 외에 녹음기와 같은 장비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그것도 이런 민감한 사안으로 화제가 된 이 시점에서 꼬투리 잡힐 만한 말실수를 할 리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약속을 잡아 달라고 한 지 딱 1주일이 지난 오늘에 데리러 온 걸 보면, 마츠모토 총리의 심정은 눈에 뻔히 보였다.
날 애태우려는 것이지.
아마도 그 녀석은 내가 심리적으로 굉장히 몰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
1차 공판에서 그들이 보여 준 태도를 보면, 재판 상황은 총리의 귀에도 당연히 들어갔을 테니까.
아니, 까놓고 말해서 나는 이러한 사항들을 총리가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건 간에 마츠모토 총리는 우리가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에게 뒷돈을 찔러 주며 일방적으로 부탁을 하거나, 정치적인 거래를 하자며 한국의 대통령이 배후에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 리가 없었다.
쯧쯧.
자신의 과오가 들어 있는 영상을 보면, 더 빨리 만나지 못한 걸 후회할 모습이 눈에 선하니 오히려 안타까운 수준.
내가 가장 걱정했던 건 마츠모토 총리와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만나지 못한다면, 협상이 불가한 건 당연한 일이고 그렇다고 동영상을 터뜨려서 내가 얻을 건 없으니까.
그러나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건 간에, 일단 만남이 성사되었다는 건 내 마음대로 판을 휘저을 수 있다는 사실.
그렇기에 이동하는 내내 아주 편안한 마음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 상황에서도 눈을 감으면 바로 잠들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니까.
그렇게 침묵 속에서 얼마나 달렸을까.
서서히 지루해지기 시작할 즈음, 도심의 외곽에 위치한 인적 드문 건물 앞에서 차가 멈췄다.
“여기서 내리면 됩니까?”
“예. 안에 들어가셔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총리님은 곧 오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다만,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근처에서 외부인이 들어오지 않도록 경호를 하고 있는 모양.
나는 전기 포트를 발견하고는 따뜻한 녹차 한 잔을 끓여 소파에 앉았다.
차를 마시며 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누가 총리 아니랄까 봐 바로 오지는 않았다.
자신은 높으신 양반이니 기다리게 만들겠다, 이거지.
어차피 급할 것도 없으니, 나는 여유로이 한참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마츠모토 총리입니다.”
TV에서 본 얼굴 그대로.
아니,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는 걸 보니 조금은 낯빛이 더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최서준입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예.”
내가 아니라고 대답할 줄 알았던 모양인지, 마츠모토 총리는 살짝 놀랐다가 다시금 여유를 되찾았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처리하고 오느라고요.”
“아닙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지체할 것 없이 말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실까요? 제가 워낙 일이 바빠서요. 이것도 겨우 시간을 낸 거라…….”
“예, 그러시죠.”
나 또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총리님도 이번 소송에 관심이 많으시잖습니까?”
“아,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마츠모토 총리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워낙 국정 운영에 정신이 없어서 이번에 보고받고 알았습니다.”
주도권을 잡고 싶어 안달 난 게 눈에 보인다.
하긴.
내 손에 와타나베 켄시의 유품인 USB가 없었다면 솔직히 이런 태도에도 내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을 테지.
하지만 내 휴대폰에는 동영상이 들어 있다.
한국에 있는 윤설하를 통해 안전장치까지 채워진 채로.
“저는 달리 바라는 게 없습니다.”
나는 조급할 것 없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저 이번 소송이 정정당당하게 이뤄지길 바랄 뿐입니다. 일본법에 따라, 특히 한쪽 국가의 입장을 대변한다거나 편견 및 정치적 해석이 담기지 않은 담백한 과정으로 말이죠. 법은 법리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마츠모토 총리는 눈까지 댕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또한 공감하는 바입니다. 이번 소송은 판사가 직접 자신의 양심에 따라 원칙에 맞는 판결을 낼 것입니다. 그리할 것이라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고요.”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말을 보탰다.
“혹시 궁금해서 여쭤보는데, 한국은 문화에 따른 편견이 담긴 시선으로 법률을 해석하고 판결을 내고 그러는 겁니까?”
그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츠모토 총리 이 녀석, 날 비꼬려고 한다.
신성한 법원에서 1차 공판이 대놓고 편파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딴 소리를 하다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가시 돋은 말을 했지만, 마츠모토 총리는 말에 담긴 날을 거두지 않았다.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삼권분립이 확실한 나라입니다. 정정당당한 판결을 요청하셨지만, 애초에 저는 법원에 무언가를 지시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권한 자체가 없고요.”
그래,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대놓고 오리발을 내밀어도 유분수지.
녀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왜요, 질까 봐 혹시 겁나시는 겁니까?”
이 인간, 정도를 모른다.
일본에서 총리를 몇 번이나 연임하다 보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존감이 올라가 있는 모양.
아무래도 남들은 전부 아랫것들로 보이는가 보다.
“그러니까 왜 되지도 않는 싸움을 거는 건지, 원…….”
그는 눈썹까지 들썩이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어차피 패소할 거니까 적당히 한국 내에서 언론질이나 하십시오. 그게 자존심 챙기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패소할 것 같습니까?”
“당연하죠.”
마츠모토 총리는 비열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질까 봐 나한테 부탁하려고 온 거 아닙니까? 잘 좀 봐주라고.”
아주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어이가 없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그는 갑자기 손뼉을 치며 내게 물었다.
“아, 혹시 일본을 너무 좋아하시는 겁니까?”
“뭐요?”
“그런 거 있잖습니까? 어렸을 적에 좋아하는 애가 있으면 일부러 더 괴롭히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들어나 보기로 했다.
“그래서 건드린 뒤에 관심을 받아서 일본으로 이민을 오고 싶다든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일부러 일제강점기 이슈를 계속 꺼내는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 녀석은 꺼내서는 안 될 말을 꺼냈다.
“우리가 통치하던 시절이 그리우면 말씀하십시오. 얼마든지 다시 다스려 줄 테니까.”
마츠모토 총리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협박’을 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이 녀석은 대화가 통하는 인물이 아니다.
“후우.”
나는 숨을 가다듬고.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녀석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얼어붙을 듯이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딸이랑 놀아난 게 뒈지려고 망언을 하고 자빠졌네.”
“……뭐?”
마츠모토 총리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는 얼굴.
“마츠모토 미도리. 당신 딸이잖아? 아니, 애인이라고 해야 되나?”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분노를 터뜨렸다.
“어디서 감히 우리 딸을 모함해?”
“내가 블러핑 치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이 지었던 비열한 미소를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이 자리까지 와서 내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인간으로 보이나? 그렇게 사람에 대한 자료 조사가 부족해?”
“이런 개…… 너는……!”
녀석은 속사포 랩을 하듯 일본어를 빠르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너무 빨라서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욕설과 더불어 증거도 없이 헛소리를 하냐는 뜻이라는 건 알아들었다.
그러면 더 설명할 것도 없지.
녀석이 흥분을 토해내는 동안, 나는 휴대폰을 꺼내고는 와타나베 켄시의 USB에서 옮겨 온 동영상을 재생시킨 뒤,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턱짓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그제야 마츠모토 총리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고, 영상의 내용을 확인한 그의 얼굴은 창백하길 넘어 사색이 되어 굳어 갔다.
곧이어 녀석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팔다리를 후들대다 못해 마치 경련이 일어난 듯 입술까지 파르르 떨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소파에 털썩 엉덩이를 떨어뜨렸다.
나는 입꼬리를 거칠게 비틀며 녀석을 똑똑히 노려보고서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말해 봐, 이 쪽발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