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찾기 (3)
러시아 외교 역사 도서관.
1800년대 후반부터 소련을 거쳐 지금의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각종 역사적, 문화적 기록이 담긴 문헌들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
말이 도서관이지, 박물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사료들 또한 당연히 보관되어 있는 상태.
다만, 한국을 대표해서 방문한 게 아니었기에, 공식적으로 자료에 접근하는 건 불가능한 게 원칙이었다.
이것 또한 역사적 자료였으니까.
그렇다고는 하나, 통역을 맡은 윤설하의 사촌 오빠인 윤형식이 인맥을 통해 미리 뇌물을 건넨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곧바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러시아가 일본과 맺은 범죄인 인도 협정입니다.”
윤설하의 사촌 오빠는 능숙하게 통역했고, 직원은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더니, 러시아어로 몇 마디 말을 남기고는 문헌 보관실로 향했다.
“인덱스 작업이 된 덕분에 찾는 건 어렵지 않다고 하네요.”
“아, 그렇습니까?”
“네. 그래서 일일이 찾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5분만 기다리라고 했으니, 금방 가지고 나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직원이 두꺼운 책을 들고 돌아왔다.
윤형식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곧장 책을 펼쳐 원하는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 찾았습니다. 여기 있네요.”
나와 윤설하는 곧장 눈을 부릅뜨고 그에게 다가갔다.
“읽어 주시겠습니까?”
“예. 바로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러시아와 일본은 각국에서 일어난 범죄에 대해…….”
그가 번역해 주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안중근 역사문화재단에서 내게 넘긴 자료와 내용에 차이가 없었으니까.
러-일간 범죄인 인도 협정.
당시의 언어와 용어들로 쓰여 있지만, 현대의 단어들로 해석하자면, 일본에서 러시아에 범죄인 인도를 신청하면 러시아의 외무부와 법무부를 통해 전달되고, 정부에서 허가가 날 시에 범죄인을 양도받을 수 있다는 것.
이렇게만 보면 안중근 의사를 일본 영상관에서 데려간 게 합법처럼 보인다.
다만, 이 협정이 체결된 날짜는 1911년 6월 1일.
안중근 의사가 체포되어 일본으로 넘겨진 건 1909년의 일이다.
사형이 집행된 것 또한 1910년에 벌어진 일.
다시 말해 안중근 의사가 사형당하기 전까지는 일본에서 안중근 의사를 데려올 만한 제대로 된 조약 및 협약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
한마디로 불법 연행이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자신들의 짐을 덜기 위해서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또한, 재단에서 추측한 내용과 맞아떨어졌다.
하얼빈역은 러시아가 중국과 합의해 조차(租借)하던 지역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 러시아의 관할하에 있던 땅이라는 것.
그런데 그 땅에서 일본의 국빈급 손님이 죽는 일이 벌어지자, 어떻게든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본이 안중근 의사를 넘기라는 요구를 특별한 근거 없이 받아들인 거겠지.
“혹시 러시아 대사관에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까?”
“아마 가능할 겁니다.”
윤형식은 턱을 매만지며 이야기했다.
“사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라고 하지만,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거든요. 당시에는 큰 사건이었어도, 종전한 지 한참이 지났고, 본인들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나는 가볍게 입꼬리를 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돌아가죠.”
“예.”
***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이두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선배님.
“어, 두형아, 통화 괜찮지?”
-예. 그런데 국제전화로 뜨는데요?
“잠깐 러시아에 와 있어.”
-러시아요?
“응.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뭐든 말씀하십시오.
“내가 우리 직원 통해서 자료 하나 보낼 테니까 러시아 대사관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러시아 정부의 입장을 밝혀 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거면 되나요?
“일단은 그것만.”
-예. 언제쯤 보내시는 겁니까?
“오늘 중으로 들어갈 거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받고 연락 줘.”
***
한국으로 돌아온 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이두형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어, 두형아.”
-선배님, 저번에 요청하신 건 있잖습니까? 러시아 대사관 통해서…….
“기억해. 그거 답변 왔어?”
-예. 팩스로 보내 드리면 되겠습니까?
“내 직통 팩스로 보내 주면 돼.”
-알겠습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팩스가 도착했고.
그 내용을 번역한 결과.
‘1909년과 1910년에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는 어떠한 범죄인 인도 협정도 맺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안중근 의사를 일본에 인도한 일에 대해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단, 100년이 넘게 지난 일이기에…….’
윤형식이 예측한 대로였다.
애초에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난 만큼, 한국이나 일본이 러시아에 책임을 묻거나 탓할 수는 없으니, 대수롭지 않게 사실을 인정했다.
혹시나 소송을 걸 생각을 하지는 말라는 문구를 담고 있었지만, 절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의 목표는 일본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이제 슬슬 소송에 대해 준비해야겠네요.”
일본과 한국에 관련된 문서는 국내에도 남아 있는 만큼, 어렵지 않게 수집을 마칠 수 있었다.
남은 건 일본에서의 소송뿐.
“본격적으로 움직여야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W&K로 갈 겁니다. 차 준비해 주세요.”
***
“오랜만입니다, 변호사님.”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남자는 법무법인 W&K의 대표 우종민.
“잘 지내셨죠?”
“물론입니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변호사 개업하지 말고, 저희 사무실로 오시지 그러셨어요. 업계 최고의 대우를 넘어, 한국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좋은 대우를 해 드릴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제가 돈 보고 변호사 개업을 한 건 아니라서요.”
“아, 그렇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나저나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W&K에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해서요.”
“제안요?”
“예.”
나는 주저할 것 없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큰 건 하나, 같이 맡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우종민 대표의 눈이 반짝였다
“변호사님이 제안하시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그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역시 사업가다.
내가 엮인 사건을 함께 진행한다면, 적당한 선에서 끊기지 않고 커다란 이슈가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을 터.
자연스레 W&K의 이미지도 상승할 테고, 그에 따른 부가적인 이익까지 머릿속으로 계산이 끝났겠지.
“어떤 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국외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이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더욱 좋죠.”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승소한다면 더욱더 큰 효과가 나올 테니까요.”
“좋습니다.”
나는 흡족하게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폈다.
“그러면 W&K에서 일본에서 활동할 수 있는 변호사 자격증이 있으면서 실력이 뛰어난 분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오시면 자세하게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우종민 대표의 호출을 받은 한 남성이 들어왔다.
“김상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깍듯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겉보기에 보이는 나이는 30대 중반.
이런 젊은 나이에 W&K에 입사했다는 것부터가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종민 대표는 친근하게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국내에서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변호사 자격증을 최연소로 취득한 친구입니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김 변, 지금까지 승소율이 얼마였지?”
“92.8%입니다.”
70%만 넘어도 괴물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92.8%라니.
우종민이 자랑스럽게 데려올 만한 인물이다.
“최서준입니다.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예.”
“한국인이시죠?”
“맞습니다. 어머니는 경상도분이시고, 아버지는 전라도분이십니다. 조부모님들도 마찬가지시고요.”
한국인 중에서도 토종 한국인.
그렇다면 이번 소송에서도 거리낌이 없을 터.
더 지체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바로 사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그들에게 건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안중근 역사문화 재단에서 의뢰가 들어왔는데…….”
사건을 천천히 설명해 가자, 둘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감탄 그리고 아쉬움과 한탄이 터져 나왔다.
사업가로서.
그리고 변호사로서.
또 한국인으로서 당연한 반응이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뒤, 나는 차분하게 말을 덧붙였다.
“승소를 확신하진 않지만, 소송이 벌어지는 것만으로도 분명 국제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겁니다. 한국인의 뿌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작업이 될 테고요.”
김상문 변호사는 내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저에게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필요해서 부른 건데요.”
김상문에게는 단순히 W&K 변호사라는 호칭을 넘어 국내에서 이름을 알릴 만한 계기가 될 터.
게다가 법무법인 W&K는 부자, 재벌, 고위급 관료만 보호한다며 국민들이 색안경을 써서 늘 물어뜯을 대상이었지만, 이번 일만 잘 해결된다면 이미지 쇄신에 큰 도움이 될 터.
우종민 대표와 김상문 변호사 모두 놓칠 수 없는 기회라는 것이지.
까놓고 말해서 W&K는 나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조력자였다.
내가 일본어 회화는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는 하나, 그걸로 변호를 맡기에는 무리였다.
나 혼자서 사건을 맡아 승소한다면, 그 파급력은 더할 나위 없을 테지만, 거기에 눈이 멀면 소송 자체를 제대로 진행할 수 없을 테니까.
애초에 한국의 법과 일본의 법이 다르기도 하며, 일상 언어와 법적 용어에서 차이가 있기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믿을 만하고 실력이 있는 인물은 단연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꼽히는 W&K 소속 변호사.
만에 하나 내가 부족한 점이 생기더라도 이쪽에서 보완해 줄 가능성도 있으니까.
우종민 대표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십니까? 물론, 단순 보도로도 최서준 변호사님이 맡으셨다면 큰 화제가 될 테지만…….”
“소송은 오래 갈 겁니다. 화제성이 오래도록 유지되려면 단순해서는 안 되죠.”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보탰다.
“방송이 나갈 겁니다.”
“방송요?”
“예. 그것도 지상파로 황금시간대에 방송될 겁니다.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죠.”
그 말에 우종민 대표와 김상문 변호사는 감탄을 쏟아 냈다.
“안중근 의사 다큐멘터리군요.”
“맞습니다. 편집은 이미 끝났고, 소송 시기에 맞춰 방송할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으니, 준비하셔도 좋습니다.”
국장을 코앞에 둔 송재훈 PD가 완벽하게 작업해 두었다.
완성물 또한, 한국인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내용.
소송을 걸기 직전에 터뜨리면, 분명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엔 충분하겠지.
“저희는 일본에서의 소송을 이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 후에 한국에 돌아오면, 우리는 국민 영웅이 되어 있을 테고, 꽃길이 펼쳐져 있을 테니까요.”
김상문 변호사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연하게 말했다.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변호사님을 돕겠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코를 찡긋했다.
“한번 제대로 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