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찾기 (1)
안중근 역사문화 재단장을 돌려보내고 곧장 휴대폰을 확인했다.
-보낸 이 : 38
-동영상
보낸 이가 38.
미래 문자가 아니라,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내용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5년 전인 2026년.
나는 조심스럽게 동영상을 재생했다.
-ちょっと待って.
화면이 켜짐과 동시에 들려오는 일본어.
외국어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일본어를 전공으로 했었던 덕분에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한 만큼 바로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잠깐 기다리라는 뜻의 문장.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던 여자는 욕실로 들어갔고 이내 샤워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앵글이 돌아가며 화면에 들어온 건 한 남자.
추측되는 나이는 대략 50대 초중반.
그는 침대에 누운 채 리모컨을 만지며 TV를 응시하고 있었다.
옷을 벗은 채 이불만 덮고 있는 상태라는 걸 고려하면 둘은 필시 연인일 터.
다만,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점은 둘의 나이 차이가 꽤나 많이 난다는 것이었다.
씻으러 욕실에 들어간 여성은 아무리 많다고 쳐도 20대 초반 정도였으니까.
동영상은 큰 내용 없이 진행되었다.
자연스레 남자의 주변에 있는 물품과 TV 화면으로 시선이 향했고, 화면 속 장소가 일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5년 전의 일본.
잠시 후, 욕실의 물소리가 그치며 남자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동시에 그의 얼굴이 카메라의 앵글 정면으로 향했다.
잠깐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일본인 중에 내가 아는 인물이라면…….
머릿속을 헤집자, 곧바로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마츠모토 신이치.
일본의 총리로 벌써 10여 년째 총리직을 맡고 있는 일본 우익 정치의 핵심 중에 핵심인 남자.
5년 전이기에 지금보다 흰머리가 적기는 하지만, 얼굴만 보면 그가 확실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2026년이니 아마 동영상이 촬영된 이 시점에서도 분명 총리일 텐데.
샤워실에서 수건을 두른 채 나온 여성은 자연스레 마츠모토 총리가 있는 침대로 향했다.
둘은 서로 안고 있기도 잠시, 몸을 두르고 있던 수건을 집어 던지고 서로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적나라한 장면이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이 줌아웃 되더니.
이내 동영상이 이 휴대폰을 통해 재생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듯, 테이블이 보였고.
머지않아 휴대폰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남자의 얼굴이 화면 속에 들어왔다.
-뒷내용까지 더 보여 드려야 협상에 응하시겠습니까?
먼저 입을 연 남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지만, 입꼬리는 거칠게 휘어져 있었다.
-…….
그의 맞은편에 있던 인물은 다름 아닌 마츠모토 총리.
그는 난색을 표하며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이 동영상이 세간에 공개되면, 다음 달에 있을 선거에서 다시 총리직을 연임하시기는 힘들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시겠죠?
아무래도 불법 촬영한 내용을 가지고 협박을 하고 있는 모양.
-……알고 있다네.
-저는 크게 바라는 것 없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액수만 챙겨 주십시오. 그러면 원본까지 전부 삭제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선거 자금을 준비하느라고 그렇게 큰 액수를 마련할 수가 없어.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안 되겠나?
-그렇게 선거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끌려고 하시는 속셈을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절대 아니라네. 내가 약속을 어긴 적이 있나?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정 안 되신다면 어쩔 수 없죠.
남자는 피식 비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당에 넘기면 거기서도 짭짤하게 쳐주지 않겠습니까?
-뭐라고?
마츠모토 총리는 이마에 힘줄까지 솟은 채 눈을 부릅떴다.
-와타나베!
쾅!
마츠모토 총리는 테이블을 쾅 내려쳤지만, 와타나베라 불린 남자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바로 기사로 내려다가 참은 겁니다. 총리님을 위해서 진실은 숨기지 않고 언론을 통해 알려야 한다는 기자의 숙명도 버리고 협상 정도는 해 드리려고 했는데……. 불가능하다는데 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기자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 뉴스 알림은 꼭 켜 두십시오. 반대당에서는 아마도 뉴스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할 테니까요.
그는 조롱조의 말을 남기며 자리를 떴다.
마츠모토 총리는 손을 부르르 떨더니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에 있던 컵을 내던졌다.
-이런 양아치 녀석이!
욕지거리를 내뱉었음에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아스하 신문에 와타나베 켄시라는 기자가 있을 거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 녀석 처리해 버려. 그리고 분명 나에 대한 동영상을 백업해 뒀을 테니까 그것도 찾아서…….
자세하게 지시하는 장면을 끝으로 동영상은 종료되었다.
나는 곧장 인터넷에 들어가 아스하 신문과 와타나베 켄시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2026년까지 아스하 신문 소속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갔지만, 그 뒤로는 같은 이름으로 단 하나의 기사도 뜨지 않았다.
미래 문자를 통해 본 상황을 생각하면 돈을 받고 도주한 게 아니라, 아무래도 마츠모토 총리에게 암매장이라도 당한 것일 터.
적당한 선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움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총리가 불륜을 저지른 건 필시 문제가 될 테지만…… 아니지, 잠깐만.
내 기억이 맞다면 마츠모토 총리는 일찍이 배우자를 잃었을 텐데?
곧장 확인을 해 보자, 그의 아내는 2020년에 세상을 떴다.
동영상이 촬영된 시기에는 마츠모토 총리가 사랑을 나눈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일단 사별했으니까.
물론, 그 상대가 조금 어려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원조 교제 혹은 성매매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어떤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생각해야 한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미래 문자가 온 타이밍을 생각하면, 분명 이 내용을 가지고 일본과의 소송에 활용하라는 뜻일 터.
그러나 불륜도 아닌데 이걸 이용해 협박할 수도 없다.
아무리 약점이라고는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겉보기에는 딸뻘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동안이라서 나이가 있을 수도 있고…….
잠깐만. 이거 설마…….
마츠모토 총리가 사는 관사와 근무지는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그 관사에 저렇게 젊은 여성이 드나들었다면, 단순히 와타나베라는 기자 한 명만 알 게 아니라, 많은 기자들이 미리 눈치를 챘을 터.
그런데 근황을 보아하니, 단순히 기자 한 명만을 처리해서 일을 덮었다는 건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동영상 속 여자가 마츠모토 총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츠모토 총리의 가족에 대해 확인하기 시작했다.
배우자는 한 명이었고 오래 전에 사별했으며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이 한 명.
일국의 총리라서 그런지, 그의 가족사진 또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얼어붙고 말았다.
마츠모토의 가족사진에 있는 딸은 동영상 속에서 본 여성의 얼굴과 똑같았으니까.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넘어 욱씬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의 딸이 2010년 출생이라는 것.
동영상이 촬영된 2026년 당시, 한국 나이로 17세, 일본 나이로는 16세.
미성년자라는 것이지.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다.
근친상간도 모자라, 그 대상이 미성년자니까.
범죄고 자시고를 넘어 이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넘어선 패륜이다.
“허…….”
머리가 정지된 것 같은 느낌.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 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거 상황이 굉장히 오묘하게 돌아간다.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확실한 건.
동영상에 담긴 내용을 가지고 총리를 협박해 소송에 이용하면, 승소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아니, 총리가 나에게 힘을 실어 줄 테니 무조건 승소한다고 봐야지.
다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승소하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건 확실하나, 이런 방식이라면 안중근 의사의 명예를 회복할 수는 없다.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대외적, 법적으로는 정리가 될지 몰라도, 사자(死者)에게는 그게 전부가 아니니까.
정정당당해야 한다.
한 치의 거짓과 불투명한 사실 없이, 오로지 팩트로만 승부를 보고서 승리해야 한다.
그게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님을 위한 일이다.
뒤 공작으로 일을 끝내 버린다면, 나는 안중근 의사를 사법 살인한 일본과 똑같아지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미래 문자를 버릴 수는 없다.
애초에 아무런 대책 없이 순수하게 실력만으로는 승소할 수 없을 테니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번 소송에서는 일본에서도 법리적인 해석이 아니라 정치적인 견해를 담을 게 분명할 터.
그러니 내가 해야 할 건.
미래 문자를 통해 본 내용을, 정정당당한 승부를 위해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비장의 무기도 없이 싸우기엔 일본 현지 재판이라는 핸디캡, 페널티가 너무나도 크니까.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하나.
이 동영상을 찾아내서, 마츠모토 총리에게 이번 소송만큼은 정치적인 의미를 담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오로지 법리적 해석에 따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압박을 넣는 것.
정확히는 삼권분립의 원칙이 지켜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면 안 된다.
오로지 그것.
실력 대 실력으로 싸우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이 비장의 무기를 갖추는 건 물론이고.
승소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뒤에 확신이 생겨야 소송을 걸 수 있다.
국제 소송이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오케이.
상황의 정리가 끝난 덕분일까,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했던 당시의 자료 수집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건 내가 직접 윤설하를 비롯해 사무실 직원들과 천천히 준비를 하면 되고.
그 전에, 이 모든 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미래 문자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으니 마츠모토 총리에게 살해당한 일본의 기자, 와타나베 켄시가 촬영한 동영상을 내 손에 넣는 것.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는 반드시 백업본을 남겨 뒀을 것이다.
그것도 다른 이들이 찾아내지 못하도록 꽁꽁 숨긴 채로.
물론, 마츠모토 총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수색을 했을 테지만,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동영상 파일 백업본을 찾아냈다면, 애초에 내게 이러한 문자가 오지 않았을 테니까.
아주 은밀하게 숨겨 놨을 테지.
이런 일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 한 명 있지.
원래 한 번 훔쳐본 놈이 다음에도 더 잘 훔치는 법 아니겠는가?
그것도 국제적으로 노는 인물이라면 더욱더 그렇겠지.
나는 대포폰을 들어 한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최서준입니다. 잘 지내셨죠?”
-네, 오랜만이네요.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하셨어요?
씨익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보물찾기를 할 겁니다. 구미가 당기시면 직접 오셔서 이야기 좀 나눠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