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님 출세하신다!-316화 (316/341)

발돋움 (5)

잠실의 한 은밀한 요정.

약속 시간에 맞춰 들어가자, 바로 알아본 직원들이 날 안내했다.

“안에 손님은 도착하셨습니까?”

“예. 30분 전에 오셨습니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던 모양.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WG의 우건영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날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변호사님.”

나는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그와 간단히 악수를 하고서 자리에 앉았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저도 지금 막 왔습니다.”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먼저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받으시죠.”

“아, 네.”

말없이 그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한 잔을 비우고 나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예?”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죠?”

“아, 아닙니다.”

우건영 회장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훤히 드러났다.

재벌그룹 총수로서 늘 갑질만 하던 사람이지만, 오늘은 을이 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을 터.

사건이 사건인 만큼 워낙 세간의 이목이 쏠려 있는지라, 나를 자극하면 본인이 손해를 본다는 것쯤은 당연히 파악하고 있을 테니까.

다른 때는 몰라도 이처럼 큰 잇속이 걸려 있는 문제에서만큼은 가장 민감한 건 재벌들이다.

숙일 때는 숙일 줄 아는 게, 본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유리하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이지.

그렇기에 한창 깨지면서도 숙이고 들어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평소와 같았으면, 나는 딱딱하고 까칠하게 나올 거라고 예상했을 테니까.

하지만 예상외로 내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대하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나는 다시금 온순하게 말을 이었다.

“WG그룹과 소송하게 된 건 저 또한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여전히 상황 파악을 하는 눈빛.

“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변호사님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만…….”

우건영 회장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상황이면, 단순히 비정규직들에 대한 대우를 바꾸는 걸 넘어서 불매운동이 일어날 가능성까지도 있어 보입니다.”

그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 그렇다고 제가 하소연을 하려고 나온 건 아니고요. 그저 저희 상황이 이러하니, 변호사님과 잘 이야기를 해서 마무리를 하고 싶은 마음에…….”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오지 않았습니까?”

나는 술잔을 놓고 몸을 뒤로 기댔다.

“이미 고소장은 접수됐고, 국민들의 이목이 쏠렸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불매운동의 불씨까지 보이고 있죠. 그것도 아주 장기적으로요.”

그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남정유업이 갑질 때문에 국민들이 불매운동하면서 2년 넘게 적자를 낸 건 알고 계시죠?”

그것도 모자라 주식까지 반 토막 되었다.

남정그룹의 대기업 순위는 매번 손가락에 들다가 10위권 밖으로 밀린 지 오래고.

우건영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알고 있습니다.”

물론, 말투는 부드럽더라도 확실하게 우위는 점해야 한다.

온화한 태도와 갑과 을의 관계는 별도니까.

“그런데 여기서 소송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면 손해를 보는 게 누구일 것 같습니까?”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재판 결과를 생각하자면…….”

“제가 패소하더라도 그걸 손해로 생각할 것 같습니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대기업을 위해 서민의 편에서 싸웠지만, 결국 부조리에 패한 국민 영웅이 되겠죠.”

그는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 곰곰이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이게 또 사람 일인지라 저희끼리 잘 협의가 된다면 좋은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벌써 꼬리를 내렸다.

이 정도면 더 세게 나갈 필요는 없지.

“그렇죠. 맞는 말씀이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테이블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제가 오늘 왜 회장님을 뵈러 온 줄 아십니까?”

“……아마 이두형 의원이 부탁한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형이 덕도 있기야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나는 가볍게 입꼬리를 비틀며,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갔다.

“제가 단순히 오늘만 보고 말 거라면 아예 안 왔을 겁니다. 만에 하나 오게 되더라도 이렇게 좋은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겠죠. 차라리 기자들을 데리고 와서 내일 아침에 회장님 얼굴이 대서특필 되도록 만들었을 겁니다.”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한쪽 입꼬리만 비틀었다.

“비겁하게 뒤에서 합의를 보려고 한다고.”

“그러면 왜…….”

“좀 더 멀리 바라보자 이겁니다. 까놓고 말해서 회장님도 이런 사사로운 건에 엮일 만한 분이 아니시잖습니까?”

우건영 회장의 눈썹이 움찔했다.

“사내대장부들끼리 더 큰 미래를 그려 보자는 뜻입니다. 이를 테면, 내년 겨울부터 펼쳐질 큰 그림을 그리자는 거랄까요?”

“내년 겨울이라면…….”

그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순간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혹시 변호사님…….”

나는 대답 대신 히쭉 입꼬리를 휘었다.

“거기까지.”

그가 더 말을 하려는 걸 막았다.

“더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우건영 회장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가득 찼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이런 대화라면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단순히 변호사로서 그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아니, 오히려 변호사는 내 발돋움을 할 장치라는 사실을 말이다.

“제가 WG그룹 보고 희생양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건에 관해서는 언젠가 한번 터질 일이라는 건 회장님도 알고 계셨잖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터진 터라…….”

“그러니까 이번에는 WG에서 조금만 손해를 보자, 이겁니다. 그 대신 나중에 제가 한번 도와드린다면, 온전히 손해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오히려 이득이겠죠.”

그와 동시에 우건영 회장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대국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대국적으로.”

곧장 그의 눈빛이 사업가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혹시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것까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

“다만, 확실한 건.”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약속해서 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거죠. 회장님도 그 정도쯤은 알고 계시잖습니까?”

정계에 발을 들이민 이들이라면, 모두가 익히 들어 본 사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금 그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저는 단순히 그 정도의 상투적인 관계에 머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한 번 주고 한 번 받는 단순히 비즈니스 관계는 정이 없잖습니까? 더 깊은 관계가 되자는 거죠.”

그제야 우건영 회장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이젠 확실하게 알아챘을 것이다.

오늘의 이 자리는, 단순히 비정규직 연합의 협상과 관련된 게 아니라.

내가 WG그룹과 돈독한 관계를 맺기 위한 시작선이 될 거라는 사실을.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그는 하회탈처럼 활짝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나는 코를 찡긋하고는 단번에 술잔을 비워 냈다.

그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면 충분할 테지.

어차피 그에게 넘겨줄 건 국가 사업 중 하나로, 수많은 대기업끼리 경쟁하면서 뇌물을 누가, 누가 많이 쏟는지가 사업을 따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그런 건수일 터.

대권을 쥘 수만 있다면, 그런 사업 한두 개 정도는 충분히 넘길 만한 가치는 있다.

다만, 이대로 자리가 끝나서는 안 된다.

나를 믿고 맡겨 준 비정규직 연합들의 문제는 해결해야 하니까.

“그리고 다시 처음 이야기에 관해서 말씀을 조금 드려야 될 것 같은데…….”

“예, 말씀하십시오.”

“우선 그동안 일한 사람들 중 어느 정도 연차가 되는 사람은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셨으면 합니다.”

“5년 차 이상은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겠습니다.”

“3년 차로 하시죠.”

그는 턱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비정규직 채용 시 11개월 단위로 계약하는 걸 막지는 않겠습니다만, 이후 계약을 연장할 시에는 일한 만큼 제대로 퇴직금을 적용하도록 내규를 바꿔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총 근무 개월 수에 따라서 지급하라는 뜻이시죠?”

“예, 맞습니다.”

그는 쿨하게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제대로 정리를 해야 했다.

오늘 그와 협상한 내용대로 WG그룹의 방침이 바뀌면, 자연스레 다른 대기업도 눈치를 보고 WG를 따라하려 들 터.

여기서 어중간하게 처리를 한다면, 나중에 대선에 나갈 때도 발목을 잡힐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그러면 내일 바로 이에 대해 발표하면 되겠습니까?”

“아니요. 그래도 조금 더 세간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아…….”

그는 낮게 탄식을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건은 대선을 위해 발돋움하기 위한 판이다.

너무 싱겁게 끝나면, 국민들에게 임팩트가 없을 터.

“그렇다고 너무 오래 끌면 WG에서 손해가 커질 테니…….”

미리 생각해 둔 날짜를 말했다.

“1차 공판 하루 전 날로 하죠. 그러면 고소 취하하기도 쉬울 테고요.”

지금으로부터 약 1주일 후, 그 정도면 딱 적당할 터.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날짜에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 말로 이런 제안을 해 주셔서 더 감사하죠.”

그는 눈썹을 들썩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변호사님.”

***

1주일 후.

WG는 나와 약속한 사항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내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WG그룹, 사실상 항복 선언…… 비정규직 연합의 요구 그 이상의 합의 성공!

-1차 공판을 하루 앞둔 날, WG그룹은 비정규직 연합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하며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이틀 전, 비정규직 연합의 변호사인 최서준이 공식적으로 WG그룹 본사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도되었는데, 그때의 담판이 큰 결과를 불러온 것이라고 추정된다. WG그룹이 발표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1.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복지는 정규직 근로자와 동등하게 대우한다.

2. …….

이러한 내용은 비정규직 연합이 처음 요구했던 조건보다도 훨씬 더 상향된 조건이라는 사실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최서준 변호사라는 거물이 이 사건을 맡으며 확대되는 여론의 눈치를 본 탓도 있겠지만, 최서준이 제대로 담판을 지은 효과가 큰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합의가 진행되며, 오늘 날짜로 비정규직 연합의 고소는 취하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비정규직의 근무 복귀는 내일 중으로 진행될 것이며…….

-No.1 경제 임윤아 기자

댓글은 볼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나에 대한 찬양 그 자체.

-대박이네. 완전 도랏멘 ㅋㅋㅋ

-최서준 서희 빙의한 듯.

-와, WG 개쫄았네ㅋㅋㅋㅋ 공판하기도 전에 합의래. 이게 최서준의 힘인가?

-최서준 외교부 장관시키자. 진짜 답답한 외교도 이런 식으로 시원하게 처리 좀 하자!

-아, 제발 날 가져요, 최서준 변호사님 ㅠㅠ

-진짜 다음 대선 나가세요. 나 대구 사람이라 지금까지 무조건 민국당이었는데, 최서준이 나오면 대한당 달고 있어도 최서준 찍는다.

-아니, 나 대기업이 근로자들 요구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 타결한 거 처음 봄. 진짜 미친 수준이다.

-혹시 최서준이 검사 시절 빙의해서 WG 비리 찾아서 들고 간 거 아님? ㅋㅋㅋ

-ㄴ 그거라면 리얼루다가 가능성 있다. 최서준 능력 생각하면 인정~.

-이번 협상이 시사하는 바가 엄청 큼. 다른 대기업도 무조건 눈치 보고 비정규직들 대우 좋게 바꿀 수밖에 없음. 앞으로는 WG 같은 꼼수 못 쓸걸?

-ㄴ저도 비정규직인데 그러면 대우 더 좋아지나요?

-ㄴ하청이면 몰라도 최소한 대기업 직계면 무조건 좋아짐.

-서민들의 꿈과 희망을 지켜 주는 최서준 변호사님 만세다, 진짜로!

-최서준을 국회로!

-최서준님이 어떻게 국회를 감, 최소 청와대는 가야지!

민심이 내게 넘어오고 있다.

이대로만 가면 된다.

앞으로 자잘한 사건들로서 간간이 소식을 알리다가.

커다란 건수 하나.

국민들의 마음을 관통하며 휘어잡을 만한 큰 건 하나.

그거면 충분하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

파란집.

그 푸르른 지붕을 한 종로의 대저택.

청와대에 입성할 나의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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