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님 출세하신다!-313화 (313/341)

발돋움 (2)

“어, 벌써 왔네?”

한지유는 놀란 눈빛으로 날 맞이했다.

“더 늦게 올 걸 그랬나?”

“아니, 퇴임식 날인데 당연히 자정은 넘길 줄 알았거든.”

사실, 내가 빠진 회식 자리는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었다.

붙잡는 검사들을 겨우 말리고서 빠져나왔으니까.

아무리 주인공이지만, 오늘이 단순히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아니라, 검사로서의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집에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보내고 싶은 마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은 먹었지?”

“응. 와인이나 한잔하자.”

“좋지.”

내가 씻는 사이, 한지유는 창가에 간단하게 와인과 치즈를 준비해 두었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둘이 와인 마시는 거.”

“그러게.”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자주 마실 수 있을 거야.”

“맞아. 오빠 백수잖아.”

그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실제로 변호사로 나아갈 준비는 모두 끝이 났다.

다만, 퇴임 직후 곧바로 변호사로 전환하는 건 그림이 좋지 않기에, 적어도 봄이 오기 전까지는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못했던 가장 노릇도 제대로 하고, 여행도 다녀야지.

머릿속으로는 천천히 계획을 그리고 있긴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내일부터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아직까지 실감이 되지 않는다.

한지유는 와인 잔을 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일부터 오빠 삼식이 해도 뭐라고 안 할게.”

“삼식이?”

“집에서 하루 세 끼 다 먹으면 삼식이라고 하잖아.”

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

정년퇴직 후, 일자리를 찾지 않고 집에서 세 끼를 다 먹으면 삼식이(三食-)라고 부른다고 했던가?

한 끼만 먹으면 일식이라고 부르고.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내가 차려 먹을게.”

“농담이야. 다 맛있게 차려 줄게.”

그녀는 잔을 내게 부딪쳤다.

그윽한 향을 풍기는 와인을 한 잔 마신 뒤, 한지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지훈이 들어갈 유치원 말인데…….”

평소처럼 소소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워낙 내가 바쁜 탓에 식사 시간 혹은 침실에서만 하던 이야기인데, 이렇게 여유롭게 대화하니 조금은 다른 느낌.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였다.

한창 이야기를 하던 도중, 한지유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문득 물었다.

“그리고 설하 씨는 어떻게 됐어?”

“변호사 사무실로 오기로 했어. 사무장 맡아 주신대.”

“다행이다. 설하 씨가 옆에 있어 주면 든든할 것 같았거든.”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술도 들어가고, 분위기도 무르익은 탓일까.

자연스레 진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지유야.”

“응?”

“앞으로 걸어갈 길은 조금 힘들지도 몰라.”

그녀는 무거운 표정 대신 오히려 굳센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힘들어도 돌이킬 수 없어.”

한지유는 살포시 내 손등에 그녀의 손을 얹어 잡았다.

“오빠와 함께라면 맨발로 가시밭길도 걸어갈 수 있어.”

“…….”

“어떤 험난한 과정이 있더라도 오빠랑 지훈이까지 우리 셋이 함께한다면 행복하리라 믿어.”

그녀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내 날 행복하게 만들어 주리라는 것도 알고 있고.”

나도 모르게 감정이 훅 올라왔다.

퇴임식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고마워.”

단순히 이 말 하나만으로는 내 머릿속의 생각을 전부 표현할 수 없었다.

한지유가 있기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있기에 더 나아갈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살면서 지금까지 받은 축복 중 가장 큰 것은 아내가 한지유라는 것에 확신이 생겼다.

“힘들 땐 의지해도 돼. 그게 부부니까.”

내가 감동했다는 표정이 드러나서 그런지, 한지유는 장난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나 아직도 톱급이야. 얼마 전에는 한시아보다 더 높은 조건으로 복귀 제안 왔다니까?”

내가 비록 표현에 서툴지만 내 마음을 말해 주고 싶었다.

“지유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은.

“난 아무래도 지훈이보다 네가 더 좋은 것 같아.”

한지유는 헛웃음을 지었다.

“……지훈이 듣겠다.”

***

시간엔 가속도가 붙는다.

그 말이 체감되는 건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더 행복해서일 것이다.

검찰에서의 마지막 한 달보다 가정에 충실한 1개월이 더 빠르게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2월 1일.

나는 한지유의 SNS를 통해 근황을 전했다.

-안녕하세요, 한지유입니다. 오늘은 제가 아닌, 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 남편인 최서준은 지난 해 정년 퇴임을 거친 후 오래도록 휴식을 하며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과의 오랜 상의 끝에, 제 남편은 새로운 길을 나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검사로서, 그리고 검찰총장까지 지내며 쌓은 경력을 통해 변호사로서 법률사무소를 개업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을 한 이유는, 많은 국민분들 중 법을 어렵거나 부담스럽게 여기시는 탓에 법률 구조라는 제도가 있음에도 그것을 잘 모르시거나 굉장히 어렵게 여겨 접근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법적 도움을 받으실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남편이 운영하는 법률사무소는 법률 상담 및 변호사 선임이 전부 무료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후 구체적인 사항은 남편이 직접 전달할 예정입니다. 저는 남편이 나아가는 길을 응원하려고 합니다. 국민분들께도 감히 응원을 바라진 않습니다만, 혹여 변호사 개업이라는 걸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시거나 오해를 하시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에 글을 작성했습니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시고, 행복한 나날되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한지유의 글은 단숨에 화제가 되었다.

수많은 공유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많은 기자들을 통해 기사로도 다양한 커뮤니티에 퍼지기 시작했다.

변호사 정식 개업은 3월 4일로 아직까지 한 달이나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일찍 변호사 개업 소식을 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2031년 올해의 설날은 2월 3일.

2월 2일부터 연휴가 시작되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친척 혹은 지인들을 만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될 터.

특히나 연휴 직전에 전해진 소식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자연스레 나의 변호사 개업에 대한 화제가 나올 테고.

SNS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알게 될 터.

국민 검사를 넘어 국민을 위한 인권 변호사.

그것도 무보수로 일을 한다고 하니, 사람들의 눈에는 호감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테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효과 좋은 홍보 방법은 바로 ‘입소문’이니까.

지금 당장 기자회견을 열려면 얼마든지 열 수는 있지만, 검찰총장이 아니라, 민간인인 만큼 굳이 그것보다는 SNS로 전하는 게 더욱 친근해 보이기도 할 테고. 기자회견보다 조금 더 가벼운 느낌을 주니까.

무엇보다도 한지유의 SNS에 올라간 글은 ‘혹시나 국민들이 색안경을 쓰고 바라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하는 느낌’을 주도록 작성했다.

그렇기에 읽는 이들에게는 홍보라는 느낌보다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마음이 돋보일 터.

또한, 부부간에 사이가 좋으면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호감이 생긴다는 사실은 역사는 물론, 세계 정치판에서도 증명이 된 사실.

그렇기에 단순히 몇 줄짜리 글귀이지만, 이걸 작성하는 데는 고단수의 노력이 들어갔다.

정확히는 한지유가 아니라, 나와 고중혁의 노력이.

그래야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법이니까.

“고생했어, 고 프로.”

“아닙니다.”

고중혁은 고개를 꾸벅였다.

나는 다시금 SNS에 올린 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박형태 참모로 있으면서 글 솜씨가 많이 늘었네.”

“그럼요. 박형태 연설문 대신 써 준 게 누구겠습니까?”

그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고중혁은 한동안 수면 밑에서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날 도와줄 것이다.

대선에 출마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전력을 숨겨야 한다.

그리고 대선 선거 캠프가 차려졌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겠지.

***

“생각보다 더 많네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법률사무소 개업식에 기자들이 올 것이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가 입구에 포진하고 있었다.

“법률 상담을 받을 시민들보다도 기자가 더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아직 개업식을 약속한 시간까지 2시간이나 남았다.

윤설하는 차를 몰고 들어가기 전, 갓길에 세워 둔 채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간이 기자회견이라도 하셔야겠는데요?”

“그래야 기자들이 좀 물러가겠죠?”

“예. 기삿거리 하나 정도는 있어야 안정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저는 여기서 내려서 기자들이랑 인터뷰하겠습니다. 설하 씨는 돌아서 주차하고 들어가 업무 준비해 주세요.”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차문을 열었다.

“문제 생기면 바로 부르십시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걸어서 법률사무소 입구로 향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한 기자가 나를 발견하고 외쳤다.

“최서준이다!”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기자들의 카메라가 나를 향했다.

촤르륵 돌아가는 셔터 소리.

그러나 달려오는 사람 중 기자는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시민들과 인사를 하며 법률사무소 입구로 향하자, 또다시 헛웃음이 났다.

이럴 줄 알았다.

알아서 포토라인까지 쳐 놨다.

기자들끼리 이럴 땐 통하는 게 있는 것 같다니까.

못해도 30분에서 1시간은 잡혀 있을 것 같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표시된 자리에 서자마자, 기자 하나가 마이크를 들고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총장님.”

“이젠 변호사라고 불러 주십시오.”

“아, 네. 변호사님.”

“조촐한 인터뷰나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스윽 기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거의 기자회견이네요.”

“기사는 좋게 써 드리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기자는 바로 질문지를 꺼내고 내게 물었다.

“우선 변호사로 전환하시게 된 이유가 어떤 건가요?”

“제 아내의 SNS를 통해 밝힌 바와 같습니다. 정년 퇴임 이후 쉬는 동안, 대한민국에 정말 많은 분들께서 법을 어렵고, 부담스럽게 여기셔서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께 어떻게 도움을 드릴까 고민하다가 마침 대한법률구조공단과 잘 이야기가 되어서 법률사무소를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법률사무소라고는 해도 정확히 어떤 곳인지 헷갈려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이분들을 위해 상세하게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기다렸던 질문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저는 간단한 법률 상담을 하고, 법률구조가 필요하신 분들을 대한법률구조공단과 연결시켜 드리는 역할입니다. 다만, 환경단체나 각종 협회 중,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거나 국익 혹은 공익을 위해 힘쓰시는 분들에 한하여 희망하신다면 저를 변호사로 선임해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이게 핵심이다.

간단한 사건들은 법률구조공단에 넘기고, 국민들의 눈에 부각될 수 있는.

즉,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사건들은 내가 도맡아 처리해서 그들의 호감을 사는 일.

이게 내가 대선에 나가기 직전, 발돋움의 방법으로 변호사를 택한 이유다.

굵직한 거 한두 개만 터뜨려 주면 국민들의 머릿속에 나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주기에 충분할 테니까.

“상담부터 변호까지 전부 무상으로 지원한다고 밝히셨는데, 돈을 받지 않고 일하시는 이유는 있나요?”

“제가 검찰에서 일하는 동안, 공무원으로서 국민분들이 내신 세금을 통해 월급을 받고 지금도 연금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시민분들께 돈을 받고 일한다는 건 말도 안 되죠.”

“일종의 봉사라고 봐야 되겠군요.”

“그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하고, 도움을 드린다고 표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겸손하기까지 하시네요. 어려운 결정이셨을 텐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기자는 존경스럽다는 눈빛으로 질문을 이어 갔다.

“이번 법률사무소가 차려진 지역이 종로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나머지 질문 또한 나와 고중혁이 예상했던 리스트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는 내내 확신했다.

이 내용이 기사로 나가면, 국민들은 나를 ‘기득권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서민’ 중 한 명으로 보게 될 테지.

시작부터 느낌이 아주 좋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