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털이 (12)
***
“오랜만에 뵙습니다, 의원님.”
“근 한 달 만이네요.”
광석곤 의원은 예전과 달리, 아주 깍듯하게 내게 허리를 굽혔다.
우리가 만난 곳은 대검찰청의 내 사무실.
그는 영 마음이 조급한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물었다.
“그러면…….”
광석곤 의원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비례대표 자리를 주시는 겁니까?”
“글쎄요.”
나는 천천히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때와는 상황이 조금 달라져서요.”
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예?”
“지금 민국당 상황은 잘 아시잖습니까?”
그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내가 광석곤 의원에게 선택을 기다리겠다고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너무나도 크게 변했다.
민국당은 민심을 잃은 것도 모자라, 수장까지 잃었다.
물론, 동정 여론이 일긴 하지만, 성태현이 건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
그때와 같은 조건을 준다는 건 내가 손해 보는 일이니까.
까놓고 말해서 이제는 광석곤 의원이 아니어도 내게 붙을 만한 인물은 충분히 더 있을 테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비례대표 자리를 드리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번호가 조금 밀리겠죠. 저번에는 11번을 드린다고 말씀드렸죠?”
“예, 맞습니다.”
“이번에는 서너 번째 정도 더 뒤로 밀릴 겁니다.”
“아…….”
그의 입가에서 낮게 탄식이 나왔다.
그리고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거겠지.
내가 그에게 넘겨줄 비례대표 번호는 15번.
모든 정당의 비례대표 의원의 총 수를 합치면 50명 내외.
평소 대한당의 득표수를 생각하면, 15번은 당선이 간당간당한 순번.
그러나 광석곤 의원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민국당의 줄을 잡는다고 한들, 공천을 받는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럴 바에야 비례대표로 나서는 게 훨씬 이득인 법이니까.
답은 정해져 있다.
그렇기에 그는 오랜 고민 끝에.
“알겠습니다.”
눈을 번뜩이며 날 바라봤다.
“검사님 말씀대로 하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광석곤 의원은 두 팔을 뻗어 내 손을 쥐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 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검사님.”
***
“이번 안건은 4년 연임제입니다.”
“어휴, 또?”
민국당 의원들은 질색하며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어차피 통과되기 힘든데 무슨…….”
“아무리 대통령님께서 물러나셨어도 우리 민국당은 한 몸이라고.”
그들의 말에 이를 지켜보던 대한당 당대표 김강진 의원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럴까?”
“당연하지. 우리가 그리 쉽게 분열될 정당으로 보이나?”
“긴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김강진 의원은 눈썹을 들썩이며 리모콘을 들었다.
필리버스터가 펼쳐지면, 반드시 기명 투표가 진행된다.
즉 어떤 국회의원이 찬성 반대 기권 중 어떠한 표를 던졌는지 알 수 있다는 뜻.
그렇기에 지금까지 똘똘 뭉친 민국당 의원 사이에서 전혀 배신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누가 뒤통수를 쳤는지 알면, 다시는 민국당에 발을 못 붙인다는 건 모두가 알기 때문.
그러나 김강진 의원이 이토록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로 나온다는 건, 어쩐지 불길한 징조로 느껴졌다.
‘뭐지?’
민국당 원내대표 조병갑 의원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지금으로서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금방 떨쳐 냈다.
당장 총선까지는 몇 달이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당을 배신할 만큼 간이 큰 녀석은 없으리라고 믿었으니까.
그렇게 의원들은 한 명, 한 명 투표를 했고.
마침내 전광판에는 이번 투표의 결과가 떠올랐다.
-안건 : 4년 연임제
-재적 : 300
-재석 : 300
-찬성 : 180
-반대 : 120
-기권 : 0
-결과 : 가결
짝짝짝짝.
대한당 의원들 사이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예스!”
“드디어 끝났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대한당 의원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했고.
“……이게 뭐야?”
“갑자기 왜…….”
민국당 의원들은 넋을 잃고 제 눈을 의심했지만, 결과는 역시나 가결.
그것도 국회선진화법에 의한 가결이었기에 반박의 여지는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투표에서 실수라도 했어?”
조병갑 원내대표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는데.
“워, 원내대표님.”
옆에 있던 이철민 의원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왜?”
신경질적으로 답하며 돌아보자, 이철민 의원은 손가락으로 반대편 전광판의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병갑 원내대표의 시선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고.
아니나 다를까, 민국당의 한복판에서 남들과 다른 단어가 붙어 있었다.
-광석곤 : 찬성
“저 자식 뭐야?”
조병갑 원내대표가 소리치며 광석곤 의원의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그곳에선 대한당 당대표 김강진 의원이 환하게 웃으며 광석곤 의원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손을 따뜻하게 잡고 어깨를 토닥였다.
“잘 왔네, 광 의원. 앞으로 잘 부탁하네.”
광석곤 의원은 조병갑 원내대표의 시선을 외면하고 김강진 의원을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국회의장은 모든 의원에게 들릴 수 있도록 마이크 가까이 다가가 입을 열었다.
“4년 연임제가 가결되었으며, 새롭게 펼쳐질 24대 대선부터는 4년 연임제가 적용될 것을 선포합니다.”
탕!
경쾌하게 울리는 망치 소리.
그 망치질 한 번에 민국당 의원들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단순히 4년 연임제의 가결은 앞으로 대선 구도가 변화한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대한당과 민국당의 긴 싸움.
당의 사활을 걸고 덤볐던 4년 연임제.
그 표결에서 민국당은 패배하고 말았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성태현 라인은 완벽하게 무너졌다는 것.
민국당의 당대표와 원내대표는 당연히 다음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더라도, 대표 자리에선 축출될 게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성태현의 줄을 쥐고 있던 수뇌부가 멸망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었으니까.
성태현의 라인이었던 이들이 물러난다면, 그 반대되는 이들이 민국당을 집어삼키는 건 자연스런 이치.
성태현에게 충성을 외쳤던 민국당 의원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잡고 있던 줄을 놓고 반대편으로 옮겨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총선만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의 정치 생명을 장담할 수 없게 되는 법.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단 한 명.
민국당에서 중립을 선언하고 있는 인물.
그리고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이자, 큰 권력을 쥐고 있는 남자.
현(現) 서울시장인 신동현이었다.
그러나 신동현의 뒤에 어떤 인물이 서 있는지 모르는 의원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최서준.’
비록 그가 민국당 의원들을 데리고 갈라섰다고는 하나, 성태현 라인은 현재 대한당과의 전쟁 구도에서 패배를 한 것도 모자라, 성태현의 온갖 비리로 인해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다.
이 상황에서 민국당을 되살리기 위한 인물은 최서준뿐.
좋든, 싫든 개인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여의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서준을 찾아 그에게 붙어야 했다.
***
“고맙네, 최 검사.”
대한당 당대표 김강진 의원은 내 손을 붙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자네 덕분에 4년 연임제가 통과된 것이나 다름없어.”
“의원님이야 말로 고생 많이 하셨죠.”
“내가 한 건 중요치 않지. 자네가 아니었으면 어차피 불가능했을 테니까. 하하하핫!”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정말 크게 빚졌어. 나중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세. 뭐든 돕지.”
“꼭 기억하겠습니다.”
“그래. 당연하지.”
김강진 의원은 자신의 가슴을 탁 쳤다.
“한 번 말하면 반드시 지키는 게 내 철칙이니까.”
“감사합니다, 의원님.”
“고생했고…….”
그는 다시금 함박 미소를 지으며 내 등을 팡팡 두드렸다.
“이제는 대선 준비를 해야 하나?”
“예. 그래야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총선과 대선이 겹치니까…….”
“그렇지. 지금 국회 돌아가는 걸 보면, 총선이랑 대선이 같이 치러질 거야. 주기도 4년이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고.”
“한 번에 투표할 사람이 많아서 머리 아프긴 하지만, 국민들 입장에선 한 번만 선택하면 되니 더욱 좋겠네요.”
“그렇지. 이건 여야 할 것 없이 동의하니 아마도 확실할 걸세.”
“그렇군요.”
“안 될 것 같으면…….”
그는 눈썹을 들썩였다.
“자네 도움 한 번 더 받지, 뭐.”
“하하하하핫. 얼마든지 그러시죠.”
김강진 의원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나저나 이제 대선 준비하려면 당분간은 손잡긴 힘들 것 같아.”
그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는 민국당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나?”
“예. 그럴 것 같습니다.”
나는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성태현에게 붙었던 패잔병들이 다시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까요.”
그들을 갈무리해서 다시금 민국당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군림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선 내가 굳이 대한당에 붙는 것보다, 다시 민국당 의원들을 정리해서 힘을 모으는 게 더 강력할 테니까.
김강진 의원은 능글맞게 말했다.
“대한당과 민국당이 으르렁거리며 싸우긴 하지만, 우리 둘은 그러지 말자고.”
나는 능글맞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시죠.”
“그러면 앞으로도 고생하고.”
“높은 곳에서 뵙겠습니다, 의원님.”
“그래, 들어가.”
나는 김강진 의원과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에게 지워 둔 빚은 분명 나중에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할 테지.
지이잉.
자리를 나오기 무섭게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인은 민국당 의원 박철성.
성태현 라인에서 나름대로 핵심이었던 4인방 중 하나.
지난 대선 이후, 직접 통화하는 건 처음이었다.
일부러 수신음이 몇 번이나 더 울린 뒤에야 느지막이 전화를 받았다.
“네, 최서준입니다.”
-어, 최 검사.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긴장한 목소리.
나는 여유롭게 답했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오랜만에 술 한잔 같이해야 하지 않겠나?
“하하, 그래야죠.”
나는 입꼬리를 휘며 말을 덧붙였다.
“머지않아 민국당 의원들 다 같이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그래?
“예.”
조만간 민국당을 접수하러 갈 테니까.
***
“안녕하십니까!”
“어.”
나는 간단히 대답하고서는 직원에게 발레파킹을 맡기고 호텔 내부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찾은 이곳은 힐컨시언스 호텔.
민국당의 성지와 같은 곳.
성태현의 대선 이후로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불청객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나는 망설임 없이 펜트하우스 버튼을 눌렀고.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보이는 종로 도심의 풍경.
눈 위에 있던 도심이 어느새 내 발밑으로 내려갔고.
띵-.
엘리베이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정장의 카라를 잡아당겨 빳빳이 정돈하고서.
어깨를 쫙 펴고 턱을 높이 든 채.
아주 위풍당당하게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이나 들어갔을까.
“최서준 검사님 오셨습니다!”
한 녀석의 외침과 동시에.
앉아 있던 민국당 의원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보며.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래.
찬양하고 경배하라.
왕의 귀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