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님 출세하신다!-285화 (285/341)

스파이가 활약하기 시작한다는 건 (5)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박형태 국무총리가 보내서 왔다는 걸 깨닫자, 자연스레 마음이 놓인 덕인지 부드럽게 근황에 관한 물음부터 흘러나왔다.

“못 본 지 꽤 지난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저번에 뵌 뒤로 반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시간이 빠른 것 같습니다.”

“원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세월이 흐르는데 가속도가 붙는다고 하잖습니까?”

고성탁은 능글맞게 대화를 받았다.

“저도 조금씩 느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고 프로님도 슬슬 가정을 꾸리고 정착하실 때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더 늦기 전에 아이도 가지셔야죠.”

“하하하, 안 그래도 이번 일만 끝나면 제대로 상대를 찾아 볼 생각입니다. 검사님 덕분에 결혼은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다니까요?”

“제 덕분에요?”

고개를 갸울이며 묻자, 그는 엄지, 검지, 중지를 편 채로 본인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대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마스크가 바뀌었잖습니까?”

“……아!”

“나이보다 젊게 보는 것은 물론이고, 기왕 성형 수술하는 거 남성적이게 부탁을 했더니, 여심을 사로잡는 데 최적화되었다니까요? 청와대를 넘어서 주변에서 인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고성탁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을 보탰다.

“얼마 전에는 길가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번호도 따여 봤다니까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빵 터져 버렸다.

정말로 이 정도 외모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게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러면 국무총리 외에 다른 인물들도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겁니까?”

“예. 대통령은 물론이고, 공재원 비서실장도 저랑 같이 일했잖습니까? 근데 전혀 모르는 얼굴입니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제가 목소리도 바뀌었을 뿐더러, 말투도 특이한 억양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서울말을 쓰다 보니 티가 날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잘됐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고성탁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아, 참. 혹시 그거 아십니까?”

“어떤 것 말씀입니까?”

“최근에 성태현에게 여자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는 은밀한 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청와대에서도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지만, 워낙 건수가 건수인지라 다들 쉬쉬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역시 물이 새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니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내연녀가 필라테스 강사 맞습니까?”

고성탁의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저 말고 혹시 더 청와대로 파견 나간 분이 있는 겁니까?”

나는 씨익 입꼬리를 휘며 답했다.

“그 친구입니다.”

“예?”

“제니퍼 강. 그 필라테스 강사를 제가 보냈다고요.”

“……아!”

고성탁은 꽤나 놀랐는지 큰 탄성을 터뜨렸다.

“허허…….”

이내 이어지는 헛웃음.

그는 혀를 내두르며 날 바라보았다.

순수하게 감탄 섞인 시선으로.

“진짜 검사님은 제가 생각하는 것의 한 수를 넘어서……. 아니, 그 이상을 내다보고 움직이시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충격이 가시질 않는지 고성탁은 연신 어깨를 들썩이며 놀라움과 탄복을 거듭했다.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겨우 안정이 되었는지,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근데 제니퍼…… 그 필라테스 강사가 어마어마하긴 한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대통령을 함락시키는 데 몇 주 걸리지도 않았다고 들었거든요. 그것도 모자라, 요즘은 완전 성태현이 애걸복걸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예. 국무총리가 비서실장과 은밀하게 나누는 대화를 들었는데, 제니퍼한테 퍼붓는 돈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라고 하더라고요.”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후궁을 넘어서 중전을 잡아먹고 정실 왕후가 되었을 만한 인재였던 모양.

김나나와 손을 잡은 게 신의 한 수처럼 느껴졌다.

“그럼 더더욱 잘됐네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

그는 눈을 번뜩였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성태현 정부의 멸망을 지켜보겠습니다. 아니, 이끌겠습니다.”

“그래 주셔야죠.”

나는 코를 찡긋하며 답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뒤, 고성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오랜 사담 끝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건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국무총리가 고성탁을 내게 보내 설득하라고 시킨 일.

“제가 어떻게 대답할지 아시죠?”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고성탁이라고 한들,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국무총리에게 짐을 지워 주려면.

그리고 고성탁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애간장이 녹게 만들어야 하니까.

고성탁은 입꼬리를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달복달하게 만들겠습니다.”

“예. 다만, 이번에는 긴 고민 끝에 거절해서 아슬아슬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 다음에 세 번째에는 국무총리와 같이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함께요?”

“네. 셋이 있는 자리에서 화술을 능란하게 펼치시는 겁니다. 거기에 제가 넘어간 것처럼 만드시면 되죠.”

그의 눈이 번뜩였다.

“저를 더욱 신뢰하게 되겠군요.”

“맞습니다.”

“예. 그러면 조만간 찾아뵈러 오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성탁은 고개를 꾸벅인 뒤, 차에서 내렸다.

***

고성탁과의 재회는 오래지 않아 이뤄졌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국무총리의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는지,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 나를 찾아왔으니까.

그것도 고중혁이라는 자신의 오른팔을 데리고서.

“오랜만이야, 최 검사.”

박형태 국무총리는 하회탈처럼 깊은 주름이 팬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아, 네.”

나는 일부러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실 줄은 몰랐는데…….”

사실 예상치 못한 건 맞았다.

윤설하에게 전화로 내 일정이 비는지 물어보고서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검사장실로 올라왔으니까.

아마도 근처에 도착한 뒤에 고민하다가 물어봤겠지.

“미안해.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혹시 실례가 되었다면 다시금 사과하지.”

국무총리라는 인간이 허리까지 굽히며 사과를 하니, 나는 적당한 선에서 그를 맞이했다.

“아닙니다. 일단 앉으시죠.”

“그래, 고맙네.”

윤설하가 커피를 가져다주고 난 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 그게…….”

박형태 국무총리는 에둘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혹시 작년에 기억나나? 함께할 수 있는 길은 열어 놓고 찾자는…….”

“제가 업무가 바빠서요.”

나는 흘긋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그러지.”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도 말했던 건인데, 교육부 황선형 장관님과 자리 한 번만 주선해 주면 안 될까 해서…….”

박형태 국무총리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이미 두 번이나 거절한 만큼, 이걸 들으면 내 심기가 좋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일 터.

그의 생각대로 나는 언짢은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그러자 시나리오대로 고성탁이 나섰다.

“검사님. 물론, 대통령과의 악연 때문에 저희가 달갑지 않으실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요. 성태현은 성태현이고, 총리님은 총리님이죠. 다만, 이번 건은…….”

성태현과는 별개의 건이라는 언질을 슬쩍 주고는.

“단순히 제 권한이 아니라, 황 장관님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기 때문에 고민하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황 장관님과 가까운 사이긴 하지만 이번 건은 영…….”

국무총리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래서 부탁하는 거네. 최 검사가 아니면, 이번 건은 답이 없어.”

고성탁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이번 건만 처리되면, 저희가 검사님을 돕겠습니다.”

나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식으로?”

“고검장 임기가 끝나도 옷을 벗지 않도록 말입니다. 성태현이 대통령이라고 한들, 총리님이 직접 나서서 설득하면 분명 고려하실 겁니다.”

평소라면 고민도 하지 않고 발로 찰 만한 제안.

그러나 나는 구미가 당기는 척, 턱을 괴고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고성탁은 입에 모터라도 달린 듯 말을 이었다.

“굳이 지휘보직이 아니라도 되잖습니까? 법무부 쪽도 괜찮고…… 성태현 임기만 지나면 분명 날아다니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는 거라면, 저희가 정말 발 벗고 나서서 돕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

“아니면 다음 정기국회에서 검찰법을 수정해서 임기를 늘리는 방향도 있습니다. 검사님께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으니, 이것 또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나 나는 그 말에 설득당한 척, 오래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 준 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제가 다리를 놔 드릴 수는 있습니다.”

“정말인가?”

박형태 국무총리는 고성탁이 무슨 말을 한지는 단숨에 잊어버리고 반색하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야기를 꺼낼 순 있지만, 황 장관님께서 수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는 구질구질하게 매달렸다.

“그래도 자리만 마련된다면, 내가 잘 이야기해서…….”

“아닙니다. 저한테도 말씀하셨습니다. 박형태 총리가 장관님 당신과 연결시켜 달라고 하면 칼같이 거절하라고.”

“아…….”

박형태 국무총리는 세상을 잃은 듯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끝나면 안 되지.

잠깐의 침묵이 지난 뒤.

나는 그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다만, 제가 나서서 설득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최, 최 검사가?”

박형태 국무총리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예. 저랑 친분이 꽤 두터워서 제가 말한다면 충분히 들어주실 겁니다. 이번 안건에 관해서도 저와 꽤 많은 대화를 하셨던지라, 저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두터우시거든요. 무엇보다…….”

거칠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장관 임기 이후에 정계 진출도 생각하시고 있는 터라, 저를 굉장히 신임하고 계시거든요. 잘만 이야기하면 이번 안건을 수락하시는 것도 가능하실 거라고 봅니다.”

정계 진출에 관한 건 당연히 거짓이다.

그러나 이를 알 리 없는 박형태 국무총리는 목이 빠질 정도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저, 정말 해 줄 수 있겠나?”

“그 대신.”

나는 두 손에 깍지를 끼고서 무릎에 올려 두었다.

“다음에 저 한 번 도와주시죠.”

“그게 어떤 일인지 알려 주면…….”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고성탁이 재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알겠습니다.”

박형태 국무총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고성탁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답했다.

“그게 무슨 일이 되었건 반드시 저희가 도와드리죠.”

자신의 오른팔이나 되는 인물. 그것도 이 자리에 데려왔다는 건 본인의 그림자 같은 존재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니 고성탁이 말한 걸 번복할 수는 없을 터.

역시나 박형태 국무총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약속드리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꺼냈다.

“좋습니다. 황 장관님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박형태 국무총리는 눈썹이 하늘까지 치솟을 듯 들썩였다.

“고맙네, 최 검사!”

순수하긴.

이게 미래에 어떤 카드로 쓰일지 생각하면 고마운 건 나지.

나는 입꼬리를 크게 휘며 그와 손을 잡았다.

“함께 일해 보시죠, 총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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