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님 출세하신다!-284화 (284/341)

스파이가 활약하기 시작한다는 건 (4)

그 뒤로도 황선형 장관과는 평일에 같이 연차를 내고 두어 번 정도 더 골프장에서 만났다.

일부러 그랬다.

캐디들을 통해 국무총리에게 이 소식이 들어가도록.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 만남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박형태 국무총리로부터 연락이 왔다.

-통화하는 건 오랜만이네, 최 검사.

“예, 그러네요. 정말 간만입니다.”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하네만…… 혹시 한번 만날 수 있나?

입가에 씰룩 미소가 지어졌다.

다만, 통화 중이기에 볼 수 없는 만큼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 그게…….”

시간이 없지.

너 만날 시간만 말이야.

“제가 요즘 약속이 줄줄이 잡혀 있어서 아무래도 이번 달 내에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가?

박형태 총리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진득하게 피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러면 내가 직접 고검에 찾아가면 되겠나? 종로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은 것 같고…….

“그거는…….”

-그렇지? 조금 부담스럽지?

미소를 짓는 걸 넘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걸 꾹꾹 참았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성태현 라인으로 들어간 탓에 앞으로 친하게 지내기가 힘들다고 한 사람이 먼저 연락해서 보자고 난리라니.

이 맛에 정치를 못 끊는다니까.

나는 넌지시 물었다.

“혹시 용건이 있으신가요?”

-다른 게 아니고…….

박형태 총리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소개받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부탁을 좀 하고 싶거든.

“아, 설마 황선형 장관님은 아니겠죠?”

-…….

바로 이어지는 침묵.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마이크를 음소거로 바꾸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잘 진행되고 있다.

빈집털이가 실패할 수가 없는 그림이 만들어지고 있는 모습.

“후우.”

호흡을 가다듬어 겨우 웃음기를 진정시키고 나서 다시 마이크를 켰다.

“장관님이라면 조금 곤란합니다. 제가 장관님과 친분이 두텁긴 하지만…….”

은근히 과시하면서.

“워낙 상황이 상황인지라, 장관님께서 곤란해하시고 있다는 걸 몇 번이나 들었거든요.”

딱 잘라 거부하는 척.

“다른 무언가가 구실이 있다면 모를까…….”

여지를 남기기까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 그런가?

“예. 그런데 제가 지금 운전 중이라서 다음에 다시 통화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그러지. 내가 또 연락함세.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금 히쭉 입꼬리를 휘었다.

국무총리가 매달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내 역할이 더 크게 느껴질 테니까.

조금 빡빡하게 굴긴 했지만, 2번 라인에서 활동하며 익히 봐 온 덕분에 박형태 총리가 이 정도로 절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분명 다른 무언가를 시도하겠지.

그때, 은근히 넘어가 주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걸 계기로 친분을 쌓고 미래 문자를 통해 신뢰를 완성하여 빈집털이를 이행하면 되는 법이지.

모든 게 순조롭다.

***

서울 청담동의 한 술집.

드르륵.

룸의 문이 열리며 들어온 인물은 법무연수원장 하진일.

진천에서 미리 잡아 놓은 약속이었다.

“오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려하자, 그는 손짓하며.

“일어나지 말게. 나도 앉을 거니까.”

그는 사람 좋게 인사하며 곧장 맞은편에 착석했다.

“2주 만에 보는 건가?”

“예, 맞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반갑네.”

“하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술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이 집은 메로구이가 괜찮아서 우선 그걸로 주문했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래, 좋지. 술안주로 최고야.”

하진일 원장은 금방 건배를 하고서 한 잔을 순식간에 비워 냈다.

“그나저나 자네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은데?”

그는 걱정스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피곤한데 괜히 내가 부른 거 아닌가?”

“아, 전혀 아닙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잠은 충분히 잤는데, 요즘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생겨서…….”

“뭔데, 말해 보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음…….”

나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척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편하게 말하라니까. 우리가 그런 것도 말 못 하는 사이였나?”

하진일 원장이 서운한 티를 내자, 나는 완강히 부정했다.

“그런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원장님께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뭔데, 말해 보게. 그리고 우리 사이에 폐는 무슨. 내가 오히려 자네 덕을 얼마나 봤는데.”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덧붙였다.

“힘든데도 말 안 하면, 나 서운하다?”

이 정도 태도면 말하기엔 충분하다.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국무총리에게서 연락이 계속 오고 있습니다.”

역시나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박형태 총리한테?”

“예.”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서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이번 법안 때문에 황선형 장관님을 소개시켜 달라고 계속 부탁을 하더군요.”

“허어…….”

하진일 원장에게 사표를 쓰라고 했던 게 바로 청와대다.

그가 성태현의 그림자라고 봐도 무방한 국무총리한테 좋지 않은 감정이 드는 건 당연한 사실일 터.

그의 얼굴이 심각해진 걸 확인하고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국무총리한테 좋은 감정이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면 거절해야지.”

“예. 거절은 했습니다만, 계속 요청이 오고 있고. 무엇보다…….”

고개를 들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국무총리 녀석에게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복수?”

하진일 원장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피어났다.

“예. 마음 같아서는 녀석을 한껏 이용하고 나서 팽해 버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지 않나?”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황선형 장관님이 저를 도와주셔야 하는데…… 장관님도 국무총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건 사실인 데다가 아직 제가 부탁할 만한 친분이 없어서 이야기를 꺼내긴 힘들어서 말입니다.”

“그렇지.”

하진일 원장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본인이 나설까 말까 고민하는 것일 터.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국무총리가 좌절하는 걸 보고 싶은 심정은 황선형 장관과 비슷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하진일 원장은 결심한 듯 두 눈에 힘을 준 채로 고개를 들었다.

“혹시 계획을 내가 들을 수 있나?”

“어떻게 그 자식을 엿 먹일지 말입니까?”

“그렇지. 계획이 실현 가능하고, 자네만 괜찮다면 내가 선형이를 설득해서 자네를 도우라고 말하겠네.”

“아닙니다. 원장님까지 그렇게 고생하시는 건…….”

“아니야. 까놓고 말해서 나도 국무총리에게 반감이 있는 건 사실이거든. 그렇기에 자네가 나서 준다면, 오히려 나대신 복수를 해 주는 것 같아서 좋을 것 같네.”

나이스.

내가 예상했던 것 중에서 최고의 반응이다.

“그렇다면…….”

나는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외부로 유출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는 결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해 중순, 한 가지 큰 사건을 하나 터뜨릴 겁니다. 그 중심에서…….”

그에게 빈집털이 작전 중 일부를 털어놓았다.

하진일 원장은 충분히 믿을 수 있고.

무엇보다 이걸 말해야만 그를 통해 황선형 장관을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차근차근 계획에 대해 들은 하진일 원장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 가능하겠나?”

“예, 물론입니다. 법적 절차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그걸 하려면 총 세 명이나 필요해. 국무총리는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 두 명은…….”

나는 씨익 입꼬리를 휘었다.

“박창식 법무부장관과 민호선 차장검사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벌써?”

“예.”

“허어…….”

그는 낮게 탄식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자네는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인물인 것 같네.”

“감사합니다.”

하진일 원장은 다시금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세 명 중 두 명이 이미 확보되었고.

자신만 움직이면 국무총리를 충분히 엿 먹일 수 있다.

빈집털이 작전으로 내가 차장검사에 올라가는 순간, 성태현이 분노를 터뜨리며 국무총리였던 박형태를 쫓아내리라는 건 뻔히 그려지는 그림.

물론, 그 후에 벌어질 일로 인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까지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내가 차장검사가 되는 순간, 성태현과 제대로 한판 붙는다는 건 알 수 있을 테니까.

오랜 고민 끝에 하진일 원장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돕지.”

그렇지, 그가 뺄 이유는 없지.

“내가 황선형 장관을 설득하겠네.”

“정말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 대신 약속해 주게. 그 작전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오랜 친구인 덕분인지, 황선형 장관은 어렵지 않게 하진일 원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와도 몇 번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 국무총리가 다시 제안할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수락하기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첫 번째 연락으로부터 사흘이 지났을 무렵.

퇴근길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검사님.”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사방이 탁 트인 퇴근길에 서울고검 주차장에서.

“오랜만입니다.”

“……뭐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바로 신의 손, 고성탁이었으니까.

주변의 시선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황급히 그를 차에 태웠다.

고성탁이 앉은 조수석 시트를 잡고 쏘아붙였다.

“뭐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언짢은 톤으로 물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아니, 그것도 이렇게 당당하게 오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계속해서 그를 쏘아붙였다.

“아직 작전 끝나려면 멀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돌발행동을 하시면…….”

순간 불안한 기운이 온몸을 덮쳤다.

“잠깐만. 혹시 걸린 겁니까?”

혹시라도 그가 걸렸다면,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순간.

신의 손이 입꼬리가 거칠게 휘어지더니.

“크흐흐흐흐…….”

낮게 웃음을 흘렸다.

“검사님.”

“…….”

“제가 걸렸겠습니까?”

그는 능글맞게 말을 이었다.

“국무총리가 보내서 온 겁니다.”

“설마…….”

“예, 맞습니다.”

그는 안심하라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인이 직접 전화하면 칼같이 거절하니, 황선형 장관을 소개시켜 주도록 만들어 달라고, 대신 검사님을 설득해 달라고 보냈습니다.”

설명을 들은 순간, 불안감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안도의 미소가 피어났다.

그 말인 즉슨.

국무총리가 고성탁. 아니, 고중혁을 굳게 믿는다는 증거.

그는 박형태 국무총리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그에 더불어, 우리의 빈집털이 작전도 아주 순행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당황하지 마십시오. 모든 게 아주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내 그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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