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가 활약하기 시작한다는 건 (3)
“이야, 오랜만이네요. 최 검사장님.”
“정말 간만입니다, 원장님.”
법무연수원장은 두 팔을 벌려 반갑게 날 맞이했다.
“오느라 고생 많으셨죠?”
“아닙니다. 2시간도 채 안 걸렸습니다.”
“그 정도면 오래 걸린 거죠.”
그는 푸근한 아저씨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내했다.
“들어가시죠, 준비 다 해 놨습니다.”
“예.”
커다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생각보다 넓은 광경에 흠칫 놀랐다.
“관사가 이렇게 넓습니까?”
“아니, 여긴 제 집이죠.”
“아…….”
“이런 곳을 관사로 쓰면 공무원들 사치 부린다고 난리 날 거 아닙니까?”
“하하, 맞습니다.”
서울에서 볼 수 없는 넓은 정원.
연못이 있다거나 커다란 화원이 있는 건 아니지만, 편안하게 바비큐를 해 먹기에 알맞은 크기.
그 증거로 한쪽 구석에는 이미 숯불이 든 그릴이 준비되어 있었다.
“춥긴 해도, 야외에서 이렇게 직화로 구워 먹는 게 좋더라고요.”
“맞습니다. 시원한 바람 맞으면서 술 한잔하면 취하지도 않습니다.”
“역시 최 검사장님이 뭘 좀 아신다니까.”
그는 씩 웃으면서 팔을 걷어붙였다.
“앉아 계십시오.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도와야죠.”
“에헤이, 손님이신데…….”
“가만히 있으면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는 못 이기는 척 내게 집게를 넘겼다.
“숯에 불이 붙은 거 같은데 골고루 펴 주기만 해 주십시오. 저는 안에서 술 좀 가져오겠습니다.”
“예.”
잠시 후, 그가 돌아왔을 때 나는 숯을 뒤적거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집이 진짜 좋네요. 혼자 사시기엔 오히려 적적하실 것 같은데.”
“나중에 은퇴하고 집사람이랑 같이 내려와서 살려고 준비해 놨습니다. 법무연수원장 임기가 끝난 뒤에 다른 곳에 가 있는 동안엔 별장으로 쓰고요.”
그는 인상 좋게 웃음을 지었다.
“그땐 편하게 연락하십시오. 최 검사장님이라면 별장은 얼마든지 빌려드리죠.”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고기를 구울 준비가 끝날 무렵, 슬쩍 물었다.
“장관님은 오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아, 회의가 길어져서 조금 늦을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조금 전에 연락했는데 한 30분 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내가 자리를 잡고 앉으며 자연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다다음주에 서울에 올라오신다고요?”
“예, 맞습니다.”
하진일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의 다섯 개 지검에 교육할 게 있어서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금요일 오후에 내려오시는 건가요?”
“서울의 동생이 주말에 꼭 자고 가라고 하기에 월요일 날 오전 일찍 올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때도 저랑 식사 한 끼 하시죠.”
“괜찮겠습니까?”
단순히 오늘의 자리만으로 황선형 장관을 국무총리와의 인연의 고리로 이용할 정도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큰 계획을 위해선 앞으로 한 차례 더 만나야만 한다.
황선형 장관을 움직이게 만들기에는 하진일 원장이 가장 최적화된 인물이니까.
오늘의 자리는 후일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 단계다.
“예, 물론이죠. 원장님 뵙는 거라면 저도 환영이니까요.”
“그러면 금요일 오후에 식사 한 끼 하시죠. 그날은 오전 강연만 하면 스케줄이 끝이라 여유 있으니 고검으로 가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나저나 강연은 어떤 내용으로 하시는 겁니까? 원장님이라면…….”
그렇게 한참 동안 고기를 굽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침내 황선형 장관도 자리에 도착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선형입니다.”
“최서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황선형은 사근사근하게 날 반겨 주었다.
“진일이가 그렇게나 최 검사장님 칭찬을 많이 합디다.”
“아, 그렇습니까? 하하핫.”
하진일 원장은 껄껄 웃으며 자리로 손짓했다.
“고기 방금 구운 거야. 식기 전에 얼른 먹자고.”
“그럴까?”
분위기는 금방 무르익었다.
시원한 소주 한 잔을 걸치고 직화로 구워 숯불향이 그득히 담긴 뜨끈뜨끈한 삼겹살에 쌈장을 푹 찍어서 한 입.
뒤이어 불어오는 차가운 밤공기.
기분이 안 좋으려야 안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술을 마시다 보니, 서서히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데선 한우고 와인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니까.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면 끝이야, 끝.”
“맞습니다.”
“이거 최 검사장님이 구우신 거죠?”
“예. 입에는 좀 맞으십니까?”
“말할 것도 없죠.”
그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말씀 낮추십시오. 제가 한참 후배입니다.”
“어, 최 검사님도 한국대 나오셨나?”
“네. 08학번입니다.”
“그러면 사양 않고 말 놓지.”
“예. 원장님도 말 편하게 하시고요.”
“그래. 그렇게 하자고.”
그들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목적이라고 말했던 아이의 교육에 대한 질문은 타이밍에 맞춰 꺼내고 적당히 마무리되었다.
어차피 이게 메인은 아니었으니까.
기본적으로 아이 교육은 한지유가 본인이 도맡아서 한다기에 일부러 신경 쓰지 않고 있는 참이었기도 하고.
“그나저나 서울에서 있으면 가끔씩 만나서 한잔해도 되겠는데?”
“그거 좋죠.”
황선형 교육부 장관이 꺼낸 말을 자연스레 받아쳤다.
“그러면 장관님, 혹시 골프 칠 줄 아십니까?”
국무총리의 루틴 코스 중 하나였던 골프장.
잘 친다면, 내가 못 치는 척 배우고.
못 친다면, 내가 알려 주는 시늉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리 최 검사장님은 골프 좀 치나?”
황선형 장관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도 모자라, 흥미로운 듯 혀가 쓱 나와 입술을 핥는 걸 보니, 확실하다.
이 인간, 골프에 취미가 있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좋아한다.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라, 아주 환장하는 수준일 터.
나는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아, 제가 최근에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재미가 들려서 말입니다.”
“친 지 얼마나 됐는데?”
“이제 1년 좀 넘었습니다.”
“이야, 이제 딱 흥미가 붙을 타이밍이네. 1, 2년 차가 딱 그렇거든.”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하진일 원장이 못 이긴다는 듯 황선형 장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골프광 아니랄까 봐…… 이 녀석이 골프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너 회원권도 엄청 많지 않나?”
“그건 당연한 거지.”
“골프채도 얼마 전에 플래티넘으로 된 걸 샀다는데?”
“플래티넘요?”
눈을 휘둥그레 뜨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
“산 게 아니라, 받은 거라니까. 우리 사위 놈이 얼마 전에 해외 출장 갔다가 선물로 사 왔지, 뭐람.”
백금이면 가격대가 어마어마할 텐데.
다른 건 몰라도 골프에 눈이 돌아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면 장관님, 혹시 다음 주 주말에 시간 되십니까?”
“어디 좋은 필드라도 있나?”
“예. 제가 우연히 회원권을 얻었는데 기왕이면 골프 좋아하시는 분께 선물을 드리고 싶었거든요. 성남 쪽에 겨울 골프장을 콘셉트로 하며 작년에 새로 개업한 곳인데, 상당히 시설이 좋다고 합니다.”
“그래?”
황선형 장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간혹 겨울에는 골프를 치기 힘들어 동남아 쪽으로 원정을 가서 골프를 친다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교육부 장관이라는 직책상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가 없어서 몸이 근질근질했을 터.
그런데 무려 겨울 골프장을 콘셉트로 새로 개업한 골프장이라니.
그의 입장에선 혹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테지.
“주말에 시간이 될지 모르겠는데…….”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내 무조건 시간 빼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이거 진천에 와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 가는데?”
“하하하, 아닙니다. 건배 한 잔 하시죠.”
“좋지!”
***
“와, 이게 그때 말씀하신 그 플래티넘…….”
“허허허, 부끄럽지만 맞네.”
황선형 장관은 껄껄 웃으며 골프채를 꺼내 보여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골프에 관해 기역 자도 잘 모르지만.
“이야, 자태부터 남다르네요.”
칭찬을 쏟아 냈다.
실제로 내가 골프를 배운 지는 약 3년 정도 되었다.
다만, 정말 재미있어 보여서 배운 거라기보다는 비즈니스 용도.
간혹 정치인들끼리 만나서 치는 게 전부일 뿐.
“그렇지?”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주차장에 차가 꽤 있던데?”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염려가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나는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필드 자체가 전부 독립되어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다른 팀과 마주칠 염려가 없습니다. 게다가 회원제라서 일반인들은 함부로 못 들어오고요.”
“그렇다면 안심이고.”
황선형 장관은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러면 이제 슬슬 한번 쳐 볼까?”
“좋죠.”
캐디들이 기본 세팅을 마치자, 황 장관이 먼저 내게 손짓했다.
“자네가 먼저 치게.”
“예.”
나는 곧장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일부러 살짝 옆으로 빗겨 쳤다.
필드의 경계면으로 향하게끔.
“아이고…….”
내가 안타까운 소리를 내자, 황선형 장관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그럴 수 있어. 초보 때는 다 실수하고 그러는 법이야.”
“오늘 긴장해서 그런지, 영 마음대로 샷이 안 나가네요.”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긴장했어?”
“장관님이 워낙 잘 치신다고 들어서…….”
“예끼, 그럴 필요 없어. 나도 좋아하는 수준이라니까.”
“하하, 긴장 풀겠습니다.”
나는 웃으며 슬쩍 골프공이 향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친 게 저 위쪽인데…….”
“그래도 가서 쳐야지. 넘어가지만 않으면 치는 거야. 박세리가 우물에 발 벗고 들어가서 쳤던 거 모르나?”
그럴 줄 알았다.
“아, 기억납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죠, 그러면.”
“그래.”
나는 캐디들과 자연스럽게 내가 빗겨친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황선형 장관과 한참 동안 사담을 나누며 잘 치는 척, 실수하는 척을 반복한 끝에 언덕 위쪽으로 몇 번 더 이동했고.
마침내 옆에 있던 필드와의 경계선에 도착했다.
황선형은 이미 압도적인 승리를 확정지었기에 껄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번엔 잘 좀 쳐 봐.”
“알겠습니다.”
나는 심기일전하는 척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때.
바로 옆 필드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기 국무총리 아닙니까?”
능청스레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황선형 장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시선을 돌렸다.
“박형태 총리?”
“예. 맞는 것 같은데요?”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국무총리일 것이다.
신의 손이 알려 준 그의 루틴에 따르면, 그는 이 시간에 정확히 저 필드에서 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공을 빗겨 치며 이쪽 경계선으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가 그쪽을 가리키며 떠드는 게 느껴졌는지, 국무총리 일행도 우리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캐디 하나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오늘 옆 필드에 높으신 분 온다고 했는데 총리님이셨나 보네.”
캐디님, 나이스 샷.
“아, 그러면 인사라도 할까요?”
“흐음…….”
중요 안건으로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껄끄럽긴 하겠지만, 이쪽에서 눈치챘다면, 국무총리 측도 마찬가지일 터.
장관이라는 직책 때문에 알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간단하게 인사만 할까?”
“예. 그러시죠.”
고민하는 사이, 국무총리 일행은 이미 이쪽으로 캐디들과 함께 골프장 카트를 타고 오기 시작했다.
더 윗사람이라도 아쉬운 사람이 오는 법.
어쨌거나 국무총리 입장에서는 교육부 장관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이내 국무총리가 친근하게 다가와 내게 인사했다.
“멀리서 보고 설마설마했는데 역시 우리 최 검사랑 장관님이셨네.”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짤막하게 인사했지만.
“이런 데서 다 뵙네요.”
국무총리는 친근하게 말을 이어 갔다.
“같은 골프장인 줄 알았으면 진즉에 뵐 걸 그랬습니다.”
“음, 네.”
그러나 황선형 장관은 역시나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
몇 마디 채 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가 내기 골프 중이라 집중을 해야 해서요.”
“아, 그렇군요.”
“그러면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황선형 장관은 고개를 꾸벅하며 돌아섰고.
국무총리의 얼굴엔 진한 아쉬움이 드러났다.
나는 짤막하게 인사를 하고서 몸을 돌렸다.
과거에 슬쩍 말을 터놓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굳이 길게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 대신.
황선형 장관에게 다가가 일부러 더 친한 척을 했다.
“아, 장관님. 오늘 생각보다 샷이 잘 안 나가는데 따로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됩니까?”
눈썹까지 들썩이며.
“제가 술 한잔 사겠습니다.”
황선형 장관은 흔쾌히 수락했다.
“자네라면 안 사도 알려 주지. 우선 자세는 말이야, 조금 전에 보니까 자네가…….”
그가 긴히 설명을 시작할 때 슬쩍 국무총리가 있던 쪽을 곁눈질로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국무총리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고는 급히 자신의 아랫사람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일이 재미있게 돌아갈 것 같은데?